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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과 민주주의 : 히메시마(姫島)의 히메코소신사
일본의 대표적인 보수일간지 요미우리신문은 3월 12일자 사설에서 박대통령 탄핵인용을 다루면서 그것이 국민에 영합한 정치적 결정이었다고 평했다. 물론 이는 향후 한미일 안보문제라든가 위안부 합의 등과 같은 현안의 내일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초조감에서 비롯된 반응일 것이다. 하지만 일본문화학도로서 느껴지는 촉은 그런 상투적인 해석에만 머무를 수 없게 한다. 지진의 나라 일본에서 진동하는 것은 비단 대지만이 아니다.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곳곳에서 파상적인 균열로 흔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와 천황제가 언제까지 불편한 동거를 계속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천황제의 이면에는 신도(神道)와 신사(神社)가 존재한다.
아사히신문처럼 평화적인 촛불혁명과 헌재의 결정에서 역동적인 민주주의를 읽어내는 관심도 있지만, 부동(不動)의 권위와 고정된 질서에 대해 강박적이라 할 만큼 집요한 편향성을 보여 온 일본종교계와 지식인들에게 민주주의는 결코 최선의 대안일 수 없는 듯싶다. 그런 만큼 한국에서의 민주주의 실험에 대한 일본인들의 불안 섞인 시선은 남다른 바가 있어 보인다. 흔들리는 일본열도에서 천황제든 신도적 가미(神)신앙이든 흔들리지 않는 부동의 무언가를 추구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섬나라 속의 섬’으로만 고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올 2월말 아내와 함께 섬나라 속의 한 섬을 다녀왔다. 규슈 오이타현 구니사키(國東) 지역 앞바다에 위치한 인구 2천7백여 명의 작은 섬 히메시마(姫島)에 있는 히메코소신사(比賣語曾社) 답사가 주목적이었다. 이 신사에 모셔져 있는 제신은 히메코소인데, 이때 ‘히메’란 여신을 가리키는 호칭이다. 한편 일본 전국에 편재하는 무수한 한국 관련 신사들을 면밀히 조사하여 대작 《일본 속의 조선문화》 시리즈를 펴낸 일본의 재야학자 김달수(金達壽)에 의하면, ‘코소’의 어원은 박혁거세에서의 존칭 ‘거세’(居世)로 고대 신사의 원형에 다름 아니라고 한다. 이는 히메코소신사와 한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연상케 한다.
실제로 섬 안내 팜플렛은 당사에 대해 “《일본서기》에 보면 스이닌(垂仁)천황 때 대가락국(한국 남부) 왕자(쓰누가아라시토_필자)가 흰 돌에서 태어난 여자와 결혼하고자 했지만, 이를 거부한 여자가 이곳으로 피신하여 히메코소신사의 신이 되었다고 합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섬 이름 자체가 이 여신의 이름을 차용하고 있는 데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당 신사는 섬 주민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신성공간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여신 하면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의 아내 세오녀가 떠올려진다. 어쩌면 히메코소는 일본판 세오녀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일본에서의 세오녀 관련지명에 관한 언급이 부재하는 《삼국유사》와는 달리,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비롯한 몇몇 문헌자료에서는 히메코소 전승지명이 적시되어 나온다. 그 대표적인 곳이 ‘나니와’ 즉 현재의 오사카 지역이다. 7,8년 전 오사카 지역의 한국관련 사사(社寺)를 조사할 때 히가시나리구의 히메코소(比賣許曾)신사를 방문하면서 언젠가 히메시마의 히메코소신사에 가보아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여간 이밖에도 오사카 지역에는 니시요도가와구의 히메시마신사, 히가시스미요시구의 아카루히메신사 및 다테하라신사, 미나미구의 다카쓰신사 등 히메코소를 제신으로 모신 신사들이 산재한다. 나아가 히로시마현 구레(呉)시의 가메야마(亀山)신사에서도 히메코소 여신을 모시고 있다. 혹자는 고대일본 최대의 도래씨족인 가야=신라계의 하타씨(秦氏)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규슈 후쿠오카현 소재 가와라(香春)신사의 제신도 본래는 히메코소였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국과 깊은 인연을 가진 신사는 일본 전국에 걸쳐 무수하게 많지만, 히메코소신사처럼 제신이 여신인 경우는 드문 사례에 속한다. 어쨌거나 흔히 가장 일본적인 전통문화 중 하나로 말해져온 신사의 한 기원이 의외로 한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내셔널리즘과 인터내셔널리즘의 문제를 상기시켜준다. 신사는 한국관련 신사들의 존재가 잘 말해주듯이 원래 인터내셔널리즘적인 기원을 함축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8,9세기 이후부터는 역사적으로 일본 내셔널리즘의 중핵을 이루는 문화요소로 기능해 왔기 때문이다. 고대일본 신사와 한국의 밀접한 관계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주는 현실적인 의미는 고대 일본문명이 한국의 압도적인 영향하에 형성되었다는 주장보다는 오히려 고대 한일관계의 성격이 기본적으로 인터내셔널한 것이었다고 읽어낼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일 양국은 한자문화와 유교 및 대승불교 전통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이념적 체제를 공통분모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심각한 소통부재의 진통을 겪고 있다. 출발시기도 같고 발원지(미국)도 동일한 양국의 민주주의는 일본측의 급속한 우경화 경향에 더하여 한국측의 탄핵인용을 계기로 더욱 간극이 벌어질 지도 모르겠다. 이 점과 관련하여 글로벌리즘을 가장한 내셔널리즘이 아닌 인터내셔널리즘에 대한 확장된 인식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셔널리즘이 섬이라면 인터내셔널리즘은 섬과 섬을 이어주는 물 그 자체가 아닐까? 그리고 민주주의란 물을 통해 상호 소통하는 무수한 섬들의 바다 같은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근래 일본 최대의 전통 축제일인 오봉(추석) 때 아이들이 추는 이색적인 여우춤으로 많은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섬나라 속의 섬 히메시마에서 히메코소와 조우하면서 문득 떠오른 상념이었다
한양대학교 교수
논문으로 〈현대일본종교와‘마음’(心)의 문제-‘고코로나오시’와 심리통어기법에서 마인드컨트롤까지-〉,〈고대 오사카의 백제계 신사와 사원연구〉등이 있고, 저역서로 《일본문화사》,《신도,일본 태생의 종교시스템》,《일본정신의 풍경》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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