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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壇 유감
2008.10.21
북경 외곽에 자리한 거대한 천단공원은 중국의 황제들이 하늘(天神)을 제사하던 곳이다. 이곳에는 양의 기운이 싹트는 동지에 하늘만 제사하는 圓丘와 더불어, 정월에 하늘과 땅(地神)을 함께 제사하는 祈年殿이 있다. 그런데 하늘을 제사한다하여 ‘천단’이라 이름 지은 그곳에 왜 ‘땅’이 끼어든 것일까?
기년전의 전신은 大祀殿이었는데, 하늘과 땅을 함께 제사하기 위해 세워졌다. 천지는 부모와 같은 존재이므로, 부모를 함께 제사하는 것처럼 천지도 함께 제사해야(合祭) 한다는 父天母地의 논리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하늘(陽)을 나타내는 3층의 푸른 색 지붕, 하늘의 운행을 나타내는 여러 개의 기둥들로 이뤄진 기년전은 철저하게 하늘을 위한 제단이었다. 다만 천신의 자리 옆에 지신의 신위만 놓여져 있을 뿐이다.
사실 땅을 제사하는 곳은 따로 있다. 천단의 반대편 그러니까 북경의 북쪽에는 천단과 짝을 이루는 地壇이 있다. 천단이 양의 상징으로 가득 찬 것처럼, 지단은 음(땅)의 상징으로 지어졌다. 老陰數 6에 맞춰 늘어선 돌들, 2층의 네모난 제단. 天圓地方說에 의해 천단은 圓形의 구조물로 구성되었지만, 지단은 方形의 구도로 이루어졌다. 천단이 양을 상징하는 원형의 구도와 홀수의 수리로서 높이로 하늘에 닿으려했다면, 지단은 方形과 짝수에 의지해서 넓이로 땅과 만나던 곳이다. 비록 천단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땅(음)의 상징으로 이뤄진 그곳에서 극도에 이른 양기속에서 새로운 음기가 생겨나는 하짓날에 음의 형이상자인 땅을 제사하였다. 그런데 ‘부천모지’의 논리에 의해 땅은 멀쩡한 지단을 놔두고, 천단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리고 땅(음)으로서의 정체성은 저 멀리 가리워졌다.
온통 하늘의 상징으로 가득 찬 기년전을 바라보니, 여러 상념이 떠오른다. 크고 화려한 하늘의 제단에서 위대한 천신의 짝으로 함께 제사되는 것이 더 좋을까? 아니면 비록 초라한 제사상이지만 작더라도 자신의 제단에서 제사받는 것이 좋을까? 천지를 부모로 모신다던 그들은 무엇이 제대로 땅을 섬기는 것인지 한번이라도 생각해봤을까? 문득 엘리아데의 말이 떠오른다. ‘지모신이 유일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최고신의 위치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는 하늘과의 성혼에 의해 사라져버렸다’던.
내가 지단을 찾아갔을 때에는 공교롭게도 패션쇼가 열리고 있었다. 엄숙한 표정의 황제가 대지의 중심에 서서 땅의 정기에 경건한 제의를 올리던 그 곳에는 터질듯한 마이크의 고성과 지축을 울리는 음악소리, 그리고 반라의 늘씬한 미녀들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활보하고 있었다.
왜 하필 지단에서 패션쇼를 할까? 그 넓은 북경 시내 다 놔두고, 조명도 없고 의자도 없는 지단에서 패션쇼를 하는 것일까? 이리저리 사람들 틈새를 비집어가며 지단의 핵심인 방택단을 기웃거리면서 생각한다. 잃어버린 여성성의 표출인가? 그래 어쩌면 땅도 여자도 모두 음에 속하는 곳이니까. 그래서 지단을 행사장으로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엄숙한 의절을 차리진 않았지만, 땅을 모신 제단에서 현대 여성들을 위한 행사를 진행한다는 것 역시 그 정신은 통하겠지!
천단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중국의 자랑거리로 회자되지만, 지단은 지역주민의 공원으로 변화되어 새벽에는 태극권과 갖가지 운동을 하는 노인들로 만원을 이루었고, 옆문에는 어린이 공원이 있어서 간단한 놀이기구와 몇 백원짜리 잡동산이들을 팔고 있었다. 황제의 제사도 받지 못하고 유네스코 문화유산에도 오르지 못했지만, 초라할망정 통속적인 삶의 일상을 포섭하는 저 모습이 만물을 실어주는 진정한 대지의 품이 아닐까? 혼자 위안하며 씁쓸한 발걸음을 옮겼다.
박미라 <한국종교문화연구소, pmr080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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