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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통이 힘으로 되살아났던 고종 국장(國葬)

 

 

  news  letter No.559 2019/1/29      

 

 

 

 


  
       
      올해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여러 행사가 열렸고 또 준비 중이다. 3·1운동과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것이 많지만 그 중 하나가 고종의 장례식이다. 고종은 1919년 1월 22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하였다. 1863년에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로 왕위에 즉위한 고종은 조대비[신정왕후, 1808-1890]의 수렴청정, 대원군의 섭정을 거쳐 1873년(고종 10)부터 직접 정치에 나섰다. 갑오개혁과 을미사변을 겪은 후 고종은 1897년에 대한제국을 건립하여 새로운 제국을 꿈꾸었지만 결국 순종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것을 바라보다가 1919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패망한 군주의 장례식은 어떠했을까?

      조선시대 국왕의 상례는 왕이 숨을 거둘 때부터 발인(發靷), 우제(虞祭) 등을 거쳐 상복(喪服)을 완전히 벗는 담제(禫祭) 때까지의 연속된 과정 모두를 포괄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상례에서 국장은 상례의 전체 과정이 아니라 임시 기구인 장의괘(葬儀掛)에서 주관하는 공식적인 의식만을 가리켰다. 당시 일본은 고종의 장례식을 통상의 국장식에 조선의 옛 관습을 더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여기서 국장식은 일본식(日本式)을 의미하였다. 당시 일본의 황실 및 황족의 국장은 불교식에서 벗어나 신도식(神道式)으로 새로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고종의 국장은 1913년에 사망한 다케히토 친왕의 장례식을 준용하여 준비하였다. 장의괘 주관으로 거행되었던 고종 국장의 중요 의식은 ‘국장봉고의(国葬奉告儀)’, ‘사뢰의(賜誄儀)’, ‘매장하기 전(前) 영구(靈柩) 앞에서 거행하는 제의’, ‘영거(靈輿)의 발인의(発引儀)’, ‘장장제의(葬場祭儀)’, ‘매장 후 권사(権舎; 임시 건물)에서 거행하는 제의(祭儀)’, ‘매장 후 묘소(墓所)에서 거행하는 제의’ 등 7가지였다.

     이러한 장례 절차에서 고종은 독립된 나라의 왕이 아니라 일본의 황족(皇族)으로 존재하였다. 천황은 그를 위해 뇌사(誄辭)를 내리며 애도하였다. 고종의 빈전에 시데(しで, 四手, 紙垂), 사카끼(榊, さかき) 등과 같이 일본 장례식에 보이는 의물(儀物)이 등장하였으며 신도(神道) 복장을 한 제관(祭官)이 의식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망자를 위한 음식과 음악도 일본식이었다. 물론 조선의 전통 의식은 빠지지 않고 거행되었지만 공적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고종의 발인 의식이었다. 조선시대 국장의 발인 행렬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퍼레이드이다. 혼백(魂帛)을 안치한 신연(神輦)의 가마가 왕의 의장과 살았을 때 받은 교명(敎命)과 책보(冊寶)를 앞세우고 지나가면 그 뒤에 방상씨(方相氏)와 산마(散馬) 등이 인도하는 대여(大輿)가 나아갔다. 대여에 시신을 안치한 관(棺)이 있었다. 신여[혼백]와 대여[시신]는 영혼과 몸으로 일체를 이루면서 능소로 나아가는 것이 관례였다.

    1919년 3월 3일 덕수궁의 대한문에서 출발한 대여는 황금정(黃金町, 을지로)을 경유하여 옛 훈련원 자리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공식적인 장례식이 일본식으로 거행되었다. 그러나 여기엔 대여만이 있고 혼백을 모신 신연은 없었다. 신연은 대한문에서 태평통을 지나 광화문 전로(前路)에서 종로 쪽으로 돌아 흥인문(興仁門) 밖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대여를 기다렸다. 전통과 근대의 관점에서 볼 때 훈련원 장례식은 근대 의식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장례식장으로 가는 발인 행렬에서 책보(冊寶) 대신 훈장(勳章)이 등장한 것이나 장례식장에서 철도레일로 대여를 옮기는 것 역시 근대적 모습이다. 이러한 형식을 통해 조선식은 구 관습적인 것인 반면 일본식은 근대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졌다. 그곳에서 장례식을 마친 후 대여는 흥인문 밖 신여와 만나 금곡리 홍릉으로 나아갔다.

     흥인문에서 홍릉까지 행렬은 전통의 양식을 따랐다. 그리고 홍릉은 황제의 제도를 모방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권력이 없는 ‘의식’으로만 존재하는 황제의 제도였다. 조선시대 예(禮)가 권력과 사회의 반영이고 표상이었다면 이제 예는 ‘전통’의 회상으로 존재하였다. 비극이고 슬픔이다. 그러나 패망한 나라의 군주가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힘이었다. 그 슬픔에 공감하며 정치적 독립과 역사와 정서의 독립을 바라던 국민들이 태극기를 들었다.




      


이욱_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요 저서로 《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 《조선왕실의 제향 공간-정제와 속제의 변용》, 《조선시대 국왕의 죽음과 상장례-애통•존숭•기억의 의례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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