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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가 만든 세상
2016.7.12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제목에 등장하는 스미스는 종교학계서 널리 알려진 조너선 스미스(Jonathan Z. Smith)나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C. Smith) 혹은 휴스턴 스미스(H.C. Smith)가 아님을 밝혀둔다. 여기서 말하는 스미스는 종교자유와 관련하여 법정에 선 아메리카 선주민 알 스미스(Al Smith)로서 ‘종교와 법’ 분야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만들었다니 무슨 말인가? 사실 이는 미국의 종교(법)학자 설리번(W.F. Sullivan)이 최근에 쓴 논문 제목(The World That Smith Made)이다. 그런데 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인가?
2012년 1월 미국 연방대법원은 어느 초등학교의 교사 해임과 관련한 소송사건을 다루었는데 이 재판에는 가톨릭교회를 비롯하여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몰몬교, 아미쉬, 유대교인, 무슬림, 힌두교에 이르기까지 60여개 교단이 공익소송 형식으로 참여하였다. 도대체 어떤 성격을 지닌 재판이었기에 이처럼 많은 종교단체가 참여한 것일까?
사건의 배경과 경과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미국 미시간 주에 있는 루터교 소속 호산나-테이버(Hosanna-Tabor)라는 이름을 지닌 교회부속 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한 여성이 갑자기 수면장애와 관련된 질병(narcolepsy, 기면증)으로 휴직을 하게 되었다. 1년여에 걸친 치료 후 의사로부터 직장 복귀가 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그녀는 학교에 복직 신청을 했다. 그런데 학교는 그 동안 그 자리에 다른 교사를 채용했고 학교로 돌아온 여교사에게 사직을 권고하였다. 여교사가 사직안을 거부하자 학교측은 해임조치로 맞섰고 마침내 법적 공방이 시작되었다.
연방대법원은 만장일치로 교회/학교측의 손을 들어주었는데 그때 내세운 것이 ‘목회적 예외(minister exception)’라는 원칙이다. 이 원칙에 의하면 국가는 목회자의 임면과 같은 종교단체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는 개입할 수 없고 종교단체는 목회자 임면과 관련하여 자율권을 지닌다. 이는 미국 헌법수정 1조의 두 축인 국가에 의한 종교간섭 금지(no establishment)와 종교자유(free exercise of religion) 조항에 근거한 논리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하나는 해직 교사가 목회자(minister)에 해당하는가 하는 것으로서 이는 목회자의 정의가 무엇이며 누가 정의를 내리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당시 이 여성은 학생들에게 종교과목도 부수적으로 가르쳤지만 미술, 과학, 사회, 음악과 같은 ‘세속과목’을 가르치는 것이 본업이었다. 그런데도 법원은 교회/학교측의 논리에 따라 여교사를 목회자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다른 하나는 종교단체는 일반 법령을 위반해도 되는가 하는 물음이다. 만약 이 사건이 교회부속 학교가 아니라 일반 사업체에서 일어났다면 이 여성의 승소는 확실하다. 학교측의 행위는 장애인차별금지법(ADA)에 정면으로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원은 ‘목회적 예외’라는 원칙을 내세워 학교측의 행위를 차별금지법 적용에서 제외시켰다.
거시적으로 보면 이 판결은 법원이 종교집단에 엄청난 ‘특권’을 부여한 셈이다. 일반 사업체들과 달리 종교단체는 장애인차별금지법과 같은 일반 법령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교단체는 ‘초법적 단체’인가 하는 근본적 물음이 제기된다. 아무리 미국이 ‘종교자유의 천국’이라고 할지라도 어떻게 이러한 현상이 가능한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이 재판보다 20여 년 전에 일어난 한 재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0년 미국 서부에 위치한 오리건 주 정부와 앞서 언급한 스미스 사이에 일어난 법적 공방이 그것이다. 당시 아메리카선주민교회(NAC) 소속 신자로서 직장에 다니던 스미스는 종교의식의 일환으로 페요테(peyote: 환각성 물질을 함유한 선인장의 일종)를 사용하였는데 그로 인해 직장에서 해고되었다. 직업을 잃은 그가 주정부에 실업수당을 청구하자 주법(마약류 관리법)을 위반한 자는 실업수당을 받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자 자신의 행위는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자유의 권리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면서 소송을 제기하였다.
당시 연방대법원은 주정부의 손을 들어 주었다. 스미스는 페요테의 복용이 가톨릭교회의 성사(sacrament)처럼 자신에게는 중요한 종교적 의미를 갖는다고 역설했지만 법원은 그 의식이 지니는 맥락과 의미에 대한 검토 대신 아주 짧은 문장으로 답했다. “그 어떠한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행위일지라도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중립적 법’으로부터 면제의 특권을 요구할 수 없다.” 이 선언은 앞서 살펴본 호산나-테이버 교회학교 사건에서 법원이 제시한 ‘목회적 예외’ 원칙과는 정반대되는 논리로 보인다.
이처럼 종교자유와 관련하여 법원으로부터 ‘냉대 받던’ 종교가 어떻게 하여 20여년 만에 ‘목회적 예외’라는 말로 대변되는 막강한 특권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는가? 그 해답은 스미스판결이 초래한 ‘후폭풍’에 있다. 이 판결 이후 종교계는 종교자 가 심각하게 침해되었다고 분노하면서 총반격의 몸짓을 보였는데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종교자유회복법(RFRA)’이다. 교파와 신학의 차이를 넘어 총집결한 종교단체들이 의회에 압력을 넣어 통과시킨 이 법안은 국가에 의한 종교자유 규제를 최소화하면서 종교단체의 종교자유를 광범위하게 인정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사법부가 이 법안의 위헌성을 지적하면서 법안을 폐기하자 종교계는 위헌 논란을 피하는 방안으로 주정부 차원의 종교자유회복법들(mini-RFRAs)을 제정하는 전술을 취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종교계는 자신들의 ‘제도적 이익’의 확충을 위해 정치계와 적극 연대하는 모습을 취했다. 즉 정치권에 압력을 가해 종교계 사립학교나 복지기관의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국비로 지원받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의 다양한 몸짓을 시도한 것이다. 선거정치 하에서 ‘표’를 의식해야 하는 정치권은 종교계의 ‘표’에 민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종교계의 요구사항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대적 추이 속에서 호산나-테이버 사건이 일어났으며 ‘목회적 예외’라는 연방대법원 판결의 논리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스미스 판결의 ‘역풍’으로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이 공모하는 새로운 지형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설리번의 용어로 하면 ‘스미스가 만든 세상’이다. 스미스 판결 이후 종교자유의 지형이 역전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세상에서는 신앙양심에 근거하여 주류문화에 도전하는 개인의 종교자유보다는 정치권력의 힘을 빌린 종교집단이 자기확장의 도구로 활용하는 종교권력의 종교자유가 부상한다.
‘스미스가 만든 세상’은 오늘날의 미국사회에만 적용되는 그림인가? 필자의 눈에는 이 그림이 매우 익숙하다. 아니 미국사회보다 우리사회의 종교자유 풍속도를 더 잘 묘사하는 그림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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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Winnifred Fallers Sullivan, Elizabeth Shakman Hurd, Saba Mahmood, and Peter G. Danchin, eds., Politics of Religious Freedom(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5)에 실린 설리번의 글을 필자의 문제의식에 따라 재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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