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뉴스 레터

761호-왜 1950년대의 종교인가?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3. 1. 10. 18:43

 왜 1950년대의 종교인가?


news letter No.761 2023/1/10


        


     군대에 끌려가기 전인지, 후인지 아리송하다. 하지만 장병길 선생님과 함께 갔던 것은 확실히 기억나고, 답사 여행지였던 당시 신도안의 모습도 여전히 생생하다. 길게 소리를 뽑아내며 노래하고, 춤을 추며 뛰어오른다는 영가무도(詠歌舞蹈)를 앞세운 종교단체도 인상적이었고, 신심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자신을 성(性)불구자로 만든 이의 이야기를 들은 것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거기에서 누군가에게 스치듯이 들었던 한 조각 이야기가 거듭 다가와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 우리 쪽에서 그에게 도깨비나 귀신에 대해 물었을 것이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도깨비는 대포 소리에 놀라 다 도망가고 없어요!” 여기서 그가 말한 대포 소리는 1950년의 한국전쟁으로 인한 소란을 일컫는 것이고, 도깨비는 그 전(前)과 후(後)의 변화를 말해주는 하나의 징표라고 할 수 있다. 왜 도깨비는 한국전쟁 이후에는 사라져야 했던 것일까?

     한국전쟁은 1945년 8월의 해방 이후 극으로 치닫던 사회갈등과 이념 대립이 발화점을 넘게 되어 터진 사건이다. 전쟁 초기에는 북한군이 압도하여 부산 근방을 제외하고 모두 점령할 기세였지만, 미국 주도의 연합군이 9월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를 반전시켜서, 이번에는 중국 접경까지 치고 올라갔다. 하지만 11월에 중공군이 참전하여 1951년 1월 서울이 다시 함락되기에 이르렀고, 그 이후의 2년 동안은 3.8선을 중심으로 전선이 형성되어 참호전의 양상으로 이어가다가,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한국군과 연합군의 사상자가 각각 65만명, 15만명으로 모두 약 80만명, 그리고 북한군과 중공군의 사상자가 각각 80만명과 100만명 정도로 약 260만명의 군인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하였다고 본다. 국제전으로서의 한국전쟁의 성격이 여기에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보다 두드러진 특징은 전투원의 사상자 규모가 아니라, 민간인의 피해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다. 민간인 사상자는 200만명이 넘고, 피난민도 650만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그 피해가 기동전이 한참이던 7-8개월 기간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그 참상의 강도(强度)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전황(戰況)이 엎치락뒤치락하며 전개됨에 따라 양쪽 모두 후퇴할 때, 그리고 지역을 새로 장악했을 때, 이적 행위 의심자에 대한 집단 살해가 자행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보도연맹원(保導聯盟員) 학살사건’이다. 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1949년에 사상통제를 위해 만든 반공 조직으로, 본시 좌익 전력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실제로는 관권을 동원한 지역 할당제에 따라 사상적 노선과는 관계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가입되었다. 전세가 불리하게 되어 한국군이 후퇴를 하게 되자, 보도연맹원의 이적 행위를 사전에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이들의 대규모 처형이 이루어졌으며, 어느 통계에 의하면 피살자가 12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북한군에 의한 학살도 이에 못지않아서 어느 쪽이 점령을 하든 그 사이에 낀 민간인은 맷돌에 갈리듯이 어이없이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무차별하게 자행된 부역자 처형, 혹은 이른바 “예비 단속”뿐만 아니라, 대살(代殺)이란 끔찍한 짓도 행해졌다. 대살은 “이미 준비된 혐의자 목록의 인원수와 처형된 인원수가 일치해야 하므로 혐의자 본인이 없을 때는 가족 누군가가 그 벌을 대신 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당시 강화도 희생자의 거의 반 수가 그런 대살의 피해자”였다.1) 그뿐만 아니라, 비행기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도 엄청난 규모였다. 피난민 속에 북한군이 섞여서 이동한다는 정보는 양민 살상을 더욱 거리낌 없이 자행하게 했다.

      전쟁으로 죽은 자는 이제 말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사라지지 않고 전해진다. 왜냐하면 살아남은 자들이 그들에 대한 기억을 말하기 때문이고, 고통스러운 몸짓으로 그들의 회한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과 고통의 몸짓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은 보다 더 깊고 광범위하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념적 상호 부정(否定)이라는 전 지구적 차원과 배타적 주권이라는 민족적 차원이 민간인 폭력이라는 장(場)에서 치명적으로 결합되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야만적인 분쟁으로 격화되어 수많은 공동체들의 도덕 질서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던 것이다”2)

     여기에서 말한 바의 “갈기갈기 찢긴 수많은 공동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우선 두 가지의 성격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조선 시대부터 이어진 주요 인간 관계망이고, 다른 하나는 비교적 근래 형성된 민족 공동체이다. 전자(前者)는 다시 혈연을 중심으로 하는 친족 공동체와 지연을 바탕으로 하는 마을 공동체로 구성된다. 그런데 당시 한국사회 인간 관계망의 주축을 이루었던 세 가지 핵심 공동체, 즉 친족, 마을, 그리고 민족 공동체가 한국전쟁으로 인해 회복 불능의 상태에 처하게 된 것이다. 우 전쟁 중에는 혈연이나 지연의 기존 유대감이 심각한 갈등과 살해의 도구가 되었으며, 이적 행위를 했다고 간주된 개인의 행위에 대해 공동체 전체에 책임을 묻는 집단적 처벌이 자행되었다. 그런 와중에서 친족의 혈연 공동체와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가 안팎으로 해체의 압력을 받아 허물어지게 된 것이다. “식구”(食口)라는 메타포를 사용한다면, 한국전쟁은 우리가 그동안 모두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게 만들었던 밥솥을 거꾸로 들어 엎어버린 격이라고 할 만하다. 한국전쟁은 한국인의 생활 네트워크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와해시켰기 때문이다.

     친족은 조상 제사, 마을 공동체는 동제(洞祭), 그리고 민족은 동포(同胞) 단결의 레토릭과 의식(儀式)으로 유지되는 것이거늘, 한국전쟁으로 모두 근본적으로 붕괴되어 어느 것도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을 공동체와 함께 살았던 도깨비가 사라지는 게 이상한 일이 될 수 없다. 일제에 맞서기 위해 애써 구축(構築)하고자 했던 단합된 민족 공동체의 시도도 마찬가지로 좌절을 맛봐야 했다. 같은 민족이라고 여기던 집단에서 분열이 일어나 내전(內戰)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이후로도 서로 철천지원수(怨讐)로 증오하며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구심점으로 작용하기를 멈춘 민족 대신에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바로 남쪽에서는 ‘어버이 미국’이고, 북쪽에서는 ‘어버이 수령’이다. 이것이 한국의 보수주의자가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숭미주의자가 된 까닭이며, 1950년 8월 31일의 일기를 적은 김성칠(金聖七:1913-1951)의 다음 글에서 이런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오두수(吳斗洙)군이 찾아왔다. 용하게도 살아 찾아온 것이 반갑다...“선생님은 이 전쟁을 어떻게 보십니까?” 하기에 “첫째는 동족 상잔함이 슬프고, 둘째는 미군과 조선사람이 겨루어 방금 피를 흘리고 있는데, 우리는 오히려 미군에 마음을 붙이고 있는 사람이 많게끔 되었으니 이 사실이 더욱 슬프다.” 하였다.”3)

     미국을 향한 경사(傾斜)는 일찍이 19세기 말부터 나타났지만, 미군정을 거치면서 제도적인 세력을 얻기 시작했고, 급기야 한국전쟁을 결정적인 계기로 하여 공고화하게 되어 오늘날의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 동포로서의 하나 된 민족 공동체가 상호 적대감으로 분열되어 남한에서는 그 빈 자리를 ‘어버이 미국’이 차지했다면 전통적으로 이어지던 친족과 마을 공동체가 허물어져 사라진 자리는 무엇이 차지했는가? 필자는 이 물음이야말로 1950년대 및 그 이후의 한국종교문화에 관한 연구에서 충분히 다룰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1950년대에 만들어진 종교적 판도는 현재에 이르도록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보이므로, 이런 주제에 대해 좀 더 연구자들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p.s.
 2023년 2월 13월(월), 오후 3시에 〈1950년대의 종교문화〉에 대하여 온라인 콜로퀴움이 열립니다. 추후에 연구소에서 공지가 있을 예정이니,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1) 권헌익, 《전쟁과 가족: 가족의 눈으로 본 한국전쟁》, 정소영 옮김, 파주: ㈜ 창비, 2020, 62쪽.
2) 위의 책, 64쪽.
3) 김성칠, 《역사 앞에서: 한 사학자의 6.25 일기》, 정병준 해제, 파주: ㈜ 창비, 2009 (1993), 202쪽.

 

 

 

 

 



 

 

 

 


장석만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한국근대종교란 무엇인가?》의 책과 <두 가지 몸의 늙음: 한국 근대 노년 관점의 변화>, <식민지 조선에서 여자가 운다> 등의 논문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