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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888호-사랑이 혐오보다 강하다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5. 6. 24. 13:45

사랑이 혐오보다 강하다

 

 

news letter No.888 2025/6/24

 

 

 

 

614일에는 서울 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남도의 끝에서 sns로 관련 소식을 접하며, 수년 전의 기억을 떠올려 이 글을 쓴다.

 

#1. 무지개 프라이드

 

      20237, 학회 발표를 위해 미국에 온 나는 아침부터 워싱턴주 밴쿠버의 파머스 마켓에 왔다. 관광객보다는 지역 주민들로 활기를 띤 시장이다. 입구부터 화려한 꽃과 화분이 가득한 가판대가 눈길을 끈다. 어떤 수레에는 맛을 보지 않아도 새콤달콤함이 눈으로 전해지는 빨갛고 노랗고 파란 베리들이 아기자기하게 종이상자에 담겨 있고, 직접 볶은 원두를 갈아서 봉지에 담아주는 코너도 있다. 파머스 마켓이지만 지역의 예술가들이 차려놓은 가판대들도 다양하고 재미있어서 자꾸만 걸음을 멈추게 된다.

      그런데 저기 걸어가는 두 사람의 복장이 심상치 않다. 그들은 자기 키만큼 커다란 무지개색 보자기를 몸에 두르고 있다. 그때부터 유심히 보니 곳곳에서 온몸에 무지개 깃발을 휘감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모양도 각양각색이다. 선명한 원색의 깃발도 있고, 파스텔톤 무지개도 있다. 무지개 한가운데 태양이 그려진 것도 있다. 무지개색 실을 꼬아 만든 치마를 두른 소년도 보인다.

      그 사람들을 따라가 보니 너른 잔디밭 위에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엔 온통 무지개 천지다. 무지개 가방, 머리띠, 깃발, 티셔츠, 양말, 우산, 날개... 다양한 무지개 아이템을 장착한 사람들이 가득하고, 관련 부스들도 많다. 오늘이 지역 LGBTQ+ 행사가 있는 날인가보다. 한국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릴 때와 마찬가지로, 단지 성소수자들뿐 아니라 다양성을 존중하며 성소수자들의 인권운동을 지지하는 시민들이 함께 모였다. 장보러 나온 지역민들이 잔치도 여는 것 같은 소박한 지역축제의 분위기가 한국과는 좀 달랐다. 무지개빛 하트 한가운데에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걸어두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화해를 이야기하는 크리스천 부스도 보였다. 세상에는 다양한 모습의 사람이, 사랑이 존재한다.

 

사랑이 이긴다.”

사랑이 혐오보다 강하다.”

 

      세계 곳곳의 퀴어 축제의 장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문구다. 짧고 강렬하다.

      혐오가 횡횡하는 세상이기에, 그렇게 어쩌면 당연한 사실을 함께 모여 새삼스럽게, 그리고 즐겁게 확인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자리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 같다.

 

 

#2. 두 개의 영

 

      캐나다 북서해안에 위치한 원주민 박물관인 유미스타(U'mista) 문화센터에서 책을 한 권 구입했다. 샵을 둘러볼 시간이 많지 않았는데, 마지막에 두 개의 영(two-spirit)”이라는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와서 내용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계산했다. 집에 와서 살펴보니, 오지브와-크리족 원로인 Ma-Nee Chacaby가 원주민 레즈비언으로서 자신의 일생을 이야기한 책이다. "Two-Spirit"는 캐나다 원주민 성소수자가 스스로를 일컬을 때 종종 사용하는 말이다. 2019년 우연히 참석한 밴쿠버 원주민 퀴어 필름 페스티벌(Vancouver Indigenous Queer Film Festival)>에서 그 용어를 처음 들었다. 당시 관객들 중 관광객이나 이른바 일반은 거의 없고 성소수자, 그중에서도 원주민 성소수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상영된 단편 영화들에는 원주민 퀴어로서 겪는 정체성 혼란, 슬픔, 외로움, 이질감 같은 것들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이날 많은 원주민 퀴어들이 스스로를 두 영혼을 가진 사람(two-spirit-person)”으로 표현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전통을 재해석하고 원주민 정체성과 퀴어 정체성을 연결하려고 시도했고, 이날 상영된 필름들은 그러한 노력 속에서 나온 작품들이었다.

 

 

#3.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

 

      사실 2023년의 북미 여행이 시작된 계기는 포틀랜드에서 개최된 문학과 환경 학회(ASLE) 참석 및 발표를 위해서였다. 해당 학회에서는 참가자 포탈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자신이 어떻게 불리기를 바라는지 묻는 항목이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어떤 인칭대명사로 불리기를 바라는지 묻는 것이다. 이는 she/he의 전통적 인칭대명사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였는데, 나는 그게 참 흥미롭고도 좋았다.

      생태학적으로 볼 때, 다양성은 생태계의 건강을 증진한다. 종 수준에서든 유전자 수준에서든, 생물다양성의 보전이 그토록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는 까닭이다. 그런데 인간은 유독 사회적으로는 다름을 용인하기 어려워하는 듯하다. 생태사상가 머레이 북친은 사회적 수준에서도 풍부한 다양성이야말로 사회의 건강은 물론이고 생태계의 건강을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생물다양성과 문화다양성은 얽혀있다. 구체적이고 사소한 실천에서부터 다름을 존중하고 다양성을 장려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소설가 앤 레키는 <사소한 정의>를 비롯한 라드츠 제국 시리즈에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라드츠제국의 모든 시민을 "그녀(she)"로 지칭했다. 2017년 출판한 <사소한 기원>에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라는 중립적인 대명사를 사용한다. ''로 번역된 단어의 원어는 'e'이다. 레키는 대명사 ''의 사용 뿐 아니라 '인간'의 의미에 관해서도 물음을 제기하는 상당히 파격적인 구상으로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면서 기존의 고정관념을 흔들어 놓는다. 가령 외계인 종족 게크는 처음 우리 '인간'을 마주하고서는, 과연 이들도 인간일까 의문을 제기한다.

      나는 식물 사람: 철학적 식물학을 번역하다가, 20세기 후반에 왕성하게 활동한 호주의 원주민 철학자 빌 네이지(Bill Neidjie)의 짧은 시구를 만나게 되었다.

 

"I love it tree because e love me too.

E watching me same as you

tree e working with your body, my body,

e working with us."

 

      20세기 후반에 주로 활동한 그의 글에서 대명사 'e'가 등장한다. 그는 앤 레키가 활동하기 훨씬 전부터 남성과 여성, 식물과 동물, 자연현상과 조상 등이 동등한 주체임을 강조하기 위해 대명사 'e'를 의도적으로 사용해왔던 것이다. 멜버른 대학교의 필립 모리세이(Philip Morrissey)의 말대로, 이 간단하면서도 세련된 '언어경제학'"새와 동물과 인간과 나무와 조상들 사이의 호혜적이고 투명한 상호관계를 표현하기에 완벽하게 적합하다."

      그런데 빌 네이지의 짧은 시구의 번역문에서 내가 'e'''로 옮긴 것에 대해 편집자가 "이건 'e'로 두심이 어떨까요?"라고 적어놓은 것을 발견했다. 글쎄... 이미 베스트셀러인 앤 레키의 소설 <사소한 기원>에서 'e'''로 옮겨졌고, 나는 ''도 아니고 '그녀'도 아닌, 헷갈리게 만드는 ''라는 번역어가 제법 괜찮다고 생각한다.

 

 

#4. 이야기의 선택

 

      문득 생각한다.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 것인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야기의 선택은 여전히 중요하다. 개인적인 수준에서든 지구적인 수준에서든. 과연 보통 사람들이 이야기를 선택할 수 있느냐고 되묻거나, 이야기는 일종의 해석에 불과하니 이야기가 아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따질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야기를 선택하기 위해 애쓰는 일은 중요하고 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매튜 홀은 식물 사람: 철학적 식물학에서 이야기의 의의와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는 현실과 상호작용하는 방식으로서, 우리의 세계를 의미 있게 만들고 그 안에서 우리의 행동을 인도한다.”고 말한다. 어떤 이야기를 선택하느냐는 세계와 관계 맺는 서로 다른 방식을 위한 길을 열어주며, 매우 다른 결과로 인도한다.” 그렇다. 당연히 이야기는 단지 해석에 불과한 게 아니다. 이야기가 세상을 만들고 나를 만든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를 상상하고 선택하기 위해서는 틈이 있어야 한다. 아니, 내가 틈에 있어야 한다. 꽉 짜인 체계의 틈. 거기서 어렴풋이 빛나는 반딧불이 같은 사람들이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사랑이 이긴다고 이야기할 때, 그 말은 사실의 진술이라기보다는 의지와 지향의 표현이다. 혐오가 아니라 사랑을 선택하겠다는.

      오늘날 세상에는 사랑보다는 혐오가 횡횡하는 듯하고 우리는 종종 여린 마음을 다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이야기를 선택할 수 있다고, 우리는 혐오보다는 사랑을 선택할 것이라고 무지개 깃발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 오늘 아침, 미 대통령 트럼프가 이란 핵시설을 폭격했다며 자축하는 끔찍한 뉴스를 접했다. 전쟁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이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 것인지가 더더욱 중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유기쁨_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저서로 《애니미즘과 현대세계: 다시 상상하는 세계의 생명성》, 《생태학적 시선으로 만나는 종교》, 《바이러스에 걸린 교회》, 《아픔 넘어: 고통의 인문학》 등이 있고, 논문으로 〈인간적인 것 너머의 종교학, 그 가능성의 모색: 종교학의 '생태학적 전회'를 상상하며〉, 〈‘병든 지구’와 성스러운 생태학의 귀환-생태와 영성의 현실적 결합에서 나타나는 종교문화현상의 비판적 고찰〉, 〈발 플럼우드의 철학적 애니미즘 연구: 장소에 기반한 유물론적 영성 개념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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