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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르네상스와 기독교의 새로운 가독성

2010.6.1



너무나 선명한 직설법 탓이었을까, 차마 소리내 불러보지 못했는데, 가슴 언저리에 오래 남았던 노래가 있다. 술자리에서 선배들이 날선 열정과 부끄러움이 뒤범벅된 붉은 얼굴로 목청껏 부르던 박종화의 노래, “바쳐야 한다”. 알랭 바디우의 『사도바울』과 슬라보이 지젝의『죽은 신을 위하여』, 조르조 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을 겹쳐 읽다가, “사랑을 하려거든 목숨바쳐라”로 시작하던 기억너머의 그 노래 가락이 불현듯 떠올랐다. 세 권의 책은 공교롭게도 기독교의 사랑과 폭력을 수반하는 혁명적 사랑을 교차시키며, 사도 바울과 ‘그의 유보된 메시아적 시간’을 우리시대의 정치 철학적 문제의 심장부로 다시 불러들이고 있었다.

알랭 바디우, 슬라보이 지젝, 조르조 아감벤은 현재 가장 주목할 만한 사상가들로 꼽히는 몇몇에 속한다. 철학적 입론이나 특정 주제를 두고는 서로 논쟁하고 대립하지만, 그들은 잃어버린 마르크스주의의 대의를 어떻게 다시 철학적으로 재정립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이들은 후기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전 지구적 재편과정이 소비와 욕망을 부추기며 탈정치화를 조장하는 현 상황에 맞서,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근대비판이 도달한 주체의 상실/해체, 실천적 무기력, 냉소적 이성의 함정을 비판하면서 우리 시대의 첨예한 문제들과 정면으로 씨름하고 정치적 실천의 자리를 고민한다는 점에서도 서로 닮아있다. 이처럼 뜨거운 세 지성이 헤겔과 레닌, 니체, 벤야민, 칸트, 라캉 등 지난 세기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흔히 보수적이고 가부장적 기독교의 정초자로 여겨지는 바울과 기독교를 다시 읽어내고 있는 광경은 충분히 의미심장하고 흥미롭다.

이들의 바울과 기독교 해석은 언뜻 불경하고 전복적이지만, ‘가장 사랑하는 것은 가장 철저하게 배반하는 것’이라는 정신분석학적 도식에 충실하다. 다시 말해 이들은 통상적 기독교를 비기독교적 상상력을 통해 전복하고 뒤집는 방식으로 진정한 기독교의 저력에 도달한다. 지젝에 의하면 기독교는 배반의 종교다. 성육신을 통해 신은 자기를 분할하여 스스로를 배반했고,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신을 부정했으며, 바울은 역사적 예수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한 부활신학을 통해 한시적 예수를 배반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예수에게 영원성과 보편성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바디우는 특수한 것을 보편적으로 위장하는 제국적 보편주의와 구별하여, 차이들을 무관심하게 횡단하며 ‘모두에게 모든 것이 되었다고’ 말하는 바울을 진정한 혁명적 주체로, 기독교적 믿음을 ‘선언된 확신’으로 재해석하며 은총의 유물론을 이야기한다. 또한 아감벤은 사도의 바울을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라기보다는 유대교 메시아신앙의 충실한 대변자로서 재정위하면서, 바울이 말하는 ‘시간의 종말’의 임박이라는 비상시국을 이해하는 열쇠는 혁명상황의 비상시국이라고 주장한다. 요컨대 이들은 무신론이나 유물론,혁명적 메시아주의의 입장을 취할 때, 역설적으로 기독교의 진정한 핵심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배반적 독해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그들이 철저히 서구 기독교적 유산 속에 있으며, 그러한 살해와 배반의 과정을 통해 “유서없이 남겨진” 그 유산을 재발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사실 그들의 결론이나 종교에 대한 입장을 앙상하게 정리하면 기독교 분석의 깊이에 못 미치는 여타 종교들에 대한 이해의 폭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게다가 때로 요약된 결론 자체는 어쩌면 전혀 새롭지도 않다. 급진적 신학 전통에서 이미 했던 이야기일 수 있다는 거다. 그러나 정작 이들을 읽는 즐거움과 묘미는 다른 데 있다. 그것은 다양한 샛길과 우회로를 넘나들거나 한 텍스트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문제를 끊임없이 재정의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주제화하는 태도와 방식들, 다양한 영역을 놀이하듯 가로지르면서도 묵직한 주제들을 놓치지 않고 끌고 가는 사유의 힘을 마주하는 데 있는 것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제기된 풍부하면서도 세밀한,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문제들도 적잖게 유익한 소득이다. 20세기 발터 벤야민의 ‘메시아적 마르크스주의’를 통해서 성서가 비로소 새로운 가독성을 획득했다고 한 아감벤의 말처럼, 이들의 전복적 바울해석은 기독교에 새로운 가독성을 부여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현대 사상계에서 종교는 과연 여전히 흥미로운 텍스트인가라는 확대된 질문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의 관련하여 위의 책들이 제각각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 제1번을 참조하고 있음을 주목할 만하다. 벤야민은 당대에 지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역사적 유물론을 꼭두각시로, 신학을 체스판 아래서 그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곱사등이 난쟁이로 빗대면서, 이론투쟁의 장에서 역사적 유물론의 성패는 신학을 눈에 띄지 않는 파트너로 삼아, 얼마나 “인용부호 없이 잘 인용”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바디우, 지젝, 아감벤은 역사적 유물론이 파산한 이론으로 전락하고, 신학이 여전히 건재한 동시대의 상황에서 벤야민의 테제를 각각 다시 뒤집고 변주하여 사유한다. 설정은 변했어도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여전히 역사적 유물론과 신학의 가능하고 유의미한 관계다.

이런 식의 문제제기는 단순히 종교와 정치의 부적절한 밀월관계에 대한 폭로와는 구별된다. 오히려 종교비판을 통해 형성된 것처럼 보이는 근대 이성의 구조적 문제, 그 결정체인 근대국가와 근대 법체계의 외설적이고 도착적 구조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종교와 정치의 문제에 대한 재정의와 근본적 성찰을 유도하는 것이다. 이는 뒤집어보면 근대 이후 기독교의 표면적 존재방식, 그 이면을 들여다 볼 것을 요청하고 있기도 하다. 지젝이 ‘종교가 사라지면 이성도 사라진다’는 기독교 정통파 체스터턴의 언급을 인용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종교는 근대세계의 주변이 아니라, 가장 핵심부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정치철학적 사유가 종교문제에 근접해 가고 있는 것은 현대 종교학이 놓쳐버린 총체적 종교에 대한 미세한 감각들을 일깨워준다.

바울 르네상스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서구학계의 새로운 지적 분위기를 드러내는 위의 책들은 근대 이후 오히려 더 내밀하게 자리잡은 종교와 정치, 이데올로기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며, 제3의 언어를 통한 기독교의 번역과 재서술을 통해 기독교, 나아가 종교의 새로운 가독성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도, 진리와 보편성이라는 잃어버린 대의를 어떻게 종교학과 학문영역에 도입할 것인가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생각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안연희_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박사과정 수료 chjang1204@hanmail.net

주요논문으로 <일제시대 한국 개신교 부흥회 운동연구>,<근대 영지주의 연구에 대한 비판적 고찰>,<초기 기독교의 선택-문

명과 반문명의 기로에서>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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