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핵 문화, 구원 지우기 또는 신 지우기

 


 



2015.10.6

 

 

이제는 3·11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2011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 이후에 국내에서도 몇 년 동안 꾸준히 핵 위기가 고조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일본 여행의 자제, 일본 원전의 방사선 누출에 따른 해양 수산물 소비의 급감 등이 원전 사고에 대처하는 한국인의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고, 3·11 이전과 이후를 나눌 만큼 심각하게 학문 세계의 담론 자체가 지각 변동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이 외부에서 날아온 것이었다면, 후쿠시마의 원전 사고는 내부에서 터진 원자폭탄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사건은 현대인에게는 죽음의 미래를 통해서만 생명의 현재가 가능하다는 역설을 보여주었다. 죽음의 기호를 내장하지 않은 어떤 것도 살 수 없는 세계가 바로 우리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영광, 고리, 월성, 울진 등에서 현재 총 24개의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되고 있고, 아직도 4개의 원전이 건설 중이다. 그리고 잊을 만하면 언론에 등장하는 원전 가동 중단의 기사는 일본의 일이 비단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2015년 6월 20일에 열린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상반기 정기 심포지엄의 주제가 ‘핵 시대의 종교문화 읽기’였던 것도 이러한 위기 의식의 소산이었다. 어떤 논의가 이루어질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핵 위기는 문화에, 나아가 종교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종교는 핵 위기에 어떻게 반응하거나 대응했는가? 핵 문화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핵 문화 자체가 낳는 종교적 경험을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

 

 

 

그런데 공교롭게도 당시 심포지엄 발표 가운데 상당 부분은 주로 핵 자체의 종교성이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핵 경험을 고백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핵 경험의 종교적 측면을 조명하는 것이 논의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전히 심포지엄의 글에는 핵의 공포나 핵의 매혹에 대한 저항감이 스며들어 있다. 이것은 핵 없이는 살 수 없는 현대인의 근원적인 존재론적 구조를 되묻게 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우리는 핵 시대의 종교문화를 읽고자 했던 심포지엄 자체를 다시 읽어야 한다. 적어도 이번 심포지엄이 ‘종교와 핵 문화’를 묻는 촉매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러한 핵 문화의 위기 담론을 다시 읽어야 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집자로서 독자들에게 적어도 한 가지 이야기를 던지고 싶다. 역사 속에서 숱한 종교가 자신의 신화적·예언적 담론을 통해 세계의 종언을 이야기했다. 예컨대 인간은 땅에서 나서 땅으로 돌아가지만, 인류는 물에서 나서 물로 돌아간다는 대홍수 신화가 그러하다. 세계의 종언은 보통 더 이상 이 세상을 수선할 수 없을 때, 즉 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더 이상 부분적으로 정화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 벌어진다. 즉 세계의 종언에 대한 기대는 절대적 절망감의 표출 속에서 이루어진다. 종교는 흔히 악을 정화하고 제거하고 삭제하는 역할을 한다고 여겨진다. 종교는 그래서 닦음과 지움의 기술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닦고 지우면 언제든지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득한 절망의 깊이로 추락하여 더 이상 지움과 닦음의 종교성을 수긍할 수 없을 때, 인간은 세상 자체의 소거를 갈망하게 된다. 지우고자 하는 대상 자체의 사라짐, 그래서 더 이상 지울 것도 없고 닦을 것도 없는 상태를 갈망하는 것이다. 종교는 지움과 닦음을 주장하지만, 동시에 지움과 닦음의 존재 자체가 없는 상태를 지향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의 종언은 인간이 아닌 신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려진다. 신은 인간을 지우고 세계를 지운다. 그렇게 해서 인간과 세계의 리셋과 리부팅이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세계의 종언은 형벌이면서도 마지막 남은 유일한 구원이기도 하다. 더 이상 구원할 수 없는 세계를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구원 대상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원 대상의 부재를 통해 구원 자체를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구원할 대상이 없으면, 구원할 필요도 없어진다.

 

 

 

이처럼 핵은 신의 자리를 위협한다. 원자력발전소는 핵의 종교를 지탱하는 성전이며, 원자폭탄이나 원전 사고는 핵의 신이 내리는 징벌이 된다. 이제는 인간의 물질적 존재론의 한가운데에 신의 발전소가 있고, 이 발전소에서 나오는 전기의 힘으로 모든 존재가 생존하고 사유한다. 오늘날 인간은 전기의 힘이 없다면 생각조차도 하지 못한다. 지금 이 글조차도 전기의 힘의 소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서 도대체 종교가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1978년에 11월 18일에 914명의 집단자살과 살인으로 사라진 인민사원의 경우, 세상에서 자본주의를 제거할 유일한 방법은 핵 무기뿐이라고 생각했다. 짐 존스에게 핵 재앙은 세상에서 자본주의를 삭제하여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데 꼭 필요한 요소였다. 그들에게 자본주의를 구원하는 방법은 오로지 자본주의 자체의 소거뿐이었다. 인민사원의 입장에서 핵 종말은 자본주의자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사회주의자에게는 구원의 선물이었다. 그토록 많은 힘과 역할을 작은 신들에게 이양했던 큰 신, 즉 데우스 오티오수스는 이제 세상을 지우는 자신의 마지막 힘마저 인간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제 종교는 어디에서 신의 힘을 찾아야 하는가? 핵은 신과 구원을 어떻게 지웠는가?


 

 

‘핵 시대의 종교문화 읽기’라는 주제로 묶은 이번 특집논문이 우리가 궁금해 하는 이러한 내용에 어느 정도 답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유기쁨은 〈핵에너지의 공포와 매혹〉이라는 글을 통해 핵 에너지 이용의 빛과 그늘을 동시에 성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핵에너지의 영향력을 신체적으로 경험한 피폭자들에 주목한다. 정용택은 〈발전(發電)의 믿음, 발전(發展)의 욕망〉이라는 글을 통해 원자력이라는 대중의 물신과 대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태연은 〈핵개발 담론의 종교성에 대한 페미니즘적 성찰〉이라는 글을 통해 핵 에너지 개발 담론에 내재된 가부장적 언어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박상준은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믿음은 어떻게 생겨났는가?〉라는 글을 통해 핵 담론과 평화 담론의 유착 속에서 만들어지는 신화적 허상을 고발하고 있다.

 

 

 

이번 호에 실린 연구논문은 총 2편이다. 이진구의 〈최근 한국 불교와 보수 개신교의 갈등〉은 성시화 운동, 공직자 종교 차별 문제, 템플 스테이, 땅 밟기, 종교평화법 등을 둘러싼 종교 간 갈등의 문제를 살피고 있다. 장석만의 〈식민지 조선에서 “문명-문화-종교”의 개념적 네트워크 형성〉은 식민지 시기의 문명·문화 개념과의 관계 속에서 종교 개념의 자리를 추적하고 있다.

 

 

 

이번 호에는 정진홍의 〈어떤 기억의 소묘〉라는 글을 특별기고 형식으로 실었다. 지난 7월 1일 종로의 한 식당에서 있었던 연구소 모임 자리에서 정진홍 교수가 어린 시절의 기억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를 글로 담아 보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이 독자에게는 자신의 기억과 다시 마주해야 할 기회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또한 이번 호에서는 한동안 싣지 않았던 종교연구동향 란을 재가동시켰다. 최근에 여성학 연구자로 새출발한 김진경은 〈종교문화 속에 내재된 젠더 드러내기〉라는 글을 통해 종교와 젠더의 관계, 특히 한국종교 담론 안에서 여전히 주변적인 이야기로 맴돌고 있는 젠더 담론에 대한 자신의 문제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추후의 이야기가 더욱 기대된다.

 

 

 

이번 호의 설림에는 황선명의 〈황제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실었다. 이 글의 시작에서 저자는 로마제국의 기독교 수용이 민주주의의 출발점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글에서 독자는 종교와 민주주의가 아니라 종교가 만들어낸 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번 호의 주제서평에서 김호덕은 〈서양철학, 맹자에게 길을 묻다〉라는 제목으로 프랑수아 줄리앙의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 도덕의 기초를 세우다》를 논한다. 중국학을 방법론으로 하여 서양 사유를 새롭게 재성찰하면서 줄리앙이 어떻게 자신의 제3의 길을 찾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게 될 것이다.

---------------------------------
*이 글은 <종교문화비평>28호(2015년 9월30일 발간) 권두언에 실린 글 입니다.

 

 

 


이창익_
종교문화비평 편집위원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