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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민, 기억과 망각의 쌍곡선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4. 8. 20. 11:41

류성민, 기억과 망각의 쌍곡선

 

[경인일보]2013년 01월 21일 월요일 제12면

 

 

 

잊고 싶은 것은 계속 기억되고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누군가에게서 심한 모욕을 당한 일이나 기억하기조차 싫은 불행한 사건들은 시시때때로 생각이 나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린 시절 학대받은 일이나 성적 폭력을 당한 사건은 평생동안 상흔으로 남아 어른이 되어서도 심신을 괴롭히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잊어야할 것과 기억해야 할 것 스스로 정리하는 시점이 '새해'
마치 쭉정이와 검불은 날리고 알곡만 모으는 키질처럼…
새로운 한해를 보내기위한 지혜이자 문화로 형성된 것


반면, 밤새워 공부했던 것도 시험지를 받는 순간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 시험을 망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결혼기념일을 잊어버리고 그냥 지나쳤다가 부부싸움을 하기도 하고, 아주 중요한 약속도 까맣게 잊어버려 낭패를 보기도 한다. 잊을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기억해야 할 것만 영원히 기억하면 얼마나 좋을까!

새해는 지난 한해의 삶에서 잊어야 할 것을 잊어버리는 좋은 기회이다. 새해의 풍습이 바로 그 방편이 된다. 나라마다 문화에 따라 그 주기와 기간은 다소 다르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면 새해가 다시 시작한다고 여기고 갖가지 새해맞이 행사를 한다. 새로 옷을 지어 입기도 하고 새로 만든 특별한 음식을 먹기도 한다.

고향을 찾아온 사람들이 노래와 춤, 산해진미와 온갖 술로 축제를 열기도 한다. 남녀노소와 귀천빈부도 구별하지 않고 모두 즐겁게 놀면서 먹고 마시면서 즐긴다. 일상의 생활을 떠나, 공부와 일에서 해방되어 마음껏 놀다보면 지난날들의 아픔과 슬픔을 잊게 되는 것이다. 더 이상 과거를 묻지 않을 수 있도록 잊을 것을 잊어버리는 시간이 새해이며, 그래야 새해다운 새해가 된다.

새해에는, 그러나 그냥 먹고 놀지만은 않는다. 조상들에게 제사도 올리고 새로운 다짐을 하기도 한다. 좀 더 나은 삶을 살고픈 소원을 빈다. 지난날의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새해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다시 환기하는 절기이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을 마음 속 깊이 되새기는 때이다. 조상들이 가르쳐준 유훈을 회상하고, 신이 지키라고 한 계명을 외우며, 역사의 교훈을 상기하는 시기가 새해이다. 새로운 삶, 변화된 생활을 위해 해야 할 것, 기억해야 할 것을 명심(銘心)해야 하는 때가 새해인 것이다.

그래서 새해는 잊어야 할 것을 잊고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는 시점이다. 망각과 기억은 마치 쌍곡선을 이루는 두 정점(定點)에 비유할 수 있다. 정반대의 방향으로 그어지는 쌍곡선은 항상 두 정점에서는 일정한 거리에 있다. 그래서 한 정점에서 멀어지면 다른 정점에서는 가까워진다. 잊어버리려면 더 잘 기억되고 기억하려면 더 쉽게 잊어버리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

기억하고 있는 것과 잊어버린 것의 총합은 일정한 것이다. 잊어야 할 것을 잊지 못하면 그만큼 꼭 기억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지 못하면 아무런 쓸모도 없고 오히려 우리를 슬프게 하고 괴롭히는 것이 기억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하고 잊을 것은 반드시 잊어버리는 것이 삶의 지혜이고, 그러한 지혜가 새해의 문화로 형성된 것이리라.

새해는 잊을 것은 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다시 새롭게 기억하는 시간이다. 마치 키질하여 쭉정이와 검불은 모두 날려버리고 알곡만 모으듯이, 적어도 지난 한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치고 아프게 했던 기억들을 잊어버리고, 올 한해 우리의 꿈과 소망을 이루어 주는 알곡 같은 교훈을 되새기고 기억하는 변곡점(變曲點)이 새해인 것이다.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 해가 뜨고 지난해와 거의 같은 일상으로 오늘을 산다 하더라도, 잊을 것은 잊고 기억할 것을 기억한다면 전혀 다른 새로운 해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며, 새로운 각오와 기분으로 일과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새해이고 새해의 문화이다. 이번 설에는 이러한 우리의 새해 문화를 향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  

 

출처링크: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705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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