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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민, 추모(追慕)와 위령(慰靈)의 문화를 다시 생각한다

 

 

[경인일보] 2013년 06월 17일 월요일 제12면

 

 

국가위해 목숨바친 영혼들을 추모 하는건 국민의 도리이고 국가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

위령 하는건 국가의 의무이다. 추모 문화보다 평화의 문화를, 위령 문화보다 사랑과 자비를

 

오뉴월은 전 국민적으로 죽은 자를 기억하는 시기이다. 살아있는 우리가 그 삶과 모습을 생생히 기억할 수 있는 우리의 가족과 이웃과 국민이 유난히 많이 저 세상으로 간 때가 그 즈음이다. 무엇보다 5·18과 6·25는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생생한 기억으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뇌리에 새겨져 있다. 그래서 숫자로만 읽히지 않는다. 그 숫자 속에는 우리 국민들의 삶과 기억 속에 뼈저린 아픔과 지워지지 않는 상흔으로 남아 있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 서려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죽임을 그 숫자는 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올해도 그 숫자를 생생한 역사로 만든 무덤에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그 앞에 꽃을 놓거나 심기도 했고, 술과 음식을 진설하기도 했으며, 절을 하며 울기도 했을 것이다. 안타깝고 서러운 심정에 선뜻 돌아서지 못한 채 한동안 그곳에 머물렀던 부모와 형제자매, 일가친척들, 그들이 모두 우리의 국민이다.

 

국가적으로도 그 무덤의 주인들을 추모하고 위령하고 있다. 그런데 그 주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죽은 '국가유공자'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민주화 유공자' 등 희생자들이다. 전자는 '국립 OO현충원' 혹은 '국립 OO호국원'에 안장되어 있고, 당사자나 가족이 관련 법률에 따라 예우와 지원을 받는다. 후자는 '국립 OO민주묘지'에 안장되어 있고, 당사자와 가족이 예우와 명예회복, 보상을 받는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국가와 국민이 예우하고 그 가족을 지원하는 일은 마땅하다. 국민 모두가 그 은혜와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희생정신을 높이 현양하고 애국정신을 함양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국가의 모든 의식에서 '애국영령'에 대한 묵념을 행하고, 도처에 추모시설을 설치하는 것도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그래도 그분들의 죽음은 슬프고 괴로운 일이다. 국가를 위해 불가피하게 희생의 길을 가야 했지만, 그래서 그 죽음이 고결하지만, 그 누구도 그러한 죽음마저 없길 바랄 것이다. 가족과 친구도 그 죽음을 슬프고 애달프게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가 국민의 희생을 필요로 하기보다는 국민을 행복하고 평안하게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희생한 분들을 추모하고 애국심을 함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희생이 필요 없는 국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훌륭하고 용감한 군인이 많다는 것을 자랑하기보다는 그러한 군인마저 필요가 없는 평화로운 국가가 더 좋은 국가가 아닌가.

 

국가에 의해 억울하게 죽거나 희생당한 사람들에게는 응당 국가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분들에게 명예회복은 물론 그 가족에게 피해를 보상하고 최대한의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더군다나 민주화를 위해, 독재에 저항하다가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민주 유공자에게는 더욱 그러해야 할 것이다. 국가가 위령탑을 세우고 위령시설을 건축하며 위령 사업을 지원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시는 국가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어떤 국민도 억울하게 죽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국가가 가장 중시해야 할 일이지 않는가. 국민이 억울하게 죽지 않는 국가가 더 좋은 국가가 아닌가.

 

물론 국가를 위해 죽거나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국민이 전혀 없는 국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죽음과 죽임을 최소화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추모와 위령의 문화가 횡행하는 국가와 사회에서 국민들은 마냥 편안할 수 없다. 검은 옷 입은 정치인들이 국립묘지에서 추모의 예를 갖추는 모습을 보고 행복감을 느낄 국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위령제를 지내는 종교인들의 기원과 발원도 일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더 이상 국민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도록, 그래서 더 이상 추모할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정치인이 참된 정치인일 것이다. 더 이상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없는, 그래서 더 이상 위령을 필요로 하는 억울한 영혼이 없는 세상을 위해 사랑과 자비를 일상으로 하는 종교인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류성민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출처링크: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744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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