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뉴스 레터

551호-한 해의 끝과 시작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8. 12. 4. 19:26

                                      한 해의 끝과 시작

 

       news  letter No.551 2018/12/4  


  
  


     

   벌써 12월이다. 12월에는 불가피하게 한 해의 끝과 새로운 해의 시작을 생각하게 된다.

    흔히 새로운 한 해는 1월 1일에 시작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새해가 시작하는 날은 정하기 나름이어서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서양의 예를 들면, 프랑스 혁명 정부는 한 해의 첫날을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추분으로 규정한 적이 있다. 중국에서도 달력에 따라 정월이 달라졌다. 주력(周曆), 은력(殷曆), 하력(夏曆)은 각각 음력 11월(동지 정월), 12월(소한 정월), 1월(입춘 정월)을 정월로 설정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한제국 시절 건양(建陽) 연호가 선포되면서 1895년(고종 32년) 음력 11월 17일이 건양 원년(1896) 1월 1일이 된 적도 있다.

   그런데 민간의 세시 관행을 보면 어느 한 날을 기점으로 해가 바뀐다고 말하기 어렵다. 물론 음력 1월 1일이 해가 바뀌는 시점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동지 때부터 새로운 시간이 시작된다는 관념이 함께 나타난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한 사례가 햇곡맞이다.

    햇곡맞이는, 그 명칭에서 드러나듯, 가을에 수확한 곡식을 집안 내 여러 가신(家神)에게 올리는 가을 천신(薦新)의 하나이다. 가을 천신의 대표적인 예는 추석이다. 하지만 추석과 햇곡맞이는 약간 다르다. 추석은 음력 8월에 남성이 주체가 되어 조상을 대상으로 행하는 유교적 성격의 천신이다. 반면에 햇곡맞이는 추석이 지나 주로 10월 경에 여성이 주체가 되어 가신을 대상으로 행하는 민간신앙 성격의 천신이다.

    흥미로운 것은, 햇곡맞이는 동지를 넘기면 안 된다고 믿는 점이다. 동지를 넘겨 햇곡맞이를 하는 것은 해를 넘기는 것과 같다고 여긴다. 이런 이유에서 햇곡맞이는 동지를 넘기지 않는다. 이는 ‘동지 팥죽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는 말처럼 동지 팥죽을 설날 떡국과 마찬가지로 나이를 더 먹는 음식으로 여긴다든지, 음의 기운이 가득 찬 가운데 양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하는 시점이 동지라는 등 동지에 대한 다른 설명과 연결된다. 이를 통해 동지는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는 시점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런 점에서 동지를 작은 설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동지를 이렇게 이해한다면,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은 1월 1일에 앞서 동지 때부터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지부터 새로운 한 해가 이미 시작된 것으로 여기면서도 12월 그믐날에는 지난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여러 세시행위가 이뤄진다. 이날까지 빚을 다 갚고, 받을 것도 다 받는다. 이날까지 받지 못한 빚은 정월 대보름까지는 받지 않는다. 집안을 대청소하고 어른들께 묵은세배를 드리며, 연말 선물을 준비해서 주변에 전한다. 그리고 수세(守歲)라고 집안을 온통 불로 밝히고 잠을 자지 않으며 밤을 샌다.

    그럼 1월 1일과 함께 새로운 한 해가 완전히 도래한 것일까? 그렇게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새로운 해의 도래는 정월 대보름이 되어서야 완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전 해에 받지 못한 빚을 정월 대보름까지는 기다린다든지 정초 세배는 대보름까지 다닌다든지 하는 모습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설날과 정월 대보름을 비교하면, 설날은 새로운 해가 찾아왔지만 완전히 자리잡지 못해서 상대적으로 조심스러워하고 근신하는 시간의 모습을 보인다. 설날은 다른 말로 ‘신일(愼日)’이라고도 하며, 외출을 삼가고 가족 단위의 활동이 주를 이룬다. 반면 대보름에는 행동의 제약이 사라지고, 달맞이와 달집태우기, 줄다리기, 지신밟기. 동제 등 공동체 단위의 다양한 놀이와 제의가 행해지는 등 활기찬 모습을 보인다. 이런 점에서 정월 대보름은 설날과는 달리 새로운 한 해의 완전한 도래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축제적 시간의 성격을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사회에서는 설날을 기점으로 지난해가 종결되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고 여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은 동지에서 비롯되어 설을 거쳐 대보름에 와서야 비로소 완결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동안 사람들은 새로운 시간이 오기를 마냥 기다리기는 수동적인 존재에 머물지 않았다. 지난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동지, 설날, 대보름의 다양한 세시행사는 새로운 시간을 확립하고자 하는 시간 주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입춘’이 ‘入春’이 아니라 ‘立春’인 것처럼, 새로운 시간은 인간과는 무관하게 자연의 리듬에 따라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시간의 도래를 촉구하는 인간의 주체적 행위에 의해 확립되는 것이었다. 

      

 


이용범_
안동대학교 인문대 민속학과 교수
최근 논문으로 <일제의 무속 규제정책과 무속의 변화: 매일신보와 동아일보 기사를 중심으로>, <한국무속과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비교: 접신(接神)체험과 신(神)개념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