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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 49재, 그리고 남겨진 것들을 돌아보면서

2009.7.7


7월 10일은 전직 대통령의 49재가 되는 날이다. 그 날 불교계를 비롯하여 각 계에서는 49재가 열릴 예정이라고 한다. 7일 간의 국민장에 이어 49재를 앞둔 지금까지도 그에 대한 담론은 여전히 미완성이며 진행 중에 있다. 어쩌면 그에 대한 평가는 이미 한국사회에 크게 두 가지 시각 -서민의 입장을 대변한 비권위적 개혁을 시도한 진정한 대통령, 혹은 열광적인 추종자들에 의해 조작된 실패한 정치인-으로 나뉘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근현대에 이루어진 문명의 복합성이 인간의 삶을 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지금처럼 한 인물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이다. 예컨대, 그저 순수한 이념이나 신념만으로 일생을 살아온 사람마저도 근현대 문명의 얼키설키한 잣대로 보면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그 자신이 생각하고 피력하는 인식보다 외부의 시각이나 판단에 의한 인식이 더욱 중요하게 작용하는데, 특히 정치에 연관된 인물인 경우에는 그 인물을 들여다보는 스펙트럼이 훨씬 다양하게 전개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가 떠난 지 3일 째 되는 날, 나는 봉하마을에 다녀왔다. 10만 여명으로 추산되는 그 날의 조문행렬은 길게도 이어졌다. 장례식은 그의 지지자들과 마을 주민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여당 당직자들은 조문을 하지 못하고 돌아갔고 보수언론의 취재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추종자들의 고함소리가 난무하였다. 그 와중에 한 시간을 기다려 조문을 마치고 국밥을 나누는 조문객들은 생각보다 초라했던 장례식장을 보고 이게 무슨 국민장이냐며 푸념하기도 했다. (모 교수는 이번 국민장이 역사상 그 어떤 국민장보다 완벽했으며 간디와 박정희 대통령 때보다 화려했다고 한다. 그 어떤 국민장도 이번처럼 많은 인원이 동원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종교인들의 조문도 이어졌다. 각 종교계에서 보내온 화환이 조문객을 맞았고 조계종 승려들과 원불교 교직자들이 단체조문을 다녀갔으며 한 쪽에서는 천리교 교직자가 혼자서 전직 대통령의 무죄를 주장하는 피킷을 옆에 두고 종교의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장례식장은 다양한 종교인들의 조문행렬과 함께 소리 없는 여러 정치적 견해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의 종교는 무교이다. 젊은 시절에는 독실한 불교신자인 모친의 영향으로 불교서적을 탐독했다고 하고 1986년에는 영세를 받아 세례명(유스도)을 얻었지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고 성당에 출석하지 않으니 무교라고 스스로 밝히기도 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을 만났던 2002년에는 “하느님을 믿느냐”는 추기경의 질문에 ‘희미하게 믿는다’고 대답을 하면서 앞으로 프로필 종교란에 ‘방황’이라 쓰겠다고 우스갯소리를 한 적도 있다

그의 세례명 유스도(Justus)는 정직을 뜻한다고 한다. 바이블에 세 번 등장하는 유스도는 소위 교권에 편승하지 못한 비주류인이다. 가롯 유다 대신에 열두 제자에 영입할 두 사람을 두고 제비뽑기할 때 낙선한 것이 첫 번째 유스도(행 1:23-26)이고, 바울이 당시 이스라엘의 주류세력인 유대인들의 비방과 반대에 부딪혀 휴식을 취한 곳이 이방인인 두 번째 유스도의 집(행 18:7)이었다. 세 번째 유스도는 바울이 옥중에 있을 때 함께 문안한 이로서 바울의 동역자요 위로가 되어 준 인물이라고 소개되었다. 보통 세례명은 성인의 이름을 본 따는 것일 텐데 왜 바이블에서 별 비중이 없는 주변인의 이름을 받았을까? 사람은 이름을 따라 간다는 옛말처럼 낙선과 비주류, 옥중, 이방인 등으로 나타나는 유스도의 모습은 그에게 낯설지 않았다.

국민장 영결식에서도 각 종교계의 순서가 공존하고 있었다. 불교는 조계종 대표가 영가축원문과 반야심경을 낭독하였고 개신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가 기도를 하고 명성교회 성가대가 노래했다. 천주교는 노 대통령에게 영세를 주었던 송기인 신부가 고별의식을 거행하였고 원불교 교구장이 천도의식을 치렀다. 영결식에서 유독 개신교 의례가 어울리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은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전직과 현직 집권자가 오버랩 되어서일까?

이번 사건을 통해 남겨진 종교적 이슈 중의 하나는 자살이다. 지금까지 자살에 관한 종교계의 인식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특히 기독교는 인간의 생명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온전히 신에 속한 것이라고 인식해 왔기 때문에 자살한 영혼은 구원받지 못할 존재라고 주장해 왔다. 신의 형상(The Image of God)을 부여받은 인간은 신의 창조물인 동시에 신의 성전으로서 인간의 신체와 건강, 생명을 소중하게 다루었으며 생명을 의미하는 피를 신성하게 생각해서 구약시대에는 희생제물의 피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다. 기독교의 생명윤리는 이처럼 강력한 윤리적 전통으로서 현대의 생명윤리에 대응해 왔다.

주목할 만한 발언은 국민장 6일째, 봉하마을을 찾은 정의사회구현 사제단에서 나타났다. 김인국 신부는 말하기를, 자살에 관한 전통적인 입장은 변함이 없지만 이 경우에는 사회적 타살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구원의 여지가 있다고 언급한 것이다. 이 발언은 앞으로 자살에 대한 새로운 논란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특히 최근에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하면서 이제 죽음에 관한 논란의 중심이 자살에 관한 종교적, 윤리적 재조명으로 번져갈 가능성이 많다.

한 인물이 던져놓은 파장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 많은 논쟁점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물고기 한 마리가 일으켜 놓은 흙탕물처럼 물고기만 잡으면 가라앉을 흙탕물은 아닌 것 같다. 비온 뒤의 흙탕물은 물속 생태계를 걸러내고 자정시키는 성질이 있다고 한다. 그가 남겨놓은 논란들이 자정시키는 성질의 것이기를, 그렇게 이 사회가 자정되어 가는 과정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혜정_

계명대,대신대 강사 /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와종교연구소 연구원
kamihye@dreamwiz.com

주요논문으로 <한경직 연구의 관점: 기독교적 건국론>, <한국 그리스도교의 정치종교 관계 인식>,
<미국 공립학교에서의 종교교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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