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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관(祭官)을 모면하려는 관리들의 부정 청탁

 

 

 

 

 

2016.8.2

 

 


 

 

김영란법이 최근의 주요 이슈 중 하나이다. 이 법은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이다. 부정 청탁이나 금품 수수 등은 꽤 오랜 역사를 지닌 사회 행위이다. 우리 사회에 이러한 관행들이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지는 이 법이 시행을 놓고 장기 경기 침제를 우려하는 것을 보고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국가 제사에 관한 자료를 찾다보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청탁이나 금품 수수의 모습을 만난다. 의외로 관리들이 제관에 차출을 면하기 위해서 해당 관원에게 청탁을 시도하였다. 조선후기 중앙 정부에서는 1년에 300건이 넘는 제사를 거행하였다. 이러한 제향에 필요한 헌관과 집사자들은 이조전랑(吏曹銓郎)이 관리들 중에서 차출하였다. 그런데 많은 관원들이 이러한 제관의 업무를 맡지 않으려고 하였다. 제관에 차출되면 의정부나 정전(正殿)에 모여 서계를 행하고 대사(大祀)인 경우 7일 전, 중사(中祀)인 경우엔 5일 동안 재계(齋戒)를 해야 했다. 그리고 제향 전 날에는 향소에 나아가 잠을 자며, 새벽부터 일어나 제향을 거행해야 된다. 무엇보다도 향소(享所)까지 먼 길을 이동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이런 부담을 지기 싫어서 이런 저런 이유로 차출을 면하고자 하였다. 정당한 이유가 아니었기에 뇌물이 필요하였다.

 

그런데 차출을 면하려는 관원들은 자신의 돈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자금을 마련하였다. 영조는 구체적으로 ‘공물(貢物)을 다루는 아문의 관원’들이 공인(貢人)에게 침징(侵徵)하여 제관을 변통하게 한다고 탄식하였다. 1787년에 그와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정조는, “풍요한 관사[腴司]는 아래로부터 뇌물을 주어 번번이 모면하지만 쇠잔한 관사[殘司]는 힘 없이 앉아서 제관에 차출되길 수차례 한다”(『祭謄錄』) 라고 하였다. 유사(腴司)와 잔사(殘司)로 구분한 정조의 언설을 통해 관사들의 불평등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리고 뇌물의 자금이 개인의 부가 아니라 직무와 연관해서 생긴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풍요한 관서로는 호조, 선혜청, 사복시(司僕寺) 등이 있었다.

 

한편, 아무리 선혜청 같이 공물을 전담하는 풍요한 관서라고 할지라도 소속 관원들이 매번 제관에서 빠질 순 없을 것이다. 청탁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관 차출에 나아가게 되면 이들과 공인들의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제관에 차출된 관원은 적합한 제복을 갖추고 향소에 나아가야 하는데 이때에 필요한 것들을 공인들에게 요구하였다.

 

공인들은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대신 구입하여 바치는 어용상인들이다. 대동법 이후 백성들은 쌀로써 세금을 바치면 각 관청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필요한 물품을 공인에게 의뢰하여 구입하였다. 공인의 물품 구매자이자 영원한 갑이었던 관서의 관원들은 구매의 대가로 필요한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하며 마치 이러한 외부의 지원이 없으면 공무를 수행하지 못할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관행이 되었다.

 

그렇다면 쇠잔한 관사의 관원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앞서 언급한 듯이 많은 관원들이 제관에 차출되는 것을 좋아하진 않았다. 이러한 현상들은 고위직, 특히 문신들 사이에서 두드러졌기 때문에 권력을 이용하여 차출에서 빠져나갔다. 그들의 빈자리는 잔사의 관원, 무관, 실직이 없는 자, 나이든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들은 정결한 의복을 갖출 여력이 없었으며 먼 길을 도보로 가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시대 국가 제사의 대부분은 국왕의 명을 받은 관리가 섭행(攝行)으로 수행하였다. 이때 제관은 궐내에서 국왕의 서명한 축문을 향(香)과 함께 받아서 향소(享所)로 나아가 제사를 거행한다. 국왕의 서명이 있는 축문은 이를 받들고 가는 신하에게 국왕의 권위를 실어주는 증표이다. 역으로 국왕의 권위는 그의 명을 받은 제관을 통해 발휘될 것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재력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고, 관직을 이용한 금품으로 해결할 것은 더욱 아니다. 1776년에 이종영이란 사람이 향관에게도 국가에서 말을 지급할 것을 건의한 것처럼 공적 업무에 대한 인식과 체계가 필요할 것이다.

 

제사는 국가의 큰 행사였고, 신과의 만남이었기 때문에 성스런 것이다. 너무나 성스러운 것이기에 부정이 많았던 관리들이 감히 제관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권력 아래 있는 사람들을 부리기에 익숙한 사람, 대접받기에 익숙한 사람들의 몸을 놀리기가 귀찮았기 때문일 것이다. 편안함을 버리고 불편함을 감수하며 자기 변혁을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이기에 외부 사람들이 질책과 감시로써 도와야 할 것이다.

 

 

 

이욱_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논문으로〈조선시대 왕실 제사와 제물의 상징: 혈식(血食)·소식(素食)·상식(常食)의 이념〉,〈조상제사의 의미와 기억의 의례화〉등이 있고, 저서로《조선 왕실의 제향 공간 -정제와 속제의 변용》,《조선시대 재난과 국가의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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