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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록위마(指鹿爲馬) 시대, 지식인의 책무와 미래
2016.8.16
장면 하나. “제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에게 “한반도는 물론 세계 각지에서 이념과 종교, 신분과 계층, 세대와 지역의 차이를 넘어 온 민족이 하나로 뭉쳐 불굴의 투지로 이뤄낸 결과… 이렇게 광복을 되찾아, 대한민국을 건국한 선각자들은… 모든 국민에게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고 경쟁과 창의를 촉진하는 나라의 기초를 세웠음”을 확인한 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우리 내부에서는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잘못된 풍조가 퍼져가고… 우리의 위대한 현대사를 부정하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법을 불신하고 경시하는 풍조 속에 떼법 문화가 만연하면서 사회적 비용이 증가되고, 대외 경쟁력까지 실추되고… 타인에 대한 배려와 양보, 신뢰를 바탕으로 하기보다는 불신과 불타협,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들로 사회를 혼란시키는 일도 가중되어 가고 있음”을 지적하며, “어릴 때부터 가치관과 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각자의 재능을 찾아내어 국가발전의 원동력을 만들어 갈 것”을 설파하였다. 또한 “글로벌 경제의 부진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지금 우리 경제는 기업구조조정이라는 또 하나의 커다란 과제를 안고” 있기에 “모두가 ‘남 탓’을 하며 자신의 기득권만 지키려고 한다면 우리 사회가 공멸의 나락으로 함께 떨어질 수도” 있음을 상기하며, “노동개혁은 국가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요소… 우리의 미래세대를 위해서는 물론이고 경제의 고용절벽을 막기 위해 한시도 미룰 수 없는 국가 생존의 과제”이므로 “우리 국민 모두가 자신의 기득권을 조금씩 내려놓고 노동개혁의 물꼬를 트는 데 동참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하는 한편, “이 땅의 평화는 물론,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결코 용납할 수 없음”으로 “사드 배치 역시 북한의 무모한 도발로부터 우리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자위권적 조치”였으며 “국민의 생명이 달려있는 이런 문제는 결코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나는 안다. 한국의 1인당 노동시간이 OECD 2위인 반면 실질임금은 그 평균에도 미치지 못함을.(「오래 일하고 덜 버는 한국.. 아직도 '장시간 노동 2위'」, JTBC 뉴스룸, 2016.8.15.) 한국인 상위 10%가 대한민국 전체 자산의 66%를 보유함에 비해 하위 50%는 단지 1.7%의 자산만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불평등 현상은 나날이 가속되고 있음을.(김낙년, 「한국의 부의 불평등, 2000-2013」, 2015.10.29.) 나는 확신한다. 공동체의 위대한 역사와 현실에 대한 자긍심은 주입된 국정(國定)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실에 입각한[正見] 올바른 비판과 성찰[正思]을 통하고서야 비로소 지녀질 수 있음을. 사회와 경제에 대한 구조적 개선이란 우주의 기운을 모아 개개인의 마음으로 간절하게 염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한 목표와 구체적인 방법을 갖고서 합리적인 제도와 규제를 동원한 뒤에라야 비로소 구현되는 것임을. 그리고 또 나는 피눈물을 흘리며 기억한다. 내 피 같고 살 같은 말간 얼굴들이 그렇게 가라앉아 갔던 차마 입에 올리기도 두려운 참담했던 그 날을. 머나 먼 사막에서나 창궐하던 역병 하나 막지 못 해 삶과 죽음이 마구잡이로 드잡이되던 그 차갑던 여름을. 그 때 우리는 물었다. 국가란 무엇인가. ‘웰빙’이 ‘힐링’이 되고 그도 모자라 ‘헬조선’이 막장으로 치닫는 지금, 매사에 ‘남 탓’을 하며 ‘불신과 불타협, 상대방에 대한 인신공격들로 사회를 혼란’시키는 자가 누구인지를 나는 알지 못하겠다. 이제 다시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장면 둘. 압수된 해머는 가두에서 사용된 것으로 판단되지 않았다.(「법원 “경찰의 민노총 ‘해머’ 압수는 적법 : 해머 실제로 쓰였는진 불분명하지만.. 정황상 압수할 만”」, 연합뉴스, 2016.3.17.) 그 해머 때문에 한 남자가 어느 절로 몸을 피했다. 그 한 사람을 체포하고자 1,200명의 경찰력이 모여들었다.(「‘조계사 한상균’ 놓고 경찰-민주노총 ‘강대강’ 치닫나」, 머니S, 2015.12.9.) 외면인 듯 외면 아닌 외면 같은 승단의 ‘공식적’인 처신과(「조계종 자승스님 ‘한상균 체포 중단 요청’.. 경찰 “내일 정오까지 연기”」, 한국경제TV, 2015.12.10.) 신도들의 ‘거룩한’ 종교적 중립성 주장에(「조계사 신도회, 한상균 퇴거요청 “종교는 중립에 서야.. 범법자 용납 못해”」, 동아일보, 2015.12.1.) 남자는 자진 퇴거해 경찰에 스스로를 내어주었다. 서울중앙지법은 2016년 7월 4일 1심에서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및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된 남자에게 징역 5년 및 벌금 50만원을 선고했다.(「‘민중총궐기’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징역 5년」, 연합뉴스, 2016.7.4.) 압수된 해머가 가두에서 사용됐는지 알 길이 없는 그날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한 농부는 276일째 사경을 헤매고, 책임자의 사과는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눈치 채고 말았다. 수행은 허망하고 기복은 야비하며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가르침은 땅에 떨어져 버렸음을. 이후의 이전투구는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장면 셋. 동지인 줄 알았던 자들이 자꾸 등을 돌린다. 그래, 내가 속았던 거다. 돌이켜 보면 과연 그들은 사회적 이슈의 중대한 고비마다 동의하기 힘든 이상한 발언들을 하곤 했다. 외국인 노동자의 범법 경향에 울분을 토할 때, 김여사와 맘충 들의 진상 짓을 성토할 때, 전도유망한 개그맨의 철지난 말실수쯤은 털어버리자 주장했을 때, 철없는 어린 여가수가 발표한 가학적 쇼타콤 취향의 음원을 비판할 때, 그들을 꼭 프로불편러들의 편을 들어 어그로를 끌며 눈치 없는 어깃장으로 산통을 깨곤 했다. 소위 진보언론이라 일컬어지는 그 신문사들도 따지고 보면 ‘걸레’가 된 지 오래다. 그래도 그렇지. 진보의 마지막 진영인 줄 알았던 저 정당마저 나를, 우리를 이렇게 배신할 줄은 몰랐다. 진보를 자임하는 자들은 필시 진영논리에 빠져 있는 게다. 진영논리, 그렇다. 자세히 알아보지도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덮어놓고 편 가르기에 골몰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이 땅에 진정한 진보는 없다. 생각해 보라. 내가 남자라고 해서 왜 잠재적인 가해자가 되어야 하나. 어떤 정신 나간 인간이 조현병에 걸려 저지른 일에 왜 ‘여혐’이라는 일반론의 딱지를 붙이는가. 여성에 대한 범죄의 비율이 높다고? 범죄율이 낮은 국가일수록 여성에 대한 범죄율이 높다는 것은 통계가 입증하는 바다. 오밤중에도 안전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처럼 안전한 나라가 세상천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미러링은 또 웬 말인가. 살인을 살인으로 응수하면 문제가 해결되나. 결국 똑같은 범죄, 사회가 더욱 어지러워지기만 할 뿐이다. “소녀에게는 왕자가 필요치 않아.” 그 글귀를 문제 삼는 게 아니다. 그 글이 박힌 셔츠를 판 수익금이 남혐과 여성우월주의와 패륜을 조장하는 세력들의 변호 비용에 쓰이는 게 문제라는 거다. 제아무리 ‘세계평화’를 새겨 박은 셔츠라 한들, 그것이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제작된 것이라면 어떻게 사 입느냐는 말이다. 나도 페미니즘을 들여다 본 적이 있어서 아는데, 저들의 주장은 ‘올바른’ 페미니즘이 아니다. 페미니즘 자체의 존재와 필요성을 부인하는 친구들도 있지만, 쯧, 지금 그렇게까지 논의를 확대할 일은 아니고. 하지만 이미 여권이 신장될 만큼 신장된 이 시대에 과연 페미니즘이 더 유효한가는 따져볼 문제이긴 하다. 그런데 참, 진작부터 벌레로 낙인찍었던 녀석들이 이 문제에 관한 한 이렇게 나와 뜻이 맞을 줄이야. 작금의 엇나간 페미니즘 논쟁에 그나마 올바른 소리를 내는 곳이 그 벌레 녀석들을 비호하던 언론이 아닌가. 그래, 새로운 좌우합작인 거다. 패륜과 비상식을 주장하는 일에 있어 전선의 재구축은 불가피하다. 고뇌 끝에 결론을 내린다. 이념좌우 할 것 없이, 미소지니(misogyny)로 대동단결!
오래 전 인간의 성선(性善)함을 믿었다. 인간이기에 너나없이 구비되어 있을 사단(四端)의 존재를 믿었고, 그렇기에 진정으로 겸허한 자리에서 상통될 수 있는 최소한의 상식(常識)을 믿었다. 한 때 대중의 중우성(衆愚性)에 절망하여 플라톤의 철인정치를 심각하게 고려했던 적도 있지만, 민주주의 최대의 적은 계몽군주라!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무렴, 사람이라면 누구나 천리(天理)를 성품으로 분유(分有) 받았고, 그렇기에 끊임없는 신독(愼獨)의 수양으로 성인에게 한걸음씩 가까워질 수 있으리니. 때맞춰 집단지성을 쌓아올릴 훌륭한 수단도 발명되지 않았는가. 인터넷과 SNS를 통하여 인류는 한층 지혜롭고 어질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끝내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남았으니, ‘계몽’의 개념이 바로 그것이었다. 계몽이란 우열의 차별과 소통의 일방성을 전제한다. 하지만 모든 인간과 문화는 저마다의 입장과 전통을 가지고 있으니, 어찌 우열이 있을 것이며 어찌 일방적인 가르침의 주입이 있을 것인가. 허나 그렇다고 해서 명백한 비합리와 반문명을 좌시할 수만도 또한 없을 터. 역시 상대성의 원리요 차이의 인정인가. 그 마지막 문제를 두고 나는 내내 허방거리곤 했다.
이만큼이나마 나이가 드니 사고가 경화(硬化)되고 마음이 편안함에 안주하게 된 것일까. 나는 더 이상 인성의 천부적 선함을 믿지 못하겠다. 내 길지 않은 생의 경험 속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다름이 어찌나 많던지. 설마, 저이는 지금 그릇됨을 알면서도 우기는 걸까. 설마, 진실과 올바름에 대하여 저이도 알고는 있겠지. 믿음은, 믿음은, 배신당하고, 이제는, 더 이상 아닌 것 같다. 아이들은 더 할 수 없이 사랑스럽지만, 슬프게도 그들은 때로 놀라울 만큼 잔인해지곤 한다. 이미 여러 해 전부터 대중화 된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은 또 어떤가. 어떤 사람에게는 원래부터 비어 있는 어떤 부분이 있을 수도 있는 게다. 그것이 생래적 유전적 결핍이든 후천적으로 잘못된 교육과 환경에 기인한 손상이든 간에 말이다. 인터넷과 SNS는 집단지성이 아니라 대중의 중우성을 부채질 할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의(儀) 땅의 현명한 봉인(封人)은 공자를 가리켜 세상의 목탁이 되리라 예언하였다. 치세에 나아가고 난세에 숨는 것이 고금의 지혜라지만, 그 혼돈의 시절 공자께서는 어디 남모르는 곳에 숨어만 계셨기에 그 큰 지혜를 우리에게 남기신 것이랴. 생각해보면 부처가, 소크라테스가, 예수가 그러하셨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줄 모르고 예의와 배려와 규범이 여물지 않던 시절, 그 스승들은 모두 온 힘을 다 해 때론 생명까지 내어 놓으며 어리석은 중생을 가르치지 아니하였던가. 그렇게 조금씩 나아왔던 우리의 문명은 이제 또다시 반동과 야만의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국가가 제 구실을 못 하니 사회가 무너지고 인성이 붕괴된다. 영성(靈性) 잃은 종교 역시 부끄러운 조직의 몸피를 살찌울 뿐. 지식은 불어가되 지혜는 가문다. 무엇이 문제인가. 성찰, 바로 성찰이 없는 까닭이다. 성찰, 그것을 할 줄 모르는 까닭이며, 성찰, 때론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까닭이다.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자들이 외물의 영화와 표피의 이익만을 믿고 좇기 때문이다. 나와 남, 인간과 자연이 본래 하나임을 알지 못한 채, 본질을 잊고 자식세대를 잘못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야만의 시간에 말은 제 길을 잃고 A는 ~A를 호명하고야 말게 되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무지와 아집에 눈이 가려져 사슴이 말 아닌 줄 알면서, 또는 심지어 사슴이 말 아닌지도 모르는 채, 사슴을 말이라 일컫는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시절, 조금이나마 성찰할 줄 아는 자를 지식인이라 칭할 수 있다면, 그의 책무는 성찰할 줄 모르는 자를 가르치는 사람 바로 교사(敎師)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일방적일 공산이 다분한 계몽 작업의 갑(甲)일지언정, 조금이라도 갑을(甲乙) 쌍방의 소통을 돋우며 한 마디씩 또 한 걸음씩 조근조근한 대화로 가르칠 수 있지 않을까. 부처가, 소크라테스가, 예수가 그러하셨던 것처럼.
그렇지만 이 순간 또 다시, 가장 좁은 자리 바로 나 자신에게로 돌아와 되물어 본다. 나는 나 자신을 성찰하는가. 하여 나는 과연 저들을 계몽하며 감히 가르치는 자 될 수 있는가. 다시, 또 다시 돌아와,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 지식인에게 주어진 최후의 과제다.
보족. 목숨을 위협할 듯했던 더위도 위세가 꺾이며 조금씩 살금살금 가을이 오고 있다. 그렇다고 잊을쏘냐. 이내 찬바람이 불어 닥칠지라도, 전기료 제도는 정상화되고 에너지 정의는 실현되어야 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잊지 말자. 냉방기구의 무분별한 사용은 종내 지구를 해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에너지 정의 담론에 물 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다만, 죽지 않을 만큼은 불편을 감내케 할지도 모를 이 염려 또한 가장 좁은 자리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성찰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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