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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903호-케데헌과 민족주의

한종연KIRC 2025. 10. 8. 10:10

 케데헌과 민족주의

 

news letter No.903 2025/10/7

 

 

 

 

(이 글에는 2025년 6월 20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 이하 ‘케데헌’으로 약칭)에 대한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시작은 더피였다. 아마도 영화가 공개되기 이전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뚱뚱하고 못생겼지만 다정하고 성실한 마음을 지녔을 것 같은 호랑이 한 마리가 자신이 넘어뜨린 화분을 일으켜 세우려 애쓰면서도 번번히 실패하는 숏폼을 우연찮게 유튜브에서 보고는 마음이 갔다. 꼭 붙어 다니는 세눈박이 까치까지 눈에 들어오고서야 작호도(鵲虎圖)가 모티브임을 알았다.

 

작호도는 본디 중국에서 유래했다지만, 19세기 조선의 민화에서 즐겨 그려지면서 많은 한국인은 그것이 우리 것임을 안다. 민화의 호랑이는 대개 무능하고 탐욕한 양반 나으리를 상징한다. 더피는 무능할지언정 탐욕해 보이지는 않았다. 까치 친구는 그 더피를 한심하게 바라보는데, 그렇다고 민초(民草)를 대표하여 양반 호랑이를 풍자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민화 속 까치가 더피의 친구 까치와 겹쳐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 까치가 꼭 갓을 쓰고 있어 저들이 과연 조선 민화 작호도에서 튀어나온 아이들임을 알았다.

 

궁금해졌다. 영화가 공개되자마자 전 세계 넷플릭스 차트의 상위권을 달린다는 소식이 연이어 들렸다. 그 영화의 설정과 장면, 의상과 소품, 대사와 몸짓 하나하나에 깨알같이 녹아 있는 한국문화의 요소를 세밀하게 소개하는 영상도 쏟아졌다.

 

 

시간을 두고 마침내 찾아보았다. 영화는 시작부터 아름다웠다. 매 세대마다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구하고자 무가(巫歌)를 부르고 칼춤을 추었던 우리네 무당들. 그 소리와 몸짓으로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 세상을 지켜왔던 한국 전통 신앙의 영웅들. 고마웠다. 우리 공동체의 역사 속 무당의 역할과 의미를 알아주고 그들을 영웅이라 불러 주어서. 예인(藝人) 팔자가 무당 팔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저잣거리의 속설을 그대로 가져와, 그 무당들이 오늘날 각 시대를 대표하는 걸그룹으로 이어져 노래의 힘으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오방천 휘날리는 당산나무 앞에서 헌트릭스의 내력을 이야기하는 셀린의 등장 장면은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완성도 높은 한국적 미감을 보여주지만, 그의 입을 통해 설명되는 헌트릭스의 존재 이유는 한국의 고유한 정서로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질적인 세계관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상찬하는바 영화의 여러 장면 속 의상, 소품, 대사, 몸짓 등에 깨알같이 녹아 있는 한국의 역사 및 생활 요소와 한국인에게 친숙한 어떤 감수성에 대해 인정한다. 심지어 극의 흐름조차 어찌나 한국 드라마의 막장적 특성을 갖추고 있는지. 출생의 비밀, 첫눈에 반하는 만남, 원수 집안끼리의 사랑 등등 말이다. 그 하나하나에 대해 구구히 지적하는 것은 이 글의 목표에도 분량에도 어울리지 않으므로 생략한다. 다만 종교 연구자의 눈에 비친 비()한국적 설정에 대해서만큼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세계관이다. 영화는 악령과 그 우두머리인 귀마’[한자로는 아마도 鬼魔], 그리고 귀마의 무리를 방어하기 위해 둘러쳐진 혼문’[한자로는 아마도 魂門]을 이야기한다. 이야기인즉슨 악령들이 인간의 영혼을 빼앗아 귀마에게 바치면 귀마는 그 영혼을 먹고 힘을 불리고, 이를 막기 위해 무당에서 걸그룹으로 이어져 내려온 누대의 데몬-헌터들이 노래의 힘으로 사람들을 연대하여 일종의 결계인 혼문을 온 세상에 둘러친다는 것이다. 놀랍다. 한국의 무속에 악령이 있나? 저승세계에 마왕이 있나? 한국의 무당은 악귀를 물리치나? 망자의 넋은 영혼과 같은가?

 

한국에는 죽어서도 억울한 넋들이 있다. 저마다의 이유로 천도하지 못한 넋들은 이승에 남아 때로 산 자를 골치 아프게 하기도 한다. 무당이 하는 일은 그들의 해원(解冤)이다. 망자를 망자의 세계로 올바르게 천도(遷度)하는 것, 그리하여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바로잡는 것, 그것이 바로 무당의 할 일이다. 망자가 죽어 저승으로 가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악령도 마왕도 아니다. 염라대왕을 비롯한 열 명의 판관 이른바 시왕(十王)들이 그들 살아생전 업보를 재판하여 그다음의 갈 곳으로 보내는 것이다. ‘은 비록 ‘soul’로 번역되긴 하지만 육체 속에 깃들어 생명을 부여하고 마음을 움직인다고 여겨지는 순수한 무형의 실체인 영혼과는 이미지의 괴리가 있다. 넋은 차라리 정신과 기운이 합쳐진 혼백(魂魄)’에 보다 가까우며, 죽어서도 살았을 때의 모습을 유지하는 초자연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망자의 바로 그 넋을 저승까지 잘 안내해 주는 존재가 바로 사자(使者, 저승사자)이고. 진우와 그 사내아이들(사자보이즈)처럼 사람의 영혼을 탈취하는 악령이 아니라!

 

 

둘째, 구원의 서사와 방식이다. 데몬-헌터인 어머니와 악령으로 추정되는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루미는 제 몸에 새겨진 아버지의 흔적인 악령의 문양을 지우고 싶어 한다. 데몬-헌터로서 혼문을 바로 세울 의무가 있지만, 갈수록 문양을 감추기만 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며 악령에 대한 공격 태도에도 의구심을 품는다. 귀마에게 영혼이 장악된 진우는 귀마가 귓속에 흘려 넣는 죄의식의 소리에서 자유롭고 싶다. 그 죄의식은 옳게 기억된 것인지 잘못 입력된 것인지 분명하지도 않다. 결국 루미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보이기로 결심하고 악령의 문양을 드러낸 채 귀마에 맞선다. 진우는 귀마에게 목숨을 잃을 처지에 놓인 루미를 보호하며 자신을 희생하지만, 그 희생의 덕분으로 영혼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루미와 진우의 구원 서사는 서로 얽혀 있지만, 그 둘의 구원 방식은 사뭇 다르다. 루미는 자신의 본모습을 직시하고 그 가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방식을 취한다. 성장 과정에서 루미에게 문양 감추기를 강요한 이는 선대 데몬-헌터이자 어머니의 친구이고 루미의 양육자였던 셀린이었다. 셀린은 자신의 모습을 필요한 대로 편집하여 타인에게 전시하는 데 익숙했던 구세대 한국인의 가치관을 대변한다. 반면 루미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줄 아는 신세대이다. 루미는 구세대에 저항하고 자기 세대의 가치관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구원한다. 굳이 말하자면 한국적이라기보다는 동시대 전 세계적인 세대 간 갈등과 극복의 노력을 보여주며, 루미로 대변되는 뉴-제너레이션에게 힘을 실어준다. (부언하자면, 루미의 자기 증명을 원하고 지지하는 미라와 조이의 태도에는 자매애가 반영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루미의 태생적 한계의 근원을 굳이 부계 쪽에 둔 설정에도 여성주의적인 의도가 감지된다. 하지만 그에 대한 논의를 이 지면에서 이어가지는 않겠다.)

 

진우는 희생한다. 온몸이 불에 타 사라지면서도 영혼을 되찾았다고 말하는 진우는 안데르센 동화의 인어공주를 떠올리게 한다. 희생은 기독교의 중심 가치이다.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듯이, 진우는 자신을 희생하여 루미를 살리고, 루미를 살림으로써 제 영혼을 구원했다.

 

루미의 구원과 진우의 구원은 모두 한국적인 발상이 아니다. 한국 전통의 구원 서사에서 루미의 경우와 같은 자기 욕망의 인정은 그다지 고려되는 방식이 아니었고, 지금까지도 한국 민담에서 주로 등장하는 구원의 모티브는 희생(犧牲)이 아니라 상생(相生)이다. (이러한 단언은 필자의 과문의 소치일 수도 있다. 혹시 오류가 있다면 전공자분들께서 교정해 주실 것을 당부드린다.) 달리 해석할 수도 있긴 하다. 진우가 루미의 생명을 구했고, 루미가 진우의 영혼을 구한 것으로. 그리하여 쌍방의 구원 서사가 완성된 것으로. 진우는 수백 년 전의 사람인지라 어차피 현세에 생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렇게라도 해서 진우는 해원을 이루었으며 산 자는 이승에서 죽은 자는 저승에서 각자 상생하게 된 것이라고. 글쎄. 궁색하다. 한국의 무당이었다면 억울하고 슬픈 넋을 위로하고 다독이며 주체적인 자세로써 그를 저승으로 돌려보내지, 그 망자가 도리어 무당 본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그로써 망자 스스로를 구원하게 하는 식으로 상황이 전개되도록 놓아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르겠다. 무당과 저승사자의 사랑이라는 새로운 컨텐츠의 출현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하지만 비록 그렇다 해도 희생보다는 상생이 부각되는 방향으로 연출이 되었더라면 한국 전통의 느낌이 보다 완연하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다시 작호도로 돌아오자. 민화 속의 호랑이와 까치는 각각 탐욕스러우나 우매한 양반 지배층과 그 양반을 신랄하게 비판할 줄 아는 민초를 상징한다. 그렇다면 영화 케데헌에는 비판하는 민초의 모습이 제대로 묘사되었는가? 당초 진우의 반려동물로 상정된 더피와 세눈박이 까치에게 작호도의 캐릭터를 입히는 것은 무리일 수 있겠다. 그렇더라도 한국의 민화에 담겨 있는 민중의 저항의식이라는 그 취지는 잃지 말았어야 했다. 케데헌의 아이돌 팬들은 수동적이다. 그들은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영혼을 빼앗기고, 헌트릭스의 활약으로 혼문이 복구되자 수동적으로 평화를 되찾을 뿐이다. 그들은 역사 발전의 현장에서 소외되었다. 물론 팬들은 헌트릭스의 노래를 떼창하며 숭배하는 아이돌의 영웅적 활약에 힘을 실어주기는 한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친다. 어차피 아이돌(idol)’우상이어서? 그 모습은 한국인답지 않다.

 

 

그래서 말이다. 과연 케데헌이 한국적이라고, 한국의 문화를 온전히 담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제 논의를 조금 비약하겠다. 그래서, 케데헌을 상찬하고 이른바 그 한국 문화적 요소에 기뻐하는 이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한국적임이란 무엇인가 묻게 된다. 그리고 또 묻게 된다. 위에서 열거한 세 가지 지점을 양보해서 케데헌이 한국적인 작품이라고 치더라도, 그러면 도대체 뭐가 좋은 것이냐고.

 

한국 역사와 문화의 본모습이 세계인들에게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알려지는 것이 좋은 걸까? 그렇다면 동의한다. 혹자는 말한다. 케데헌을 보고 나서 한국의 문화에 매력을 느낀 세계인들이 한국을 많이 사 갔으면 좋겠다고. 의복이건, 음식이건, 국립중앙박물관의 굿즈건 말이다. 한국의 경제에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그 또한 나쁘진 않다. 그런데 때로는 이런 말도 들려온다. 그러니까 이제는 한국의 문화와 정신이 세계를 선도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나는 이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먼저 삶의 양태로서의 문화에는 우열이 있을 수 없다. 모든 문화는 다만 서로 다를 뿐이다. 물론 어떤

문화가 한때의 호감을 얻어 유행의 물결을 탈 수는 있다. 그 이익은 해당 문화를 사업의 대상으로 삼는 이들에게 경제적으로 이익이 될 일이다. 삶의 양태로서의 문화에는 우열이 있을 수 없기에, 하나의 문화가 다른 문화를 선도하는 것은 옳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다만 민족의 정신세계, 즉 어떤 민족이 지향하는 이념과 가치 또는 삶의 방향성에 관해서는 논쟁을 이룰 만하다. 가령 한국인이 19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 현재까지 시종일관 지향해온 민본과 민주의 가치가 그런 것이다. 나는 한국인이 한국인이 최근 몇백 년 동안 추구해왔고 지금도 온전히 실현하고자 노력을 멈추지 않는 그 가치가 적어도 현재의 인류에게는 올바르고 유익한 것으로 판단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이념이 다른 민족에게 선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옳고 유익한 것이기에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강요를 하거나 선도하고자 의도하는 것조차 불순하다고 본다. 내 가치를 행동으로 표방하여 자연스럽게 모범이 되도록 하면 될 일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다시 묻게 된다. 도대체 민족이란 무엇인가? 한민족이란 무엇인가? 한국인은 과연 민족인가? 우리는 오랫동안 민족주의의 관념 속에서 살아왔다. 19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민족주의가 한국에 이식되기 이전, 어쩌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나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받아 나라 사람들의 주체 의식이 강해졌던 시기 또는 조선 후기 국학이 번성했던 시절,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이미 근대 유럽에서 싹튼 민족주의와는 조금 다른, 우리만의 민족의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외지인의 교통이 빈번하지 않은 땅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외모로 비슷한 음식을 먹고 상통하는 말을 쓰며 살아왔기에 그랬을 수 있다. (나는 이것을 한국인의 ()민족주의라고 부른다.) 민족주의라는 이념이 막상 그것이 발생한 유럽에서는 배타적인 것으로 경원시되는 반면 한국에서 유달리 옹호를 받았던 것은 한국이 피지배의 근대사를 지녔던 데에 기인하는 바 있다.

 

하지만 피지배의 역사에서 비롯된 방어적, 평화적 민족주의는 한국의 국력이 막강해지고 전세계적으로 극우가 득세하면서 점차 공격적, 배타적 민족주의로 변모하고 있다. 서로 비슷한 외모와 음식과 말을 매개로 이루어졌던 한국인의 원민족주의는 혈통이 단절되고 외국인이 대거 유입되면서 미래에는 또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다.

 

그래서 말한다. 한국인은 한국이라는 국가의 영토 안에서 한국의 시민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하고, 한민족은 그 한국인들이 시간을 들여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의 정체성이며, 한국인의 문화란 바로 그 공동체가 만들어 나가는 삶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같은 공동체와 정체성은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 우월성을 주창하거나 의식적인 전파를 의도해서는 안 된다고. 케데헌을 보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들으며 문득 들게 된 생각이다.

 

 

 

민순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박사학위 논문으로 〈조선전기 도첩제도 연구〉가 있고, 논문으로 〈조선 세종 대 승역급첩의 시작과 그 의미〉, 〈한국 불교의례에서 ‘먹임'과 ‘먹음'의 의미-불공(佛供)・승재(僧齋)・시식(施食)의 3종 공양을 중심으로〉, 〈불교의 자비행에 내포된 행복 메커니즘-진화심리학과
공리주의적 윤리학의 관점을 중심으로〉, 〈불교에서 점복이 다루어지는 방식에 대한 일고찰-《점찰경》에 나타나는 방편의 위계 문제를 중심으로〉, 〈한국 법화계 불교종단의 역사와 성격〉, 〈여말선초의 승군 개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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