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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770호-한민족과 분단국가, 그리고 민족종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3. 3. 21. 17:05

한민족과 분단국가, 그리고 민족종교


news letter No.770 2023/3/21

 

 

 

          
           

     지난 2월13일 ‘1950년대의 한국종교’라는 주제로 한종연의 비대면 콜로퀴움이 있었다. 이 글은 그것에 참여하면서 한민족과 분단국가 간의 모순에서 파생된 ‘한국종교의 자기 한계’를 그려본 단상이다. 더불어 최근 언론에 의하면, 국가 간 각자도생의 시대에 다시 한미일과 북중러가 대립하는 신냉전 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한다. 이는 해방 이후 냉전체제로 빚어진 민족분단의 흑역사를 고려한다면 그런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 이념이 과거 반공이든 지금의 자유 가치이든 드러나는 결과는 남북을 이간(離間)시키고, 일본의 군사안보 이익을 보장해 주는 한미일 삼각동맹 체제가 다시 등장하게 하는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정말 실감 난다.

     일제 말기 전시동원체제가 한반도에 강제되면서, 조선의 종교들은 일본종교에 강제로 통합되거나 아니면 연합하든가, 심지어는 교단이 해산되고 지하화되었다. 당시 존속했던 종교들은 일제의 침략전쟁에 동원되거나 지원활동을 하는 것 이외 거의 독자적인 종교활동은 불가능했다. 물론 이 시기 민족종교의 항일 신명공사나 기독교의 신사참배와 같은 일부 종교인의 일제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자신의 신앙때문이지 아니면 민족적 항거대문이지는 꼭 따져 봐야만 평가가 가능한 문제다. 어떻든 지금의 눈으로 보면 당시의 한국의 종교는 모두 표면상으로는 친일 종교였다.

    그런 가운데 광복(光復)을 맞이하게 되자 조선의 종교들은 자신의 종교를 복구하거나 조선인의 종교로 재구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민족분단은 그런 재건과정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당시 미군정은 해방공간의 이념적 지형을 바꾸는데 반공적인 기독교 세력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그래서 기독교에 일본종교의 적산 자산을 특별히 배분하고, 크리스마스 공휴일과 같은 각종 제도적 선교 편익을 제공하였다. 그 결과 해방 전 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한국 기독교가 50년대 말 급속히 팽창하여 한국의 종교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후 분단국가 한국에서는 종교라고 한다면 서구 기독교를 닮아야 참다운 종교이고, 신이라고 한다면 초월적인 유일신만이 참다운 신으로 대접받게 된다. 여기에는 해방 이전의 한국종교 주류가 3.1운동을 주도한 천도교, 해외 독립투쟁을 전개한 대종교, 신명을 통해 해원상생을 주장한 증산교 등의 민족종교였고, 그 민족종교는 민족의 정체성으로서 단군과 한국인의 신관으로서 신명(神明), 그리고 이 땅에 지상천국의 건설로서 개벽을 주장하는 종교였다는 의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거의 망각의 수준이다.

    민족분단은 국가도 없는 가운데 민중이 어렵게 투쟁해 만든 민족의 이상(理想)을 송두리째 앗아갔으며, 미소 패권의 냉전체제는 한국에 친일 청산을 가로막음으로써 민족의 역사(歷史)와 정기(正氣)을 모두 폐기해야 할 지경이었다. 이 모두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 패권을 위한 냉전체제의 확산과 그로 인하여 야기된 동족상잔의 한국전쟁 때문이다. 이로써 남북은 핏줄의 민족보다 세속 이념이 우선시되는 사회로 개편되었고, 개항기 이후 줄곧 주도적 역할을 한 민족종교는 사회 전면에서 속절없이 밀려나게 된다. 실제로 미군정은 냉전체제 이념적 동맹자로서 기독교 세력을 선택했으며, 한국전쟁은 분단 냉전체제의 이념을 한국사회에 제도화, 내면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민족과 민족종교가 가진 정치적 휘발성을 제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같이 분단반공주의가 지배이념의 중심에 서게 되자, 자연 친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그 뒤를 따르게 되었고, 한국의 민족주의는 이제 더 이상 자기의 주장을 내세울 수 없는 처지였다.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분단국가는 자기 생존을 위해 자유진영의 중심 역할을 담당한다면서 주제넘은 자부심을 부추기고, 여기에 또 자유진영의 최후 보루라는 세계사적 의미까지 더하면서 민족분단에 따른 개개인의 수호 사명까지 강요하였다. 이후 그 개인적 사명은 자유진영의 최전선을 방어한다는 ‘반공적 선민의식’으로 정착된다. 그런 선민의식의 기반 위에 한국 기독교 세력은 분단국가 건설에 앞장서서 지지하고 나선다. 이 같은 이념적 태도는 기독교를 분단국가와 구조적 통합에 가까운 동맹 관계를 형성하게 하고, 결국 ‘반공의 보증수표’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한국의 민족종교가 담고 있었던 저항적 민족주의는 사회 비전을 제공하는 능력을 상실하였으며, 오직 분단반공주의를 통해서만 제한된 자신의 소명을 다할 수 있었다. 그것이 민족주의 색채가 덧씌워진 반공주의, 곧 이승만의 일민주의(一民主義)였다.

     한편, 민족의 이름으로 근대국가의 역할을 대신해 왔던 민족종교들은 해방을 맞아 광복의 기쁨을 누리기는커녕 도리어 민족 존속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위기를 맞는다. 민족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분단체제, 동족상잔(同族相殘)이 가져다준 인륜도덕(人倫道德)의 상실, 그리고 분단국가와 민족공동체의 불일치 등의 문제들은 한국의 민족종교를 심히 옥죄고 있었다. 그 외에도 공동체 해체에 따른 전통문화의 기반 파괴, 미군정의 적산 자산 기독교 배분과 교회를 통한 해외 원조물자 배급 등은 당시의 민족종교에는 하나같이 악몽 같은 세월이었다. 특히, 민족과 국가의 불일치는 일제강점기에 민족운동을 통해 형성한 민족의 역사와 정신을 모두 쓸모없게 만들고, 나아가 한국사회 반공 국가주의와 한민족 민족주의로 양분하는 결과를 낳았다. 양자는 분단국가 체제에서 서로 갈등을 일으키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조용히 양립해 있다. 전자를 기반으로 한 종교가 국가권력과 관계되는, 북한을 악마화한 ‘냉전적 종교’라고 한다면, 후자를 기반으로 한 종교는 분단국가와는 거리가 있는 민간차원의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이전의 민족종교를 계승한 종교들이다. 다시 말하자면, 전자가 세속 이념을 강조하는 기독교 계열의 종교가 중심이라면, 후자는 민족과 인륜 도덕을 강조하는 민족주의 계열의 종교가 중심이다.

    한국전쟁 이후 정착한 ‘반공적 선민의식’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성향의 민족종교들을 등장시켰다. 이들은 바로 반공주의이면서도 동시에 민족주의 성향을 지닌다. 말하자면, 분단지향의 반공적 선민의식에 충실하지만, 한국인의 삶의 현장을 기반으로 출발하기 때문에 한국적 종교성 또는 영성(靈性)을 많이 담고 있다. 비록 기독교나 불교의 신앙 양식을 가졌다고는 하나 신앙 내용으로 보면, 이전의 민족종교가 가졌던 단군, 개벽, 해원, 신명과 같은 민족 고유의 신앙이나 사상들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이들을 기독교에서는 ‘이단’으로, 불교에서는 ‘종파형 신불교’라고 부른다. 이들의 등장으로 인하여 당시의 민족종교 지형도 크게 달라지는데, 이전까지 사회를 주도한 자생적 민족종교들은 후퇴하고, 그 자리에 한국적 기독교나 ‘종파형 신불교계’가 대신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전자는 성령 체험 중심의 부흥회를 통해 형성된 영계공동체 기독교들이다. 김백문(金百文)의 이스라엘수도원(1945), 박태선의 전도관(1949), 문선명의 통일교(1954), 나운몽의 용문산기도원(1956) 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종파형 신불교’는 전통종교인 불교로부터 분리된 신흥종파들이다. 이들도 ‘한국적 기독교’와 그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불교적인 신앙양식을 가지고 있으나 한국의 종교성이니 영성들을 충분히 담고 있다. 이 신불교들은 대체로 끊어진 과거 종파불교를 중창하는 것을 주장하나 실제로는 해방 이후 불교재건에서 지도부의 혼란으로 빚어진 것들이다.

    이후 한국의 민족종교는 결국 민족의 앞날에 대한 전망을 상실하고 문화적인 영역에서만 자리를 지키는 모양새를 보인다. 가끔 대 배달 민족의 웅비사관을 들고나와 기독교와 충돌을 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자주통일의 그 날만 꿈꾸고 있다. 반면 한국의 기독교는 한국사회 내부로 급속히 확산하여 한국의 종교계를 정복하는 방식으로 재편하게 된다. 이를 두고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신의 축복’이라고 표현했다고 하지만, 민족종교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한민족의 비극이고 청천벽력 같은 재앙이다. 어떻든 현재와 같은 개신교, 불교, 천주교 3대 종교 중심의 한국 종교지형이 이때 자리 잡게 된다. 이후 한국의 기독교는 한국의 다른 종교를 포함한 전통문화와 지속적으로 갈등을 일으키면서도 종교적 패권만 아니라 문화적 사회적 패권까지 확장해 가는 모양새다. 민족종교에 큰 상처를 준 민족분단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이 같은 기독교의 패권 현상은 거의 변화가 없을 것 같다. 아마 전쟁의 참상을 겪은 그들의 체험적 진리가 변화를 쉽게 용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탈냉전의 시대를 맞아서도 한국의 종교지형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종교문화는 항시 변화하고 있고, 그곳에는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다. 단지 한국인의 종교적 삶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분단국가 한국은 지금 세계가 부러워할 만큼 10위의 경제 대국이고 세계 6위의 군사 대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민족분단이 존속되어야만 국제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로부터 우리는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

 

 

 

 

 

 

 

 


윤승용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
논문으로는 <한국종교의 이상세계론, 그 연구를 위한 시론>, <현대종교와 民族主義: 유신시대 (1972-1979)를 중심으로>, <한국전쟁과 종교지형변화>, <동아사아 종교의 근대화과 그 한계- 동아시아의 민중종교를 중심으로->, <민주화시대 불교개혁운동과 그 한계>, <한국 신종교에 대한 종교사적 연구와 과제>. <한국민족종교의 기본사상-단군, 개벽, 신명> 등이 있고, 편·저서로는 《한국 신종교와 개벽사상》, 《현대 한국종교문화의 이해》,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책임편집), 《한국 종교문화사 강의》(책임편집), 《한국민족종교문화대사전》(책임편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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