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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
2016.2.2
토마스 만의 《마의 산》 첫 부분을 보면 공간 속에 깃든 시간적인 힘에 대한 짧은 언급이 등장한다. 공간도 시간처럼 망각을 낳는다. 예컨대 여행은 우리가 식물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공간의 힘을 실감하게 한다. 방금 전까지 몸 담았던 공간이 지워지고 새로운 공간이 눈앞에 펼쳐질 때, 즉 방금 전까지 몸 담았던 공간이 차장 뒤로 밀려나면서, 마치 잊고 온 물건처럼 시간을 집에 두고 온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여행은 이처럼 손쉽게 시간 지우기를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공간은 시간보다 신속하게 망각을 선물하지만, 시간만큼 효과적이진 않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집안 한구석에 처박혀 있던 두고 온 시간, 먼지가 조금 내려앉았지만 아직 곰팡이를 피워 올리지 않은 시간과 다시 대면하게 된다. 시간을 완전히 지우는 것은 역시 시간뿐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여행지에 두고 온 시간, 나를 따라 비행기에 올라타지 못한 시간은 그렇게 거기 두고 온 공간에 다시 갇혀 있다.
최근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는 것은 오로지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오늘 몇 페이지를 읽었는가를 계산하면서 시간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다. 장 그르니에는 《어느 개의 죽음》이란 책에서 자기가 기르던 개가 살아 있을 때는 왜 개에 대해 글을 쓸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자문한다. 그러면서 그는 글이 죽음과 모종의 연관성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가 죽은 개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애도의 방식은 글쓰기였다. 사실 아무것도 죽지 않는다면 인간은 결코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가끔씩 글은 너무 진한 죽음의 향기를 분출한다. 내가 읽은 책에 스며든 나의 시간, 내가 쓴 글의 행마다 스며 있는 나의 시간, 이러한 시간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단단하다.
장 그르니에는 질병, 노화, 죽음에 대해 종교와 철학이 제시한 해결책은 “환자처럼, 노인처럼, 시체처럼 살라는 것”뿐이었다고 투덜거린다. 이 대목은 묘하게도 아오키 신몬이 《납관부일기》에서 말하는 신란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신란이 말하는 ‘사즉불(死卽佛)’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이것은 죽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구원하는 장면을 그린다. 이러한 논리를 따라가면, 모든 사람은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죽음을 받아들이고자 마음 먹는 순간 빛을 체험하면서 성불하게 된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고행이란 죽음 전에 ‘죽음의 빛’을 체험하여 성불하는 것을 지향한다. 아오키 신몬은 이것을 “100% 죽음에 이르는 고행”이라고 말한다. 석가의 경우에는 35세에 “100% 죽음”을 체험하고 성불한다. 그런데 보통 사람에게는 ‘사즉불’은 곧 ‘불즉사(佛卽死)’여서, 성불은 곧장 죽음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성불 후에 길어야 몇 초, 몇 분, 몇 시간, 몇 달, 몇 년을 살 뿐이지만, 석가는 성불하고 나서 80세에 죽음을 맞기까지 45년을 더 살았던 것이다.
아오키 신몬은 ‘성불 후의 생존’이라는 기묘한 문제를 통해 석가의 종교적인 위대함을 이야기한다. 이미 죽었으나 죽지 않은 그 시간의 길이, 즉 성불 후의 시간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가는 깨달음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깨닫고도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하여 깨달음을 이야기하고 전파할 충분한 시간을 살았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즉 ‘성불 후의 생존’이 석가의 위대함의 실체인 것이다. 성불은 육체로 담아 유지하기 힘든 상태이므로,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걷는 일이므로, 이것은 얼마나 어려운 생존이겠는가? 실제로 많은 금욕과 명상은 단식을 수반하는데, 단식을 하게 되면 인간의 몸은 점점 목화(木化)되어 ‘고사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때 죽음 직전에 만나는 빛, 이것이 종교적 체험의 최대치로 상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아오키 신몬의 이야기에 비추어 보면, 장 그르니에의 말이 꼭 틀린 것도 아니다.
밀란 쿤데라는 《불멸》의 시작부에서, 수영장에서 마주친 한 노부인이 갑자기 “스무 살 아가씨의 몸짓”을 표출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그 부인이라고 해서 자신이 이제 더는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테지만, 그녀는 그 순간만은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일부를 통해서 시간을 초월하여 살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나이 없이 살면서, 어떤 이례적인 순간들에만 나이를 의식하는 것이리라.” 쿤데라가 발견한 것은 노인의 몸에서 튕겨 나온 젊은이의 몸, 늙지 않는 몸, 시간을 거스르는 몸, 불멸하는 육체였다. 인간의 몸은 시간을 그렇게 저장한다. 젊음과 늙음이 섞인 상태로, 어린이와 어머니가 섞인 상태로 시간은 인간의 몸 여기저기에 스며들어 있다. 그렇다면 ‘나이 없는 삶’을 방해하는 것은 결국 타인의 시선이란 말인가?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제11장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화이트버드호를 타고 온 선장 및 선원들을 만나게 된다. 28년 2개월 19일 만에 처음으로 유럽에 ‘두고 왔던 사람들’을 만나는 장면에서 로빈슨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이 인간들 하나하나는 저마다의 가치, 관심점과 싫어하는 점, 중력의 중심을 지닌, 상당히 논리 정연한 하나씩의 가능적 세계였다… 현실로 인정받으려고 기를 쓰는 가능태 말이다.”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존재의 가능성이다. 모든 개별적인 인간은 우리가 겪지 못한, 우리가 참여할 수 없는 존재의 가능성이다. 역으로 ‘존재’ 자체는 모든 인간을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한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인간이 조금은 더 예뻐 보일까? 그러나 로빈슨은 그 무수한 존재의 가능성에 현기증을 느끼며 승선을 거부하고 구토를 한다. 너무 오랫동안 시간의 다른 가능성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무인도에 살던 로빈슨은 나이를 모르고 살았다. 그러나 화이트버드호가 갑자기 28년 2개월 19일이라는 시간을, 유럽에 두고 온 시간을 로빈슨의 어깨 위에 쌓아 올린다. 이 말을 듣자마자 로빈슨은 시간의 무게에 짓눌리면서 자신이 노인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로빈슨이 시간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길은 승선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는 무인도의 시간을 유럽에 가져갈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이창익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주요 논문으로 〈소리의 종교적 자리를 찾아서〉, 〈신종교는 언제 종교가 되는가〉 등이 있고, 저서로는 《종교와스포츠》, 《조선시대 달력의 변천과 세시의례》 등이, 역서로는 《종교, 설명하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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