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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320호-종교, 또는 영혼의 놀이(이창익)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4. 7. 17. 16:29

              

                종교, 또는 영혼의 놀이

               

                                                      

      

2014.6.24 

 

 

 

     시간은 인간을 짓뭉개고 살해한다. 산다는 것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잔해를 쌓는 일이다. 이렇게 켜켜이 축적된 시간은 무겁게 인간의 어깨를 짓누른다. 어쩌면 종교는 다시는 살릴 수 없는 ‘죽은 시간의 무게’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희망 같은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종교사는 시간에 대항한 인간 투쟁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의 시간을 살지 않는다. 홀로 견디는 나의 시간, 가족과 공유하며 지내는 시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 길거리의 낯선 사람들과 더불어 흘러가는 시간, 영화를 보면서 보내는 시간 밖의 시간, 음악을 듣는 사건 없음의 시간, 정치적 사건의 연쇄 속에서 가늠되는 국가적 시간, 세계적인 규모로 전개되는 인류의 시간처럼 다종다양한 시간들이 새끼줄처럼 꼬이면서, 마치 하나의 시간이 존재하는 듯한 환영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시간을 잘게 분해해 보면, 그 안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연속성이나 인과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그 모든 형형색색의 시간이 시계의 초침과 분침으로 수렴되어 하나의 시간이라는 환상을 자아낼 뿐이다.

 

 

     그러나 역시 시간은 무겁고, 인간은 서서히 죽음을 향해 전진한다. 우리는 주관적인 ‘나의 시간’을 거꾸로 움직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는 이미 이전의 소년도 소녀도 아니다. 현재의 나는 내 안에 쌓인 시간의 퇴적물이 만든 작품이다. 그런데 우리는 의례, 또는 ‘기원으로의 영원회귀’를 통해 나의 존재를 갱신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의례는 ‘죽은 시간의 무게’를 삭제하는 장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회귀의 기술인 의례는 그저 인간적인 한계 안에서 고안된 종교적인 기술일 뿐이다. 왜냐하면 의례는 기껏해야 물질이 아니라 영혼만을 갱신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의례를 거친 내 몸에는 여전히 시간의 무게가 아로새겨져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종교가 필연적으로 내장하고 있는 비애를 감지할 수 있다.

 

 

     그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이분한 다음, 육체가 아니라 영혼에서 인간을 본질을 찾는 것이다. 육체의 시간을 지우는 일을 포기한 채 영혼의 시간을 지우는 일에 주력하게 되는 것이다. 즉 육체의 소생이나 회춘이라는 관념을 폐기하고, 그 대신에 영혼을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차원으로 탈출시킨다. 영혼은 죽음조차도 지울 수 없는 인간 본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영혼이라는 관념을 발명함으로써 인간은 그 이전에는 혼란스러웠던 많은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었다. 육체의 문제를 교묘히 종교의 영역 바깥으로 추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혼 개념은 윤회 관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윤회는 같은 영혼이 다른 육체로 부활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육체는 영혼이 머무르는 일시적인 거처일 뿐이다. 이러한 환생 관념은 타인이었던 내가 다시 타인이 된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전생의 나와 현재의 나를 연결시키는 것은 죽음이다. 죽음을 통해 연결되는 인간 존재의 연속성이 펼쳐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윤회 관념을 시간 속으로 무한히 소급시킬 경우에 나는 하나가 아니라 수만 명, 수억 명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윤회를 통해 나는 여자가 될 수도 있고, 남자가 될 수도 있고, 부자가 될 수도 있고, 빈민이 될 수도 있고, 귀족이나 왕이 될 수도 있고, 노예나 광대가 될 수도 있다. 심지어는 윤회를 통해 인간은 동물이 될 수도 있고 식물이 될 수도 있다. 즉 윤회는 인간이 존재의 모든 가능성을 체험하게 하는 체계인 것이다. 윤회는 무한한 시간 지평 속에서 인간이 전체 존재가 되는 것을 묘사하는 시간적인 구원론이다. 우리는 시간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즐기면 된다.

 

 

      인간은 하나의 특수한 존재 안에 갇혀 있다. 그러나 윤회를 통해 인간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윤회의 사슬 속에서 인간은 존재의 개별성 속에 매몰되지 않고 존재의 전체성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하나이면서 모두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회 관념을 통해 죽음과 시간은 구원론적 계기로 재평가된다. 더 이상 죽음이 없다. 그러므로 환생은 나와 타인의 경계선을 지우는 가장 매력적인 장치인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인간의 연결은 인위적이다. 우리는 혈연, 결혼, 지연, 우정, 사랑 등의 관념으로 인간을 연결시킨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 연결이 완벽하게 나와 타인의 경계선을 제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윤회 관념은 내가 타인일 수 있는 절대적인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러나 윤회는 어찌 보면 지루한 구원론이다. 당장의 삶이 고통스럽고 힘겨운데, 현재의 삶을 잘 견뎌 다음 생을 기다리라고 말하는 것이 그리 큰 위안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많은 종교에서는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이분하여 육체는 시간 속에서 흘러가게 하고, 영혼은 영원 속에 침잠하게 하는 방법을 택한다. 이것은 인간의 유한성을 무한성과 화해시키는 기술이다. 특히 신비주의는 신과의 합일을 강조하거나 인간이 절대타자와 하나가 되는 상태를 지향한다. 이러한 사유 또한 영혼을 시간 밖으로 탈출시키는 방법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렇듯 항상 인간의 손에 쥐어지는 것은 항상 ‘죽은 시간의 무게’가 지워진 영혼이다. 그래서 종교는 육체를 영혼으로 치환시킬 때 탄생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역으로 우리는 인간의 몸에서 강제로 추출된 영혼을 특정 사물에 집어넣기도 한다. 묘지든, 사진이든, 신주든, 강물이든, 건물이든, 자식이든… 사실 어떤 사물이라도 상관 없다. 그리고 이 죽은 영혼은 다른 사물의 생명으로 지속한다. 종교는 ‘영혼의 놀이’인지도 모른다. 내 영혼을 잘 다듬어 어떤 사물로 치환할 것인지의 문제… 엘리아데의 저서 잘목시스에 실린 “거장 마놀레와 아르제쉬 수도원”에 관한 전설 하나를 소개하면서 이 짧은 글을 마칠까 한다.

 

 

 

  <거장 마놀레와 아르제쉬 수도원>

 

    “거장 마놀레(Master Manole)를 포함한 총 10명의 거장, 도제, 석공이 검은 군주로부터 역사에 남을 만한 수도원을 아르제쉬에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군주는 수도원을 완성할 경우 황금과 귀족의 지위를 주겠지만, 실패할 경우 산 채로 벽 안에 가두어 버릴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수도원을 짓기 위해 아무리 벽을 쌓아올려도 낮에 쌓은 벽이 밤새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화가 난 군주는 그들을 건물의 주춧돌 밑에 묻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거장, 도제, 석공들은 새벽에 일어나 어두워질 때까지 여름의 긴 태양 아래에서 두려움에 몸을 떨며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런데 거장 마놀레는 갑자기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가 잠이 들었고, 꿈속에서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이상한 말을 들었다. 그 말은 다음날 새벽에 남편이나 형제에게 제일 먼저 음식을 가져오는 아내나 누이를 건물 벽에 매장할 때까지 벽이 계속해서 무너질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마놀레는 다른 사람들에게 수도원을 완공하기 위해서는 비밀을 엄수해야 하며, 내일 새벽 맨 먼저 오는 아내나 누이를 희생시켜 벽에 매장하자고 말한다.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서 마놀레는 높은 곳에 올라가 누가 맨 처음 오는지를 지켜보다가, 그의 아내 아나(Ana)가 그에게 줄 음식과 포도주를 들고 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무릎을 꿇고 울며 기도했다. “신이시여, 제발 폭우를 내려 개울의 물이 불어나게 하셔서 아내가 이곳에 오지 않고 돌아가게 해주세요!” 이를 딱하게 여긴 신이 구름을 모아 비를 내렸지만, 아내는 비에 굴하지 않고 점점 다가왔다. 다시 마놀레는 십자가를 가슴에 그으며 기도했다. “제발 소나무를 뽑고 단풍나무를 부러뜨려 산을 뒤집어엎을 만큼 강한 바람이 불게 하셔서, 아내가 되돌아가게 해주세요!” 그러나 아내는 돌아가지 않았고, 이제 그의 눈 앞에 서 있었다.

   아나를 보고 다른 사람들은 기뻐했지만, 마놀레는 슬퍼하며 아내를 안고 비계를 걸어올라가 벽 위에 그녀를 놓았다. 그는 농담처럼 말했다. “내 사랑,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마오. 우리가 벽 안에 당신을 가두겠지만, 이건 모두 장난일 뿐이라오.” 아나는 그를 믿고 웃음지으며 얼굴을 붉혔다. 벽이 점점 높아지면서 아나의 발목과 종아리가 벽에 묻혔다. 불쌍한 아나는 웃음을 멈추며 말했다. “마놀레, 마놀레, 이제 장난을 멈추세요. 이런 장난은 좋지 않아요, 마놀레, 마놀레, 거장 마놀레! 벽이 나를 너무 짓눌러서 내 작은 몸을 으스러뜨릴 거예요!” 그러나 마놀레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을 벽을 쌓았다. 벽이 점점 높아져서 늑골을 거쳐 가슴까지 차올랐다. 가련한 아나가 울면서 그에게 말했다. “마놀레, 마놀레, 거장 마놀레, 벽이 나를 너무 짓눌러서 내 가슴을 으스러뜨리고 내 아기를 짓뭉갤 거예요.” 분노에 휩싸인 채 마놀레는 계속해서 벽을 쌓았다. 벽이 입술을 거쳐 눈까지 차올랐다. 이제 아나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나의 목소리가 벽 안에서 계속 새어나왔다. “마놀레, 마놀레, 벽이 나를 너무 짓눌러서 내 생명이 사라지고 있어요!”

   지상에 견줄 만한 건물이 없을 만큼 높은 수도원이 완공되자 검은 군주가 기도를 하기 위해 수도원에 왔다. 그는 훨씬 더 아름답고 찬란한 수도원을 하나 더 지어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지붕 위의 목조로 된 부분에 걸터앉아 있던 10명의 거장, 도제, 석공은 “우리만큼 훌륭한 거장은 없으며, 군주께서 원하신다면 더 아름답고 찬란한 수도원을 지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한참 생각에 잠긴 군주는 비계를 부수고 사다리를 제거하여, 그들이 지붕 위에서 죽어 사라지도록 하였다. 그들이 영원히 더 높은 수도원을 지을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생각 끝에 거장들은 지붕의 널빤지로 날개를 만들어서 공중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추락하여 땅에 떨어졌고, 그들의 몸은 산산이 부서졌다. 거장 마놀레는 뛰어내리면서, 질식한 채 흐느껴 우는 아나의 목소리가 벽에서 새어나오는 것을 들었다. “마놀레, 마놀레, 거장 마놀레, 벽이 나를 너무 짓눌러서 흐느끼는 내 가슴을 으스러뜨리고 내 아기를 짓뭉개고 있어요. 내 생명이 사라지고 있어요.” 당황스러우리만치 가까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세상이 빙빙 돌았다. 마놀레도 떨어져 죽었고, 그의 몸이 산산조각 난 자리에는 마놀레의 눈물 때문에 짠맛이 나는 맑은 샘물이 솟아났다.”

 

 

 


 이창익_
한림대학교 생사학연구소 HK연구교수
changyick@gmail.com
주요 논문으로 〈신 관념의 인지적 구조: 마음 읽기의 한계선〉, 〈종교 사용 설명서: 종 교 교육에 대한 시론적 접근〉, 〈사랑이 조각하는 죽음의 공간〉 등이 있고, 저서로는 《조선시대 달력의 변천과 세시의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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