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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정치, 제국주의
2016.8.23
I
광복절에 태국 치앙마이에 있었습니다. 태국과 미얀마 접경 지역에 있는 미얀마 난민촌에 단기 의료팀과 함께 들어갔다가 나왔습니다. 조그만 강을 사이에 두고 태국에는 미얀마 난민촌이, 미얀마에는 난민을 위한 재정착촌이 흩어져 있습니다. 미얀마의 카렌족들은 60년 이상을 카렌민족동맹을 중심으로 자치권을 요구하면서 미얀마 정부에 대해 무장투쟁을 해왔습니다. 카렌족은 미얀마에서는 전체 인국의 7% 정도를 차지하고 있고, 태국에서는 소수민족 중 가장 많은 숫자입니다. 미얀마 민주정부와 카렌족 무장군사집단이 평화협정을 맺은 뒤, 난민들의 미얀마 재정착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단기 방문객의 눈에는 난민의 귀환과 재정착 프로그램의 전개 과정이 그렇게 장밋빛 미래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민족, 종교, 이념, 정치, 자본 등 인간사의 온갖 요소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II.
광복절 전날인 8월 14일에는 태국기독교총회(The Church of Christ in Thailand, CCT)에 속한 개신교회에서 예배를 보았습니다. 태국에는 천주교가 1555년에, 개신교가 1828년에 전래되었으니,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졌습니다. 천주교인과 개신교인을 합해 그리스도인이 태국 인구의 1% 정도입니다. 태국기독교총회는 장로교, 침례교, 회중교회 등 초기선교사들이 교파를 초월해서 세운 하나의 태국교회입니다. 태국복음주의교회, 미국남침례교, 안식교를 제외하고 태국의 거의 모든 기독교가 속한 단일 조직입니다. 제가 방문한 교회는 태국기독교총회 소속 교회였는데, 태국 국적을 가진 카렌족이 모이는 교회입니다.
제가 방문한 날은 태국교회의 어머니주일로 예배 도중에 특별한 순서를 가졌습니다. 예배당에 들어가면서 강단 앞에 놓여있는 태국왕비 사진을 보았습니다. 사진 앞에는 꽃들이 놓여있었습니다. 1979년 이후 8월 12일은 태국의 어머니날이 되었습니다. 그날이 태국왕비의 생일입니다. 국왕의 생일인 12월 5일은 아버지날입니다. 올해는 왕비의 84세 생일로, 12년 주기 간지를 마치는 해로 전국에서 대대적인 생일 축하 행사가 있었습니다.
예배 도중에 진행된 어머니날 특별행사는 왕비 사진 앞에서 왕비에 대한 감사와 장수를 비는 축원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태국의 소수민족인 카렌족 교회에서 태국 왕실을 위한 사진을 보는 순간, 복잡한 느낌과 불편한 느낌이 함께 들었습니다. 유럽의 대성당 안에 있는 왕족의 그림들, 티베트나 부탄의 불교사원 안에 자리 잡은 라마의 사진이나 왕족의 그림들, 한국 사찰에서 간혹 보이는 전임대통령의 영정사진 등의 이미지가 중첩되었습니다. 개신교회, 태국왕실, 소수민족 카렌족, 정교분리 등의 어휘들과 얽히면서, 개신교회당 안에 있는 태국왕비의 사진은 더 크게 각인되었습니다.
III.
미얀마는 다민족 국가입니다, 다수인 버마족과 여러 소수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어 한때는 나라 이름도 버마였습니다. 카렌족은 미얀마 100여 소수민족 중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합니다. 불교국가인 미얀마에서 카렌족은 기독교인 비중이 30% 정도입니다. 굉장히 예외적인 사례입니다.
동남아시아의 국가들과 민족들은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버마는 19세기 후반부터 영국의 식민지 통치를 받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연합군을 도와 일본과 전쟁을 치릅니다. 종전 후 영국이 버마를 다시 통치하려고 하자 이번에는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치릅니다. 영국은 식민지 통치 기간과 독립전쟁 과정에서 버마의 소수민족을 지원합니다. 오랫동안 샴족(태국)과 버마족으로부터 억압을 받던 카렌족은 영국의 분리 통치 정책에 적극 호응합니다. 이후 버마족은 미얀마로 독립을 쟁취합니다. 하지만 식민지 통치와 대일전쟁 과정에서 영국에 적극 협력했던 카렌족은 독립국가의 지위를 얻지 못합니다.
그 후 카렌족은 미얀마 정부에 대해 자치권을 요구하면서 60년 이상의 무장 투쟁 기간을 보냅니다. 미얀마 정부와 평화협정을 맺은 이후에도, 카렌족의 자치문제와 난민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입니다. 식민주의, 민족주의, 자본주의에 종교문제까지 함께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미얀마 독립 후, 미얀마 지배층의 시선에 카렌족은 어떻게 보였을까 궁금합니다. 태국 난민촌에서 태어난 무국적 난민인 카렌족 젊은이들의 장래가 걱정됩니다. 광복절에, 제 머리 속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친일부역, 재일한인들의 문제들이 카렌족의 미래와 중첩됩니다.
IV.
개인적으로 카렌족은 왜 그렇게 기독교인 비율이 높은지 그 까닭이 궁금했습니다. 1824년 이래 영국이 미얀마를 침공했을 때 기독교 선교사들도 함께 미얀마에 들어옵니다. 카렌족의 기독교 수용은 자신들의 오랜 구전 신화인 ‘황금의 책’과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황금의 책’ 내러티브는 18세기 후반, 19세기 초반 무렵 카렌족 사이에서 메시아의 도래를 희망하는 신화로 널리 퍼집니다. 그 핵심은 “카렌족이 잃어버린 약속의 책인 ‘황금의 책’을 ‘백인’이 가지고 오면 카렌족은 고난에서 벗어난다.”는 내용입니다. 이야기의 구조가 약간 다른 두 버전은 대략 이렇습니다.
버전 A: ‘유와’(Y'wa또는 Yuwah)라는 창조주가 카렌족과 백인을 만들었다. 유와는 이들을 위해 일곱 가지 나무를 만들어 두었지만, 그중 한 가지는 먹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카렌족과 백인형제는 악마에게 속아 먹지 말라던 나무의 과실을 먹고 나서 죽음과 슬픔, 질병과 고통을 겪게 됐다. 유와는 이들을 안타깝게 여겨 한 권의 책을 나눠준다. 카렌족은 책을 읽을 수가 없어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하지만 백인형제는 노력 끝에 책을 읽는 비법을 터득해 배를 타고 서쪽으로 건너가 새로운 국가를 건설했다. 카렌족은 이때부터 비극이 시작됐다고 믿으면서, 언젠가는 백인형제가 책을 가지고 돌아와 자신들을 구원해주리라고 생각했다.
버전 B: 카렌족 조상에게는 7명의 자녀와 함께 삶을 평화롭게 유지시켜주는 ‘황금의 책’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총명해서 마을 주민들을 결집하던 막내가 사라져버리고, 막내를 찾아 나섰던 형제들은 그 책마저 잃어버리게 되다. 카렌족은 그때부터 가난과 힘든 삶을 살게 됐다고 생각한다. 세월이 흐르고, 세계를 떠돌다 책의 지식과 함께 경험을 축적한 막내가 다시 나타났다. 마을사람들은 막내를 다시 따르지만 가난에서는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다. 막내는 숨을 거두면서 언젠가 하얀 얼굴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 부족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말한다. 그때부터 카렌족은 하얀 얼굴을 가진 사람을 기다리게 됐다.
버마와 태국사이에 전쟁과 억압에서 시달리던 카렌족은 선교사를 신화 속에 나오는 ‘백인형제’로 믿고, 그들이 들고 온 성경을 ‘황금의 책’으로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카렌족 사이에서 선교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초기 기독교처럼 집단적이고 폭발적인 개종이 카렌족 마을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들이 영국과 협력해서 버마족에 항거하고 일본과의 전투에 참여하게 됩니다. 백인과 그리스도교는 후원자나 구원자의 역할을 하고, 카렌족은 이들과의 협력 속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벌여 신화의 꿈을 현실에서 실현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황금의 책’ 내러티브는, 신화 밖의 현실 세계 속에서 카렌족의 역사적 진로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난민촌에서는 백인과 그리스도교로부터 오는 구호품을 통해 ‘황금의 책’ 내러티브가 여전히 유통되고 있습니다.
V.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관과 더불어 세계교회도 카렌족 난민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와 NGO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들이, 카렌족이 가진 신화와 역사를 이해하고 있는 지, 나아가 동남아시아에서 벌어진 민족과 왕조, 문화와 역사 사이에 얽힌 복잡한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고 있는 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이들의 미래를 고민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확신하기가 어렵습니다. 카렌족의 그리스도교의 수용의 역사는 상당히 독특한 형태의 식민주의 유형을 보입니다. 현재 한국 개신교의 미얀마와 카렌족에 대한 관심이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에서 또다른 형태의 식민주의로 진행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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