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사랑이 이기지 못하는 것도 있을까: 영화 납치(2023)에 관하여

 

news letter No.806 2023/11/28

 

 

 

팬데믹 상황에서 영화제들이 대폭 축소되거나 온라인 위주로 진행되어 현장을 찾아갈 수 없었지만, 올해 들어 많은 영화제가 정상화되어 비로소 몇몇 영화제의 현장을 찾아갈 수 있었다. 그중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던 영화 한 편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보았던 납치라는 영화다. (Rapito [Kidnapped]: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 이탈리아 등 3개국, 2020, 125. 20235월 칸영화제 공개. 10월 부산국제영화제 초청. 2024년 국내 개봉 예정)

 

납치19세기 중반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모르타라 사건’(Mortara Case)을 소재로 한 영화다. 이는 볼로냐의 한 유대인 가족의 남자아이가 갓난아기 때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교회가 그 아이를 부모로부터 빼앗아 간 사건이다.

 

모몰로와 마리안나 모르타라 부부는 부유한 유대인으로서 자녀도 많다. 어느 날 갓난아기인 에드가르도가 심하게 앓자, 그가 죽어서 림보에 가면 어쩌나 걱정하던 하녀 안나 모리시가 그에게 몰래 가톨릭 세례를 준다. 다행히 에드가르도는 별 탈 없이 잘 자란다. 그러나 몇 년 뒤 안나가 자신이 한 일을 교회에 알렸고, 이에 가톨릭 신자인 아이를 비신자인 부모가 길러서는 안 된다는 교회법에 근거한 종교재판관 피에르 펠레티 신부의 명령에 따라 경찰들이 에드가르도를 데려가려 들이닥친다. 모르타르 부부가 저항해 봤지만, 교황령인 볼로냐에서 교회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렇게 1858년 여름, 6살의 에드가르도는 부모 곁을 떠나 로마로 보내져 유대인 개종 아동 양육원에 맡겨진다.

 

모르타라 부부는 아이를 되찾으려 분투한다. 몇 달 뒤 겨우 허락된 잠깐의 면회 동안 유대교 기도법과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을 잊지 말라며 에드가르도를 다독이고, 유대인 공동체와 국내외 여론의 힘에 기대하기도 한다. 그런데 매일 밤 유대교 기도문을 외우던 에드가르도였지만, 그는 교회 말을 잘 들어야 집에 돌아갈 수 있다고 배웠기에 부모를 냉랭하게 대한다. 그러나 결국 엄마 앞에서 에드가르도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날마다 유대교 기도문을 외운다고, 집에 가고 싶다고 외치며 몸부림친다. 이에 흥분한 아빠 모몰로가 에드가르도를 몰래 데리고 나가려다 발각되고, 결국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까지는 면회조차 할 수 없다는 금지를 당하게 된다. 게다가 그동안 중요한 도움을 주었던 유대인 공동체도 이를 계기로 이 일에서 손을 떼게 된다. 한편, 볼로냐에도 이탈리아 통일 혁명의 여파가 닥쳐 교황령이 해제되고, 펠레티 신부는 에드가르도 납치 혐의로 세속 법정에 세워진다. 그러나 재판은 승산 없이 흘러가고, 멀리 로마의 에드가르도는 서서히 진짜 가톨릭 신자가 되어 간다. 동시에 혁명과 변화의 물결이 점점 거세지면서 영화는 클라이맥스로 향해 간다.

 

이탈리아 통일 과정과 교황권 몰락에 관한 역사적 지식이 있다면, 이 영화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꼭 그러지 않아도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거대한 종교 권력과 연약한 소수자 집단의 대립이라는 주제는 충분한 보편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사건 당사자인 에드가르도의 변화를 따라가는 것과 별도로, 다른 인물들도 눈길을 끈다.

 

우선, 교황 비오 9(1792-1878, 재위 1846-1878). 그는 근대 이탈리아의 격동 속에서 급격히 추락하던 가톨릭 교회의 위상을 무겁게 짊어지고 있었다. 그에게 에드가르도 같은 개종 아동들은 교권의 건재함을 과시하기에 적합한 꿈나무들이었다. 그렇게 그는 에드가르도를 손자처럼 아끼면서 동시에 기민하게 이용한다.

 

또 다른 인물은 하녀 안나다. 비록 몰래 에드가르도에게 세례를 주긴 했지만, 안나는 자신의 행동에 확신이 있어 보이질 않는다. 세례 주는 법을 몰라 길 건너 가게주인에게 방법을 물어보고 왔던 것,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교회 측에 자신이 한 일을 고백한 것, 에드가르도의 아빠 모몰로가 절박한 모습으로 집까지 찾아왔을 때 도망친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안나가 에드가르도에게 세례를 준 것은 그가 딱히 열혈 신자여서가 아니다. 그저 약간의 교리라도 주워들은 평범한 신자라면 누구라도 똑같이 했을 수 있다. 물론, 부모 허락 없이 그 자녀에게 몰래 세례를 준다면 이는 옳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는 애매한 면이 있다. 사실상 부모의 신앙 대물림 문제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과연 판단 능력이 없는 아기에게 부모가 신앙을 물려주는 것은 타당한가? 비록 안나가 잘못된 일을 했어도, 그를 쉽게 비난해버리기 힘든 것은 이 때문이다.

 

끝으로, 에드가르도의 엄마 마리안나. 세월이 흘러 정식 신부가 된 에드가르도가 처음으로 고향 집에 온다. 엄마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서다. 놀랍게도, 엄마와 단둘이 있게 되자 그는 자기가 아기 때 당했던 일을 똑같이 엄마에게 하려 한다. 마음이 급하다. 임종 전에 세례를 주어야 엄마가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마리안나는 아들의 손길을 거절한 채 유대인으로서 눈을 감는다. 에드가르도의 마음은 엄마에 대한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성직자로서 사명감이었을까. 종교 권력에 의해 황망히 아들을 빼앗긴 긴 고통의 시간을 지난 마리안나의 마음에는 엄마로서의 사랑마저 재가 되어버렸던 것일까. 그 고통은 죽기 직전에 비로소 아들을 만난 순간에조차 엄마의 사랑을 되살려내지 못할 정도로 깊고 강한 것이었을까.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지만, 사랑이 끝내 이기지 못하는 것도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영화는 내년에 정식으로 수입해 개봉할 예정이라고 한다. 국내 영화계 상황이 워낙 안 좋아서 상품보다 작품성을 추구하는 이런 영화가 실제 개봉될는지는 기다려봐야 하겠지만, 혹시라도 개봉된다면 꼭 다시 찾아서 보고 싶다.

 

 

 

 

 

 

김윤성_
한신대 디지털영상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공저로 《종교전쟁: 종교에 미래는 있는가》, 《동아시아 여신 신화와 여성 정체성》, 역서로 《문화 설명하기》, 《신화 이론화하기》, 논문으로 〈브루스 링컨의 방법 테제 연구〉 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