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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은 ‘기억’, 떠오른 ‘진실’
- 세월호의 기억, 그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성찰
news letter No.464 2017/4/4
기억은 현재를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과거를 기억하고 그것을 현재에 기록한다. 기억하면서, 우리는 무엇이 이야기되고, 왜 기록되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기억이 기록되는 이유와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세월호에 대한 기억은 어떠했는가? 우리에게 이야기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 때문에 세월호 희생자들이 죽어야 했는지, 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해야하는지, 이런 이유를 밝히고 설명해야 할 정부는 오히려 기억을 지우고 덮으려고만 했다. 그래서 세월호 참사를 목도한 시민들은 세월호의 죽음을 기록하고 지속해서 기억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정체된 기억으로 남았다. 진상이 규명되지 않고 책임자도 처벌되지 않는 현실은 세월호의 기억을 2014년 4월 16일에 고정하고, 지속적인 고통으로 자리 잡게 했다. 그리고 그렇게 1000일이 지났다.
2017년 1월 7일 광화문 10차 촛불집회는 세월호 추모집회로 이어졌다. 1월 9일이 세월호 참사 1,000일째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광화문 중앙 무대에는 세월호 참사에서 살아 돌아온 학생들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들은 “단원고 2학년 0반 000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그들의 기억은 아직 2014년 4월 16일에 머물러있었다. 그들은 말했다. “우리는 구조된 게 아니라, 탈출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생존은 죽어간 친구들의 시신 앞에서 죄책감으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 참사 이후 그들은 세월호 생존자임을 말하지 않았고, 침묵해왔다. 아마도 생존자들이 세월호 참사가 왜곡되는 현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 시민들이 반복했던 “미안합니다. 그리고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고백과 다짐에서도 무력감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세월호 침몰과정은 공교롭게도 뒤바뀐 장례과정과도 유사했다. 세월호는 거대한 ‘철관’(鐵棺)이 되어 정확히 사고 3일째인 4월 18일 오전에 완전히 물에 잠겼다. 우리는 그 과정을 텔레비전을 통해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수장된 시신은 이후 민간 잠수사의 노고로 가족의 품에 안길 수 있었고, 가족들은 시신 수습에 들어갔다. 이는 입관 전의 과정을 다시 재현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정부는 지난 3월 25일 깊은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던 세월호를 인양했다. 만 3년 만에 이루어진 세월호의 인양은 세월호 유가족과 미수습자 가족들에게는 마치 삼년상을 치른 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떠오른 세월호를 대하는 몇몇 언론의 태도는 너무나도 계산적이었다. 세월호가 처음 인양되기 시작한 23일 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하루 종일 ‘세월호 인양비용’이라는 검색어가 떠돌았다. 이는 세월호 참사 직후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지급될 보상금 계산에만 몰두하던 정부와 죽음을 사회적 비용의 ‘손실’로 명명하던 몇몇 언론의 태도와 닮아있다. 또한 이런 현상은 애도와 추모보다는 정치적 이익을 계산하는 셈법과 맞닿아있었다. 어느새 세월호 죽음은 정밀히 계산된 비용과 교환되고 있었던 것이다.
동거차도에서 인양된 세월호가 목포신항에 도착했다. 이제 정부는 처참하게 삭아버린 세월호를 통해 사고의 원인과 진실을 규명하고자 할 것이다. 우리의 의혹이 이러한 노력으로 완전히 해소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인양된 세월호를 통해 진실이 인양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런 진상 규명을 통해, 책임 당사자의 가차 없는 처벌도 함께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런 과정을 통해 세월호의 죽음이 우리에게 충분히 설명되고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런 설명과 이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사회의 죽음에 대한 의미도 다시 성찰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부디 인양된 세월호 선체에 아직 남아있을 미수습자 9명 모두가 가족의 품으로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란다.
도태수_
한국학중앙연구원
논문으로 <한국 초기 개신교 문서에 나타난 문자성>이 있고, <비평으로서 신화 연구하기>라는 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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