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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삼매(如夢三昧) - 원전(原典)은 어떻게 종교학이 되는가?
그러니까 발단은 참회였다. 정확히는 참회의 종교학적 의미에 대한 불교학으로부터의 질문, 그게 발단이었다. 참회. 과오에 대한 뉘우침.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아가며 적어도 한 번은 저지를 수밖에 없는 여하한 실책에 대해,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생래적으로 가지게 되는 회한과 성찰의 심리, 혹은 그 표현 양식. 그런데 그것의 종교학적 의미를 불교학의 자리에서 묻다니. 우선은 종교가 참회에 대해 지니는 독특한 태도를 반추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될 터였다. 이번의 경우에는 질문자의, 그리고 질문을 받은 나 자신의 연구 분야에 맞추어, 응당 불교도임을 자처한 인간들이 참회에 대해 지녀왔던 집단적 역사적 태도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용어를 천착했다. 초기에 그 용어가 내포했던 개념의 범주를 살피고, 역사적으로 용어와 개념이 변천해 온 바를 추적했다. 그렇지만 그 종교학적 의미는 또 어떻게 길어 올려야 할 것인가.
종교학의 한 동학이 제언했다. 그대의 마음껏 말하시오. 예리한 견해다. 세상에는 종교학자의 수만큼 많은 종교학의 정의가 있다. 나는 종교학자로서의 자의식을 갖고 있고, 따라서 나에게는 나의 종교학이 있다. 마음껏 말했다. 관련된 경률(經律)과 2차 연구들을 살펴보니, 불교의 참회는 이러이러했더라고. 그런데 참회라는 기표(signifiant)는 점차 심리와 행위의 두 방향으로 자신의 기의(signifi)를 심화시켜가더라고. 그 심화된 양상이 또한 그러그러하더라고. 흥미롭게 임했고, 뿌듯한 결론이었다. 그러나 질문자의 의구심을 채우지는 못한 것 같다.
종교학의 다른 두 동학이 제언했다. 종교전통의 교리학이 종교학에서 구하는 것은 타종교와의 비교로부터 파악되는 자기 전통에 대한 객관적 인식인 듯하오. 적절한 진단이다. 나와 같은 길을 앞서 걸으신 분들은 직접 겪어 얻은 귀중한 경험을 나누어 주었다. 비교종교학. 사실인즉 나 또한 일찍이 어슴푸레 짐작했던 것인바 확인받으니 마음이 편해진다. 그렇다면 나는 전통종교의 교리학 앞에서 떳떳한 종교학자이기 위해 세상의 모든 종교들에 해박해야 할까보다. 꾸역꾸역 타종교의―그 중에서도 특히 불교와 비교하기 좋은 기독교 전통을 중심으로― 참회 개념의 연원과 역사적 변천을 살펴보았다. 약소하게나마 추가된 대답에 대해 질문자의 반응은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아마도 나는 대답의 방향성이 예정된 외부로부터의 질문에 응당한 대답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부로부터 분출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마음껏 스스로에게 묻고 답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스스로에게 마음껏 지르는 그 질문과 대답은 과연 어떻게 종교학적인 해석과 이해를 담을 수 있을까.
추가된 대답을 한 이후 나는 잠시 원효의 여몽삼매(如夢三昧)를 응시한다.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라는 비교적 덜 알려진 짧은 글에 담긴 강렬한 수사학적 상상력! 원효 그이는 어느 아름다운 날 루시드 드림을 꾸었나보다. 몸을 덮치는 꿈속의 물이 괴로워 두려움에 떨며 꿈을 깨었지만, 꿈에서 깨어난 자신이 여전히 꿈속을 거니는 줄 알지 못하고 몸을 뒤척이며 침상에 누워있다. 아니다. 꿈을 깬 꿈은 꿈임을 비로소 알아 어렴풋하게나마 꿈을 자각하며 깨어나고자 몸을 뒤척인다. 완전히 깨어난 꿈밖의 꿈밖에서 그이는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지만, 깨어나 평화로운 그 순간 그에게 보다 아름다웠던 것은 몸을 뒤척이던 투지의 시간이 아니었을지.
그의 꿈이야기를 들으며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떠올린다. 장자는 나비의 꿈에서 깨어나 자신을 잃었다. 원효는 꿈에서 깨어나 여전한 꿈을 헤맨다. 원효의 꿈은 장자의 꿈을 잇는가. 원효는 자신의 시대에 쏟아져 내리던 불교적 참회의 두 축―참회의 행위적 의례적 표현으로서의 사참(事懺)과 심리적 교리적 표현으로서의 이참(理懺)―을 가볍게 뛰어넘어 꿈의 상징으로 중생의 미망을 표현하였다. 여몽삼매는 참회의 동아시아적 전개를 어떻게 계승 발전시키는가. 혹 그의 꿈은 현대 심리학의 꿈 이론으로 재해석될 여지는 없는가. 그를 따라 꿈에서 거듭 깨어나거든 인간은 궁극의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대승육정참회》와 여몽삼매라는 텍스트를 따라 그것이 놓인 콘텍스트의 흐름을 걸으면 종내 나는 원효가 상상한 구원론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이 나의 새로운 종교학이 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결국 발단은 정체성이었다. 종교학자의 자격과 책무에 대한 오랜 질문. 그리고 텍스트를 콘텍스트 속에서 발견하고, 원전으로부터 인간학적 의미를 발굴하는(한마디로 종교학을 가공하는!) 바로 그 방법론에의 탐색. 그러니까 나는 지금 종교학적 정체성의 숲에서 여전히 길을 잃고, 꿈에서 깨어난 그 후의 꿈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이 두 번째 꿈이 언제 어떻게 깨어질지 모르겠다. 최후의 꿈에서 깨어난 나는 평화로운 기분으로 침상에 누워 한 발짝 더 떼어진 학문적 성취에 흐뭇하게 젖어 있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아직은 모르겠으니, 이번의 탐색은 또 어떻게 귀결이 날지. 평화로운 기분으로 회상되는 뒤척임의 기억은 과연 아름다울지 모르겠으나, 그 꿈에서 여전한 지금의 나는 이토록 어수선하니. 제학들이여, 이 가련한 동학의 뒤척임을 부디 외면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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