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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현실에 둔감하게 만드는 교회, 그 폐쇄회로와 신학


 

 

2013.12.3

 

 

우리 사회의 높은 자살율과 낮은 출산율은 우리 사회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삶의 고통이 극단적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기독교가 근래에 성장추세가 주춤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커다란 사회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사회현상에 대해 어떤 실천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일까? 어떤 의미있는 개별적 실천들이 없지 않겠지만,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력, 특히 기독교의 영향력이 큰 만큼 그에 상응하여 평범한 사람들의 고통의 체감 정도가 줄어들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마디로 말해 민중들의 고통을 자양분 삼아 기독교가 성장해왔을지언정 그 고통을 극복하는 데는 무력한 모습을 보여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민중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는 현실 가운데서도 그 고통의 현실을 넘어서는 데 교회와 신학은 사실상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은, 고통의 현실에 개입해 들어가 그 현실을 변화시키는 교회와 신학이 아니라 자족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밖으로부터의 이의제기를 허용하지 않은 채 요지부동한 교회와 신학이 오늘 우리 시대에 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가 그 무력 상태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앙의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신앙은 타자를 향한 개방성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는 성서의 요체는 예수도 집약하고 있듯이,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마가복음』 12:30~31). 하느님에 대한 관심,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관심,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구체화된다는 이야기이다. 성서의 황금률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마태복음』 7:12). 예수는 바로 이것이 율법서와 예언서의 본뜻이라고 말한다. 결국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우리가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신앙의 요체라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그와 같은 삶으로 구체화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바른 것이라 할 수 없다. 오늘 자기만족의 폐쇄회로에 갇힌 교회와 신학을 보면서 우리는 그 기본적 원리를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 기본적 원리가 교회에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스도인들의 존립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서 교회가 정착된 구조라는 입장에서는 교회 자체가 이미 ‘구원의 방주’이기에 교회 밖의 타자들은 언제나 객체로 머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언제나 구원의 대상, 더 정확히 말해 전도의 대상일 뿐이다. 그들이 회개하여 구원의 방주에 오르는 것만이 고통의 현실에서 벗어나는 길이 된다. 그리고 고통의 현실은 언제나 그대로 세상에 남아 있다. 반면에 교회 자체가 위기구조라는 입장에서 보면 교회는 언제나 타자의 고통 때문에 동요할 수밖에 없다. 교회 스스로가 존립을 위한 제도 내지 조직으로서의 불가피한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요 신앙을 구현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면 교회는 마땅히 교회 밖의 타자들의 고통을 남의 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족적인 폐쇄회로에 갇혀 요지부동하는 교회가 존속하는 현실에서 어떤 대안이 가능할까? 확고한 제도로서의 교회가 타자에 대한 개방성, 세계와의 소통성을 상실한 채 민중의 고통의 현실에 대해 사실상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다면, 그 교회는 마땅히 존재의의를 상실한 것이므로 부정과 해체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은 교회를 정당화하는 신학 역시 정당성을 지닐 수 없다. 하지만 스스로 해체될 리 만무한 그 교회와 신학이 여전히 존속하는 조건에서 우리는 현실 교회와 신학의 재구성을 그 대안으로 제시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고무적인 현상은, 최근 한국 기독교 안에서 ‘대안교회’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교회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교회들은 결코 자족적인 완결체계로서 대형화를 지향하지 않고 민중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 현실 세계와의 소통이 용이한 교회의 구조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뚜렷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1)

 

일찍이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당대의 교회가 ‘종말의식’을 상실했다고 지적하면서 예수 사건 또는 민중사건에 동참하는 공동체로서 교회의 성격을 강조하였다.2) 서남동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건으로 발생하고 일어날 때 일어나고 꺼질 때 꺼지며 보이는 형태가 없고 자발적으로 명멸하는 새로운 교회를 ‘성령의 교회’ ‘민중의 교회’라고 하였다.3) 이와 같은 교회에 대한 이해는 사실상 지배체제와 동일시된 제도로서의 교회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함축하는 것인 동시에 교회의 새로운 존재방식을 시사한다. 그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여전히 민중의 고통이 사라지지 않은 현실에서 교회의 몫을 찾아야 하는 오늘의 과제를 재삼 인식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의 교회가 민중의 고통의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재구성함으로써 스스로의 존재의의를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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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한국 교회의 새로운 대안으로서 ‘작은 교회’들의 의의에 대해서는 김진호,『시민K, 교회를 나가다-한국 개신교의 성공과 실패, 그 욕망의 사회학』(서울: 현암사, 2012), 209쪽 이하 참조.
2)안병무, 『민중신학 이야기』(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7), 168쪽 이하.
3)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서울: 한길사, 1983), 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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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지난 11월28일(목)에 한신대학교 종교문화연구소에서 개최되었던 심포지엄(주제:고통받는 민중, 한국 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서 발표되었던 글의 결론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최형묵_

 

한신대학교 외래교수


chm1893@chol.com


주요저서로 《사회 변혁운동과 기독교 신학》,《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손이 없기 때문이다 -

 

민중신학과 정치경제》, 《뒤집어보는 성서인물》, 《한국 기독교의 두 갈래 길》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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