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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파고스 증후군’과 한국개신교회의 관용      

 

 

news  letter No.488 2017/9/19

 

 

 


       갈라파고스가 있다. 에콰도르 땅으로 남미 해안에서 926킬로 떨어져 있다. 19개 섬으로 구성된 제도인데 전체 면적이 전라북도만하다. 갈라파고스는 다윈으로 인해 유명해졌다. 갈라파고스가 대륙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고유종 생물이 많다. 탐사선 비글호에 탄 다윈은 이들 고유종으로부터 진화론에 대한 통찰을 얻었다.


       ‘갈라파고스 증후군’이 있다. 자국 시장만을 염두에 둔 제품을 만들어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본 기업들이 만든 휴대전화가 국내 소비자 취향만 따르다가 세계 시장과 단절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처음 쓰였다. 세계를 선도하던 일본 휴대전화가 ‘고립’되고 ‘단절’된 갈라파고스의 고유종처럼 된 상황을 빗댄 것이다.


       ‘갈라파고스 증후군’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동종교배나 순혈주의를 강조하는 조직, 그것이 학교건 회사건, 심지어 교회건 그 증후군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한국 개신교회는 갈라파고스 신드롬이 중증 상태로 보인다. 주변과 이웃에 대한 고려나 배려 없이, 차별과 배제를 통해서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을 정통으로 규정하는 한국 개신교의 행태는 중증 상태다.


       올해는 종교개혁 500주년 되는 해이다. 올 한해 한국 개신교는 한국 사회에 풍성한 담화거리를 제공했다. ‘창조과학’을 신봉하는 장관 후보자, 목회자의 교회 내 성폭력, 교회 내 성 불평등, 동성애, 교회 세습, 목회자의 재정 유용, 종교인 과세 등 한국 개신교는 관심과 화제를 불렀다. 2017년 9월 18일부터 한국 개신교는 각 교단별로 총회가 열린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 개신교회의 교단에게 올해 총회가 갖는 의미와 무게는 각별하다. 그러나 이들 총회의 모습은 개신교의 분리와 고립을 더 강화시키는 듯하다. 여성안수를 주지 않는 교단, 목회자 성폭력이 심각한 문제가 된 교단, 성차별이 당연시되는 교단의 총회는 여성이나 성 평등을 위한 안건이 하나도 없다. 한 초대형 교회의 세습 시도가 문제인 교단은 ‘세습 금지는 기본권 침해’라고 세습방지법의 개정을 시도한다. 동시에 차별금지법과 동성애, 종교인 과세에는 한 목소리로 반대한다.


       한국개신교의 ‘구별’과 ‘배제’와 ‘차별’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인구의 4분의 3이 비개신교인인 한국 사회에서 공감과 동의를 얻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한국 개신교인의 배제와 차별의 행태는 ‘갈라파고스 증후군’의 표출이다. 이 ‘갈라파고스 증후군’은 갈수록 정신적으로, 행태적으로 편집증적 증상을 보이면서 고립과 단절을 강화하고 있다. 갈라파고스가 전라북도만한 땅이니, 얼마의 그리스도인들끼리 따로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19개 섬에서 서로 단절되고 고립되어... 하지만 그 갈라파고스에서 어찌 창조세계를 하나님의 나라로 실현할 수 있겠는가.


       종교개혁의 기본 정신은 ‘관용’으로 귀결된다. ‘관용’은 그 기원이 가톨릭과 개신교의 신앙의 차이에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서 생겨났다.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의 분열은 서로 악으로 규정하고 상대를 부정하면서 종교분쟁을 넘어서 종교전쟁으로 확산되었다. 프랑스에서 1572년 ‘성 바돌로메 축일’에 가톨릭교도들이 개신교도들 삼천 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비극 이후 종교적 정당성이라는 이름 아래 벌어진 집단 광기와 잔인한 인간 행위에 대한 반성이 시작되었다. 1598년 앙리 4세는 낭트에서 종교 자유를 위한 칙령을 공포했다. 이 ‘낭트 칙령’은 프랑스의 개신교도인 위그노에게 종교의 자유를 광범위하게 부여한 것으로, 예배의 자유와 완전한 시민권을 허용했다. 신앙선택의 자유와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똘레랑스’의 시작이었다. 프랑스판 ‘차별금지법’이 시작된 것이다.


       종교다원주의 사회에서 ‘관용’은 자명하다. 관용은 동의하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감내하거나 복종해야만 하는 그런 원리가 아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 ‘관용’은 신앙의 핵심 지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에게 관용은 동의할 수 없는 것, 반대하는 것에 대해 무관심이나 무기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차이와 다름을 존중하는 것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신앙을 실천하는 행위이다. 이렇게 관용이 소중히 가꾸어야 할 핵심적 가치인 것은 ‘창조세계가 갖는 다양성’과 ‘모든 존재가 하나님에게 관용 받는 존재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차이와 다름을 용인하는 ‘관용’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이것들을 차별과 억압, 배제의 근거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차별과 억압, 배제를 가능케 하는 개인적, 사회적, 제도적 장애를 제거하는 노력을 요청하는 것이다. 차별과 배제를 넘어서서, 그런 것을 가능케 하는 제도와 구조를 철폐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가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어서 관용이 아니라, 관용을 통해서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관용’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그것이 종교개혁 정신으로 오늘 다시 살아가는 것이다. 한국 개신교인은 과연 그런 그리스도인들인가?

 

 

 


신재식_
호남신학대학교 교수
저서로 《예수와 다윈의 동행》,《종교전쟁》(공저) 등이 있고, 논문으로 <그리스도교에서 본 마음과 몸: 정경을 중심으로>, <한국개신교의 현재와 미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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