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뉴스 레터

771호-인자수(仁者壽)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3. 3. 28. 18:13

 인자수(仁者壽)


news letter No.771 2023/3/28
        

  
           

          

     초고령사회 진입을 코앞에 둔 한국에서 노인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다. 늙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사실 노인 인구의 급격한 증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느닷없이 발생한 것이 아니다. 근대국가 건설에 매진했던 입장에서 이런 현상은 이미 같은 길을 먼저 걸었던 주변 국가들로부터 충분히 예상했던 결과이다. 막상 마주한 현실 앞에서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당혹스러워하는 배경은 그동안 실무적 준비를 게을리한 탓도 없지 않겠지만 문제는 좀 더 근본적인 데 있다고 본다. 실무적 준비야 어제오늘 나온 이야기도 아니고 나름 복지국가 패러다임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어가면서 예산이나 노인시설 인프라 구축 등의 측면에서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꾸준히 확장해 나가는 추세인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세대 간 갈등의 난관은 있겠지만 국가 구성원들의 합의에 따라서는 지금 보다 더 획기적인 방식으로 대응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노인 비율의 증가는 빈곤과 질병을 물리친 인간 승리의 증거라고 안도하기에는 뭔가 불안하고 공허한 느낌을 남긴다. 그 원인을 일단 늙음에 대한 사유의 빈곤이라고 해두자.

     어진 사람이 장수한다는 문구가 《논어 옹야(雍也)》에 나온다. 춘추시대에 나온 말이니 아주 오래전이다. 당시는 오래 사는 사람이 드물었다. 인간으로서 지향해야 할 최고의 가치를 수명과 연결하는 현실은 지금 내가 사는 이 세계와 얼마나 다른가. 하지만 솔직히 이 문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어질게 사는 사람이니 남들한테도 많이 베풀고 관대했을 터이고 마음이 평안하니 요즘 말로 스트레스를 덜 받아서 오래 살 수 있었겠지.” 양자의 인과 관계를 스트레스가 질병을 부른다는 현대 의학의 관점으로 설명하는 방법은 일면 타당성이 있는 듯싶지만 별로 고려할 가치는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인(仁)이 지닌 고유의 가치가 완전히 배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와 인이 같은 차원에서 논의될 사안은 아니다. 지금의 관점을 다른 시대로 투사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인자수’와 유사한 의미를 지니지만 마찬가지로 이해하기 어려운 명제가 또 있다. 《상서》나 《예기》와 같은 문헌에 보면 덕(德)이 있는 사람이 장수한다는 문구가 있다. 거칠게 인을 덕의 한 측면으로 간주하면 ‘인자수’보다 더 포괄적인 문구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상서 무일(無逸)》에는 은나라와 주나라 역대 왕들을 덕의 유무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그 결과가 장수 여부로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덕이 있는 사람은 일신상의 안일함이나 쾌락 대신 백성들의 삶을 대변하여 늘 노심초사한다. 그렇다면 왜 덕이 있는 사람은 장수한다고 했을까. 안일함은 수명을 단축하기 때문이라고 언급한 당나라 때의 한 주석서의 설명은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실마리는 《상서》 전체 맥락을 고려하면 풀릴 수도 있다. 《상서》는 덕 있는 사람이 천명을 받는다는 주제를 다양한 에피소드를 매개로 펼치는 책이다. 같은 논리로 덕 있는 사람은 하늘의 명으로 장수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상서》는 장수가 하늘이 내린 복(福)이라 말한다. 장수는 외부에서 주어진 선물이다.

    주나라 청동기 금문(金文)에는 덕에 관한 이야기가 좀 더 원초적인 형태를 띠고 등장한다. 금문에 언급된 덕은 대체로 조상이 후손에게 내린 은혜로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다. 후대 문헌에서 덕이라는 용어가 인간이 지닌 어떤 자질이나 품성을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하여 금문의 용법은 덕의 외부적 기원을 강조하는 경향이 짙다. 여기서 조상이 내린 덕을 찬양하고 보답하는 일이 빠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살아 있는 후손의 몫이자 의무이다. 바로 조상제사가 그런 보은의 행위에 속한다. 금문은 조상제사를 가리켜 효(孝)라고 칭한다. 그리고 장수는 효에 대한 보상의 선물이다. 덕과 효와 수로 이어지는 순환 구조는 금문 이야기를 구성하는 뼈대이다.

    어질고 덕 있는 사람이 장수한다는 명제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시대와 지금의 간극은 매우 크다. 늘 자신의 행위를 감시하고 판단하는 외부자의 존재를 의식하며 그 보상으로 장수의 복을 얻는다고 믿었던 시대의 이야기를 지금의 상황에 직접 이식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비교는 가능하다. 초고령사회의 장수는 인간 의지의 산물이다. 그런 의지의 영역에 과학이나 경제에 대한 고려는 포함되어도 윤리적이거나 의미론적 차원에 관한 관심은 미미하다. 초고령사회에서 장수는 그 자체 목적으로 취급된다. 내가 느낀 공허함은 거기서 유래하는 듯하다. 무수하게 쏟아지는 노인 혹은 노화 담론에서 장수한다는 사실 이상으로 의미론적 논의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까닭은 장수 자체로 모든 목적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건강하고 윤택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 말고 또 다른 지향점이 있을까. 노인의 지위와 역할이 사회적으로 모호해지고 심지어 더는 기대할 것이 없는 존재로 폄하되는 상황은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임현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최근의 논문으로 〈중국 고대 도시의 종교적 성격에 관한 연구: 대읍상(大邑商) 은허(殷墟)를 중심으로〉, 〈서주시기 위계와 권력에 관한 소고: 도시의 종교적 성격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