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뉴스 레터

409호-정오의 악령 혹은 나태함에 대하여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6. 8. 24. 18:03

 

정오의 악령 혹은 나태함에 대하여


 

 


 

2016.3.15

 

 

박사논문을 쓰던 중, 4세기 이집트 사막 켈리아의 수도사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의 다음 구절을 읽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정오의 악령’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아케디아(akedia)’의 악령은 모든 악령들 가운데 가장 사악한 놈이다....그는 마치 태양이 느리게 움직이거나 혹은 멈추어버린 것처럼, 그리고 하루가 50시간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런 다음 그는 수도승으로 하여금 눈을 계속해서 창문을 향하도록, 독방에서 밖으로 뛰쳐나가도록, 제9시(오후 3시)가 가까웠는지 알기 위해 태양을 주시하도록, 그리고 형제들 가운데 누군가가 오고 있는지 알기 위하여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도록 강요한다. 그런 다음 다시 그가 머무는 장소와 그가 하고 있는 똑같은 종류의 생활...에 대한 염증을 불러일으킨다...그 다음 악령들은...다른 장소들에 대한 갈망을 그 수도승 안에 불러일으킨다.”


 

 

그 외에도 ‘아케디아’에 사로잡히면, “책을 읽다가도 불안한 마음에 독서를 중단하고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지며”, “쓸모없는 계산으로 머릿속을 채우면서 책과 공책의 페이지 수를 세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덮어버린 책을 베개 삼아 깊은 잠에 빠지며”, 그러다 벌떡 일어나 “배가 고파서 무엇인가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당시 내가 이 구절을 발견하고 놀랐던 것은, 이 구절이 그날 오전 내내 내가 도서관 창가 자리에 앉아 했던 행동들, 즉 창밖을 내다보거나, 아는 사람이 들어오지 않나 문이 열릴 때마다 쳐다보거나, 책을 읽다가도 다른 생각들 때문에 마음이 산란해지고, 급기야 졸고 그러다 배가 고파지는 것- 이 모든 것들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묘사했기 때문이었다.


 

 

‘아케디아’를 ‘정오의 악령’이라 부른 것은, 이것이 특히 제6시 즉 정오에 수도자들을 가장 불안하게 만들고 그래서 <시편> 91편 6절에 나오는 ‘한낮의 재앙’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수도자들의 고요한 영적인 묵상의 길을 방해하는 “여덟 가지 사악한 생각들” 중 하나였던 ‘아케디아’는 에바그리우스의 제자였던 요한 카시아누스의 글을 거쳐 라틴 세계로 들어오며, 중세 시대 “칠죄종”의 하나인 ‘나태’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이 ‘나태’를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게으름, 즉 단지 움직이거나 일하기 싫어하는 마음으로 생각한다면, ‘아케디아’가 함축하는 다른 의미의 흐름을 놓치게 된다. 에바그리우스의 글에서도 드러나듯이 ‘아케디아’는 끝없이 솟아나는 생각들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고 불안해지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갈망하면서도 거기에 이르지 못하는 상태고,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꾸다 끝내 육체적으로도 지쳐버리는 상태다. 아케디아를 설명하기 위해 요한 카시아누스는 라틴어 ‘taedium’과 ‘anxietas’를 사용했다. ‘anxietas’는 ‘불안’, ‘근심’을 뜻하며, ‘taedium’은 ‘피로’, ‘지루함’, ‘권태’를 뜻한다. 또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케디아’를 ‘죽음을 가져오게 하는 현세의 슬픔(tristitia saeculi mortem operatur)’이라고도 말했다.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아케디아’-‘나태’는 ‘근면’ 혹은 열심’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의) ‘기쁨’에 반대되는 것이다.


 

 

‘아케디아’는 분명 그리스도교 안에서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는 악덕의 하나였지만, 그것이 어떻게 인간의 영혼에 작용하는지에 대한 교부들의 다양한 설명은 육체의 무기력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던 무수히 많은 상념, 상상, 연결되지 않는 산만한 이미지의 유령들 행렬, 그리고 그 속에서 솟구치는 궁금증, 자신과 세계에 대한 의심, 그리고 그 밑에 깔린 슬픔과 좌절을 감지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중세 시대를 거치며 ‘아케디아’가 어느 순간 검은(melas) 담즙(khole)의 체질, ‘멜랑콜리아’와 함께 이야기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멜랑콜리아’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안절부절 못하며 쉽게 졸음에 빠지고,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을 꿈꾸며, “유령과 같은 허상을 쫓으며”, 그리고 자주 슬픔에 빠지기 때문이다. ‘아케디아’가 흔히 턱을 괴고 졸고 있는 여인으로 묘사되는 것과 알브레히트 뒤러의 동판화 <멜랑콜리아 I> 속 천사가 턱을 괴고 있는 것 사이의 관련성 역시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뒤러의 멜랑콜리아에서 사색과 창조에 몰두하는 지식인과 예술가의 모습을 읽어내는 도상학적 해석은 ‘아케디아’의 감은 눈과 <멜랑콜리아 I> 속 천사의 부릅뜬 눈을 대비시키면서 멜랑콜리아와 아케디아를 구별짓고, ‘아케디아’를 또다시 게으름과 졸음이라는 죄악으로만 취급한다.


 

 

그러기에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글 <에로스의 유령>이 끝까지 ‘아케디아’와 ‘멜랑콜리아’, 즉 나태와 우울의 상호침투적인 관련성을 주장하며, 그 속에서 ‘유령의 허상을 쫓는 자’들이 지닌 힘을 이야기하는 것은 한편으로 반갑다. 우울의 한 가운데서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것을 현실화시키려 하는 “명상에 빠진 천사”에게도 여전히 ‘아케디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정오의 악령’도 어느 날인가는 나에게 산만한 단편적 이미지들에 둘러싸인 불안과 무기력을 넘어서 아감벤이 말하는 “최대한의 비현실을 움켜쥐고 최대한의 현실을 구축하는” 힘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 같은 희망 한 조각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최화선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최근 논문으로 <이미지와 응시:고대 그리스도교의 시각적 신심(visual piety)>,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 남장여자 수도자들과 젠더 지형>, <기억과 감각: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의 순례와 전례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