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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333호-정의가 뭐길래(정성채)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15. 2. 3. 21:50

                        정의가 뭐길래

                

                       
                              

 2014.9.23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정의의 결과다.” 프란시스코 교황이 다녀가면서 많은 말을 쏟아냈지만 그중 유독 기억에 남는 말이다. 평화가 정의의 결과라는 말은 분명 두고 오래 남을 명언이며, 걸출한 수사다. 동시에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와 아픔을 이렇게 예리하게 지적한 말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껏 평화를 전쟁이나 혼란과 쌍으로 엮어서 인식해 왔다. 극심한 동족상잔을 겪었고, 지금도 분단 상황과 전쟁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평화는 곧 전쟁의 억지로 받아들이는데 익숙해 있다. 당장의 사회경제적 조건과 개인의 삶의 형태가 어떠하든 4.19, 5.16, 5.18. 6.29 등 숫자로 명명되는 최악의 사회 혼란만 없으면 일단 평화로운 사회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교황은 평화는 최악의 상황을 모면하는데 있는 게 아니라 도달해야 할 적극적인 그 무엇, 혹은 조건임을 일깨움으로써 우리 사회가 결코 정의롭지 못한 사회임을 지적했던 것이다.

 

 

        기억하건데 5공화국 때는 ‘정의 구현’이 국정지표 겸 대국민 슬로건이었고, 문민정부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취임사에서부터 들고 나왔다. 그 이후에도 여러 정권이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나름의 구호와 함께 실천 정책들을 펼쳤으나 정의에 대한 세상의 갈증은 줄어들지 않았다.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은 어느 날 느닷없이 등장해 한국 사회에 정의에 대한 관심을 센세이셔널하게 불러일으켰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정의의 문제에 대중의 관심이 폭발적이었다는 것은 살고 있는 사회가 그만큼 정의롭지 못하다는 반증이 될 수밖에 없다.

 

 

        존 롤스는 ‘정의는 정당화될 수 없는 불평등이 없는 상태’라고 했다. 오직 정당화될 수 있는 불평등은 약자를 배려하기 위한 불평등을 말한다. 사회적 소수나 가난한 자를 차별적으로 챙기는 정책만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정권의 정통성이나 인기 여부와 관계없이 언제 어느 때나 항상 있어 왔다. 그럼에도 갈수록 양극화와 계층 간 갈등은 심해졌다.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가 정의롭지 못해서? 경제 구조적으로? 정의든 구조든 그 속에 살고 있는 구성원 각자의 입장 차이가 그 근본 이유 아닐까 싶다. 입장이라는 건 이해와 득실, 손익, 이념, 명분, 종교, 명예, 신념 이런 모든 가치가 반영된 개별 삶의 조건이면서 동시에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 간의 입장이나 계급 간의 입장, 그리고 조직 간의 입장이 일치하거나 합의가 원만히 이뤄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우리 사회도 상호 입장의 합의를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으나 그 결과는 항상 만족스럽지 못했다.

 

 

        따라서 보수진보 간의 불신과 반목이 이보다 더 할까 싶은 상황에서 교황이 보여준 약자에 대한 발언이나 행동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한 게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을 때의 얘기일 수밖에 없다. 교황의 행동에 정서적으로 원론적으로 그리고 명분상 동의하더라도 자기의 구체적인 이해가 걸렸다면 사정은 다를 수밖에 없기에 그렇다. 한마디로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교황의 행동에 대한 해석이 다르고 수용 행태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교황이든 존 롤스든 마이클 샌들이든, 아니면 우리 모두가 일상적으로 입에 달고 사는 정의든 중요한 건 정의의 개념이 아니라 정의에 대한 입장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입장은 정의의 상대성을 구체화한 것이다. 이 입장은 결코 과학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과학 이상으로 현실 삶을 구속한다. 한마디로 내 입맛에 맞으면 정의고 아니면 아닌 것이라서 평화가 정의의 결과라는 교황의 언명은 수사로서는 훌륭했지만 현실적으로는 공허할 수밖에 없다는 데 우리의 아픔이 있다.

 

 

        사람은 처음부터 입장을 가지고 태어난다.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이 지닌 입장은 전부 다르다. 입학사정관 제도가 있어야 유리한 자식과 그냥 한 방에 시험으로 결정되어야 유리한 자식이 있다. 사법시험을 통해 일거에 인생승부를 봐야 하는 자식과 비싼 로스쿨 제도를 도입해야 기회가 열리는 자식이 있다. 정규직 취직을 위해 유학, 어학연수 등 글로벌한 수준의 스펙이 요구되는 사회일수록 유리한 자식이 있는가 하면 그럴수록 절망할 수밖에 없는 자식도 있다. 어떤 제도나 장치든 다 그 나름의 타당한 논리와 명분이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논리와 논리가 부딪쳐 답이 나오는 경우는 현실 사회에서 거의 없다.

 

 

        따라서 모든 이해를 벗어난 백지 상태의 원초적 입장이라는 건 있을 수가 없다. 이 입장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크든 작든, 행운이든 억울하든 생명이 자기복제의 조건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한 변경될 수 없다. 기득권을 소거하고 순수하게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잠재력만으로 경쟁하는 사회는 머릿속 설정으로만 가능하지 현실에는 존재할 수가 없다. 결코 실존할 수 없는 가정은 각축하는 삶의 현장에서 의미를 지닐 수 없다. 정의가 고고하고 아름답고 소망스럽지만 결과적으로 무기력하고 때로는 무의미하게 인간 삶에서 변죽만 울리고 마는 게 다 그래서다. 어쩌면 정의를 말하지 않는 게 그나마 정의로운 상태에 조금 더 다가갈지 모른다. 교황은 평화가 정의의 결과라고 했지만 한국에서는 정의가 오히려 평화를 방해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의는 윤리도덕과는 완전히 차별된다. 윤리와 도덕은 그 사회의 정언 명령으로서 누구에게나 통하는 구속력이 있지만, 정의는 그저 정의라는 말뿐으로 허망하기 이를 데 없다. 실제는 어떨지 몰라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당연한 의무가 도덕률에는 있지만 정의에는 정의로워야 한다는 당위와 예찬만 있지 우리를 구속하는 그 아무것도 없다. 윤리와 도덕은 지키지 않으면 대부분 범법이 되지만 정의롭지 않다고 해서 처벌받는 경우도 거의 없다. 누가 봐도 불의해서 분노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때는 이미 정의의 차원에서 인간 윤리나 도덕률의 문제로 넘어간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것에 분노한다고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인 것에 분노하면서 불의에 대한 분노로 착각하는 게 대부분이다. 결국 정의는 하나의 세계관, 가치관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교황이 평화를 정의의 결과라고 한 것은 소통하고 타협해서 모든 문제를 정치적으로 매듭지으라는 주문이 된다.

 

 

        정치는 가치 배분을 다룬다. 입장이라는 건 결국 가치 배분에 대한 입장이다. 정의는 배분의 문제이고 입장에 따라 상대적이기 때문에 정치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정치의 대상이라 함은 타협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정의가 타협의 대상이 될 때 정의는 불가침의 고고한 위치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다. 특히 배분의 정의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마침내 교황이 말한 정의의 결과는 이해의 균형이고 입장의 조화라는 걸 알 수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게 취약하다. 정치, 경제, 정의, 분배 등 거대 담론에서만이 아니다. 평범한 일상에서도 상대 입장에 대한 배려가 아주 많이 부족한 사회다.

 

 

        정의로운 사회는 소통하고 타협하는 사회다. 그게 평화로운 사회다. 그러기에 정의가 따로 있는 것으로, 실체가 있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이고 심각한 그 무엇으로 해석할 경우 심각한 오류가 생긴다. 논리적 오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삶의 구체적인 고통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묻지 말고 ’정의가 뭐길래‘라고 개탄하는 게 보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이고 인간적이고 유익할지 모른다. 어차피 정의는 독점할 수 없다는 걸 상호 인정하게 되면 이해와 입장이 다른 것에 대한 타협도 그만큼 쉬워질 것이기에 그렇다. 정의는 무거우면 안 된다. 정의를 비즈니스처럼 쉽고 가볍게 그리고 편하게 받아들여야 비로소 교황이 말한 평화가 이 땅에 온다. 비즈니스만큼 소통과 타협이 요체인 곳이 또 있던가. 우리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를 바라기보다 정의가 장사처럼 자유로운 사회를 희망해야 한다.

 

 

 


 정성채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회원
chongsc@m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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