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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769호-칠궁과 종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3. 3. 14. 20:08

칠궁과 종묘


news letter No.769 2023/3/14

 

 

 

          
     작년에 개방된 청와대 바로 곁에 칠궁(七宮)이라 부르는 사당이 있다. 청와대와 가까워 출입이 제한되고, 미리 예약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는데 청와대 개방과 함께 이곳도 쉽게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궁’은 임금의 처소가 아니라 사당이다. ‘칠궁’이란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육상궁(毓祥宮), 연호궁(延祜宮), 선희궁(宣禧宮), 경우궁(景祐宮), 덕안궁(德安宮)의 7개 사당을 가리킨다. 각각의 사연이 있겠지만 이곳 사당의 주인은 조선시대 왕을 낳은 어머니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왕을 낳았음에도 사후에 종묘가 아닌 이곳에서 제사를 받는 것은 그들이 왕의 정식 부인이 아닌 후궁(後宮)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칠궁으로 알려진 이곳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 곧 육상궁의 자리였다. 지금이야 사당의 뒤쪽에 청와대, 그 앞쪽에 경복궁이 있어 육상궁의 자리가 크게 느껴지지 않지만 조선 후기 경복궁이 임란으로 소실된 이후 오랫동안 빈터로 남아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지역의 중심은 육상궁이라 할 수 있다.


     조선사회는 종법제를 근간으로 하였다. 이는 왕실을 비롯한 가계(家係)가 적장자(嫡長子)를 통해서 종통(宗統)을 이어가는 사회 제도이다. 왕조 국가에서 국왕과 왕비 사이에 왕자가 태어나 장성하여 그 아비의 왕위를 계승한다면 왕위 계승에 따른 갈등은 적을 것이다. 여러 자식이 있다면 장자에게 우선권을 주어 그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다. 그러나 왕비가 왕자를 낳지 못하면 후궁에게서 난 왕자가 왕위를 계승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자식이 없는 왕후를 폐하고 왕자를 낳은 후궁을 왕후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후궁의 자식이 아버지인 국왕과 그의 정비(正妃)를 부모로 섬기면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것은 자식의 유무와 관계없이 아내의 자리를 지켜주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지위를 계승한 아들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하는 모순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자식을 낳은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이다. 종통과 혈통의 불일치가 빚어낸 고통이었다.

    조선후기 왕 중에서 선조, 광해군, 인조, 경종, 영조, 정조, 순조 등은 적장자의 계승과 거리가 있었다. 부모를 높이는 최고 방법은 후궁의 어머니를 비(妃)의 자리로 올리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생모인 공빈(恭嬪) 김씨를 왕비로 추숭하고 그 신위를 종묘에 봉안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폐위와 함께 추숭의 흔적도 사라졌다.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는 살아서 왕비까지 올랐으나 무고(巫蠱)로 인하여 폐위되고 사사되는 화를 당하였다. 이후 숙종은 후궁이 왕비로 나아가는 것을 금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경종은 생모를 위해 ‘빈’의 작위를 회복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숙종과 숙빈(淑嬪) 최씨 사이에 태어난 영조는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하고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영조는 자신의 생모를 높이는 사업을 오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시행하였다. 즉위 후 영조는 생모를 위해 숙빈묘(淑嬪廟)를 세웠으며, 1744년(영조 20)에 그 사당의 이름을 ‘육상(毓祥)’, 무덤은 ‘소령(昭寧)’이라 하였다. 그리고 1753년(영조 29) 생모에게 ‘화경(和敬)’이라는 시호를 올리면서 육상묘를 육상궁으로, 소령묘를 소령원(昭寧園)으로 높였다. 이는 조선후기 궁원제(宮園制)의 시작으로 이후 여러 궁(宮)과 원(園)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국왕의 이름으로 제사를 지냈다. 이것은 별도의 봉사손을 마련하여 제사를 맡기는 이전 제도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칠궁에 모셔진 사당의 주인들은 행복했을까? 이들의 삶이 한결같진 않았다. 대빈궁의 장희빈은 자신의 명을 누리지 못하였고, 선희궁의 영빈 이씨는 자신의 아들이 뒤주에서 죽는 것을 보아야 했다. 사후에도 남편의 애틋한 사랑을 받은 것은 연호궁의 정빈 이씨이다. 경우궁의 유빈 박씨는 자신의 아들이 왕으로 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나름 영화를 누렸다. 그들의 삶이 평탄하지 못하였더라도 사후 왕을 낳은 생모로서 존숭받았음은 그들의 사당을 통하여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자신의 부모를 높이는 것은 효행 중 가장 중요하고도 가치 있는 일이었다. 당시 정치적 상황에서 본다면 이는 왕권의 존숭과 직간접으로 연결된 것이었다. 그러나 효의 실천이 곧바로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해주진 않는다. 과도한 효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 생모에 대한 지나친 추숭은 무엇보다도 종법제의 근간을 허물 수 있다. 비록 적장자 중심의 종법제에서 발생한 문제이지만 이를 부정하는 것은 그를 받치고 있는 왕조의 기반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러므로 영조는 종묘의 질서를 보존하면서 변례(變禮)를 만들어 상황을 바꾸어나갔다.

    처와 첩을 가르는 주요 기준이 예의 유무였다. 육례(六禮)의 예를 행하여 맞이하는 것이 부인이라면 부부의 예 없이 들어온 것이 첩이었다. 예가 없음은 그가 사회적 존재로 자립할 수 없음을 말한다. 가족 내에서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조선후기 그들의 존재는 부정하기 어려웠다. 왕실의 계승에서 그들의 역할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제 그들은 궁호를 통해 사회적 지위를 얻고, 시호를 받음으로써 왕을 낳은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종묘와 칠궁의 구별을 버릴 순 없었다. 그러므로 칠궁은 종묘와 함께 보아야 할 조선시대 의례 공간이다.

 

 

 

 

 

 

 

 

 

 


이욱_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주요 저서로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조선왕실의 제향 공간-정제와 속제의 변용》, 《조선시대 국왕의 죽음과 상장례-애통・존숭・기억의 의례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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