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달 이야기: 고(故) 황선명 선생님을 기리며
news letter No.848 2024/9/17
종교와 신화 속에서 달의 지위는 통상 태양숭배 아래에 위치한다. 그러나 양면성 혹은 ‘반대의 일치’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달은 태양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변화무쌍한 의미를 보여준다. 달 이미지는 시공간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대체로 양면성을 띠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령 타일러의 《원시문화》에 의하면, 브라질의 보토쿠도족은 천체 가운데 달에게 최고의 서열을 부여하는데, 달이 천둥과 번개를 내리며 채소와 과일의 흉작을 야기하고 심지어 때로는 땅에 내려와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만든다고 믿었다. 달은 친절한 신으로도 혹은 사악한 신으로도 등장하며, 출생과 생육의 신이거나 또는 파괴와 죽음의 신이기도 하다. 예컨대 달은 이슬, 비, 조수 등과 결합하여 식물의 생장을 촉진하거나 재앙적인 홍수를 초래하는 원인으로 여겨진다. 통상 차는 달은 길조로, 그리고 기우는 달은 위험한 흉조로 간주된다. 인도 벵골만의 안다만섬에서 차는 달은 남성이고 기우는 달은 여성으로 말해진다.
이처럼 달은 남성신 혹은 여성신으로 인격화되지만 흔히 대지, 물, 생명력 등을 상징하는 여성성과 결부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융학파의 달 신화학자 에스더 하딩에 따르면, 대부분의 신화가 달을 여성화하는 것은 달이 풍요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달의 여성성은 달 주기와 여성의 생리 리듬이 일치한다는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여성의 생리는 ‘달거리’라든가 ‘월경(月經)’이라 불려진다. 영어의 ‘멘스(menstruation)’도 ‘달의 변화’를 뜻하는 말이다. 특히 동양인들에게 달의 여성성은 친숙한 관념이다. 《설문해자》는 달을 “커다란 음의 정수”으로 적고 있으며, 《여씨춘추》도 달을 “모든 음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음은 무엇보다도 여성적인 달의 ‘촉촉한’ 우주적 에너지이다.
중국의 항아(嫦娥)신화에 의하면, 항아는 남편 예(羿)가 서왕모에게서 받아온 불사의 약을 훔쳐 달로 도망가는 바람에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달에는 불사의 약이 있다. 주기적으로 이지러졌다가 다시 차오르는 달의 외관은 죽음과 재생의 사이클을 연상시킨다. 불사의 약이 달에 있다는 생각은 달이 우주적 에너지와 생명력을 잉태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순환하기 때문에 불멸성을 지닌다고 여긴 원시적 관념에서 비롯된 신화적 상상력의 산물일 것이다.
수메르의 달의 신 난나는 대기의 신 엔릴의 아들로 우르시의 수호신이다. 앗시리아는 이 달의 신을 신(Sin)이라 부르며 숭배했고 유프라테스 지역에 달의 도시 하란을 세웠다. 이런 달 숭배는 기원전 6세기 초 바빌론시대에도 이어졌다. 가나안에서 달의 신은 야리흐(Yarih)라 불렸다. 《창세기》에서 모세의 백성들이 숭배했다고 나오는 금송아지는 달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며, 시내산이 그 고향이었음에 틀림없다. 난나의 딸 이슈타르는 머리에 초승달 모양의 뿔이 달린 형상을 하고 있다. 조셉 캠벨은 이슈타르가 인도의 칼리여신이나 이집트의 이시스여신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여신이자 동시에 파괴의 여신이기도 하다고 보았다.
뿔의 형태가 초승달과 비슷한 황소, 다산(多産)의 토끼, 죽음과 재생을 상징하듯 겨울잠을 자고 깨어나는 곰, 숨었다가 다시 나타나는 모양이 달과 비슷한 달팽이 등, 신화속 달의 동물은 다양하다. 이밖에 일본의 고대신도에서 달의 신은 여우의 형태로 숭배되었다. 또한 거미로 표상된 달은 인간의 운명을 짜는 운명의 신으로 여겨진다. 한편 항아는 불사의 약을 훔친 일로 인해 벌을 받아 추한 두꺼비가 되어 달에 살고 있다고 여겨졌다. 참고로 예이츠는 희극 《고양이와 달》에서 고양이를 “달과 가장 가까운 종족”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많은 종교의식에 사용되는 황홀경의 약물은 달에서 떨어진 것이라고 말해진다. <리그베다>에 따르면 고대 인도의 소마신은 달의 신이었다. 시바신은 이마에 초승달 모양의 장식을 하고 있다. 초기의 <우파드샤드>에 의하면 사후 영혼은 달을 거쳐 환생한다. 이란의 마니교 교의에 따르면, 생전에 진리를 터득한 자들의 영혼은 태양의 바퀴에 도달하여 거기서 정화된 후 더 높은 위상으로 묘사된 달을 향해 계속 나아간다. 한편 플루타르크에 의하면 사후 인간의 몸은 대지모신 데메테르에 의해 해체된다. 혼은 이성과 함께 위쪽으로 날아간다. 이때 순수한 혼은 지하 세계의 여왕 페르세포네가 지배하는 달로 간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는 지상에서 사냥을 관장하고 처녀를 수호하는 여신인데, 하늘에서는 만물을 생육하고 번성시키는 셀레네로, 그리고 지하세계에서는 어두운 밤의 여신 헤카테로 나타난다. 에스더 하딩에 따르면, 아르테미스의 처녀성은 성적 순결성이라기보다는 “누구의 배우자로도 소속되지 않는” 정신적 주체성을 의미한다. 이 밖에도 아르테미스는 신시아, 포이베, 루치나, 다이애나, 루나 등 별칭이 많다. 이 중 달을 뜻하는 라틴어 루나(luna)는 ‘광인’을 뜻하는 말(lunatic)의 어원에 해당한다. 달은 곧 광기의 달인 셈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는 저주받은 인간이 만월에 노출되면 고통스러운 변신을 거쳐 늑대인간 곧 달빛의 영향을 받아 미쳐버린 광인에 대해 적고 있다.
또한 《변신이야기》는 달의 여신 다이애나와 사냥꾼 악타이온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해준다. 다이애나가 사냥을 마친 후 동굴에서 목욕하고 있을 때, 악타이온이 우연히 이 장면을 엿보았다. 이에 격분한 다이애나가 악타이온을 사슴으로 만들고, 결국 악타이온은 자신의 사냥개들에게 물려 뜯겨 죽는다. 라캉에 따르면 다이애나의 나신은 궁극적인 진리를 상징한다. 악타이온이 다이애나의 나신을 우연히 훔쳐본 것은 다이애나가 숨기고자 한 것, 즉 죽음으로서의 궁극적인 진리와의 대면을 의미한다. 진리는 결코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유하고 싶은 욕망의 대상으로 부상한다. 결국 달은 죽음과 진리와 욕망의 삼각형을 상징한다. 악타이온이 그랬듯이 삶의 궁극적 진리는 우연한 순간에 우리를 찾아온다. 이때 라캉은 특히 악타이온의 죽음 방식에 주목한다. 자신이 키우던 사냥개에 의한 그의 죽음은 외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는 바로 자신의 생각 혹은 스스로 만들어낸 욕망과 죄의식의 먹이가 된 것이다. 달의 여신이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이와 같은 라캉의 통찰력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뉴턴은 “사과는 떨어지는데 왜 하늘의 달은 떨어지지 않는지”를 물었다. 이를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과학 담론을 떠나 라캉의 신화적 상상력으로 다시 읽어보자. 뉴턴의 사과는 선악과이고, 사과가 떨어지는 것은 타락을 암시한다. 한편 달은 욕망의 대상인 어떤 진리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저 멀리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하늘에 떠 있다.
문학 속의 달은 종교와 신화 속의 달과 겹치면서 동시에 정한(情恨)을 통해 그것을 넘어선다. 가령 “달하 노피곰 도다샤”로 시작되는 백제 가요 <정읍사>는 남편의 여행길을 걱정하는 여인의 절절한 정한을 잘 드러낸다. 이에 비해 “달하, 이제 서방꺼정 가셔서 無量壽 佛前에 일러다가 사뢰소서.”라고 기원하는 신라의 <원왕생가>에서 달은 사바세계와 극락세계를 왕래하는 신적 존재를 가리킨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하나의 달(王)이 천 개의 강을 비춘다는 ‘월인천강(月印千江)’의 장엄미에서 백자 달항아리의 고졸미에 이르기까지 달의 미학이 하나의 고원에 도달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달을 매개로 한 조선 시조의 정한은 현대시로 이어져 ‘설움’, ‘체념’, ‘이별’, ‘외로움’, ‘그리움’, ‘기다림’ 등으로 표상화되고 있다.
한편 중국의 시성 이백은 <파주문월(把酒問月)>에서 “지금 사람들은 옛날의 달을 보지 못했으나, 지금 저 달은 옛사람들을 비추었으리라. 옛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흐르는 물과 같지만, 함께 밝은 달을 보며 모두 이와 같았으리라.”며 달의 불멸성을 노래했다.
“어둠 속에서 어두운 길로 들어섰구나. 제발 저 산 끝에 걸린 밝은 달이 나를 인도해 주기를.” 이는 헤이안시대의 가인 이즈미 시키부(和泉式部)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와카(和歌)이다.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운명을 어두운 밤 산길의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여행자의 모습에 비유하면서, 인간의 운명을 이끌어 주는 초월적 존재로서 달을 묘사하고 있다. 이에 앞서 《만엽집》은 “세상에 무상의 이치를 알려주기 위해 달은 찼다 이지러졌다 한다네.” 라고 노래했다. 일본의 와카에서 달은 깨달음, 불성, 불변의 존재, 초월자뿐만 아니라, 연정, 원망(怨望), 우수, 비애, 향수, 호색적인 남성 등 다양한 정취를 환기시킨다.
서구의 경우 달의 여신이 상기시키는 천상적인 아름다움의 치명성은 낭만시 이후 달의 여성성의 가장 보편적인 상징성으로 자리잡는다. 가령 키츠의 <성 아그네스의 전야>에서 달은 금지된 사랑에 빠져드는 인물들의 우울과 광기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나온다. 워즈워스는 <루시 시편들>에서 소녀 루시의 죽음을 알리는 장치로 달빛을 등장시킨다. 코울리지는 <노수부의 노래>에서 노수부가 길조(吉鳥)를 쏴 죽일 때 달빛이 쏟아지는 밤바다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보들레르는 <달의 선물>에서 달이 ‘빛나는 독약’과 ‘광기에 물들게 하는 향수’로 시인을 유혹한다고 묘사한다. 또한 <달의 슬픔>에서는 ‘권태에 지쳐’ 지구 위로 흘려보낸 ‘달의 눈물을 태양의 눈이 못 비치는 먼 곳 가슴 속에 간직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소설 작품 속의 달은 어떨까? 달의 여신 항아와 명궁 예 부부의 신화를 다시 엮은 노신의 소설 《분월(奔月)》에서 달은 항아의 배신행위와 맞물리며 비인간적인 잔인함과 비정함의 정서를 수반한다.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이라 말해지는 노신의 《광인일기》는 선각자로서의 광인을 등장시킨다. 이 광인의 자각은 달빛에 의해 이루어진다.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에서도 달은 아름다움을 동경하는 예술가의 광기어린 꿈과 이상의 세계(聖)를 상징한다. 그것은 물질과 실용의 가치를 추구하는 세속적 현실세계(俗)의 상징인 ‘6펜스’와 대비된다. 이에 비해 궁극적 실재와 하나가 되고자 하는 한 영적 구도자의 탐색과정을 《장자》에 나오는 붕(鵬)의 비상에 빗댄 종교철학자 김사라의 장편소설 《마야의 달》에서 달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 곧 진리를 암시한다.
이상의 장황한 기술은 고 황선명 선생님이 남기신 소설 《달과 전쟁》을 말하기 위한 일종의 무대장치였다. 이 작품은 6.25전쟁기에 이승만 비서의 아들 경수와 그의 누이동생 경임 그리고 인민군 군악대장 최대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전쟁이야기이면서, 그에 앞서 무엇보다 달의 이야기이다. 달에 초점을 맞춘 3부(정릉의 달, 카르파티아의 달, 낙동강의 달)로 이루어진 작품구성은 이 점을 뒷받침한다.
제1부(정릉의 달)의 핵심은 경수와 좌익 해방전쟁에 투신하려는 그의 어릴 적 절친 현석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대립구도에 있다. 달밤, 둘의 만남이 마지막이 될 것임을 예감한 현석은 경수에게 월광소나타를 틀어달라고 요청한다. 달이 불어로는 여성명사(라 륀느)이지만 독어로는 남성명사(데어 몬트)임을 현석에게 상기시키는 경수는 “달 하면 매우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로맨틱한 정서를 은유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며 “북구에서는 달이 암흑과 전쟁에다가 파괴와 재앙을 은유”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나아가 경수는 월광소나타 3악장이 ‘달의 파괴력’을 상징한 것이라고 하면서 “달빛 흐르는 밤이 아름답다고? 저건 사신의 냉혹한 미소야. 저건 잔혹한 저주야. 죽음의 암시야. 그래, 그래, 저주의 달이야.”라고 외친다. 그 저주의 달은 공산혁명의 살육과 파괴와 죽음을 암시한다. 현석이 그런 저주의 달은 ‘역사의 진보’를 위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자, 경수는 “진보란 한낱 허구에 불과”하다고 반론한다. 현석이 떠난 뒤 미군폭격기가 서울을 공습할 때 작자는 경수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은 상념을 토로한다.
“어째서 나와 내 가족은 물론 대다수의 서울 시민이 저 미군폭격기를 야만적인 전범의 잔학한 파괴행위라고 하지 않고 승리를 담보하는 정의의 십자군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달이 뜨지 않은 이 캄캄한 밤에 우리식구 일가는 오히려 희망을 읽을 수 있을지 모른다. 폭력기들이 저렇게 폭탄 세례를 퍼부어 공산군을 북으로 밀어 보내야만 우리 일가는 아버지의 환도와 더불어 가족들의 재회를 기약할 수가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지구의 반대편 어디에서 밤의 고즈넉함과 더불어 연인의 부드러운 손길처럼 삼라만상을 어루만져 주고 있는 자비로운 여신인 달은 며칠 후 조선반도의 하늘에서 그 냉혹한 죽음의 미소를 흘리는 ‘저주의 달’로 떠오를 터이다.”
《달과 전쟁》 중에 가장 서사적 완결성이 높고 기이한 이국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제2부(카르파티아의 달)는 인민군 군악대장 최대위의 과거가 중심을 이룬다. 정릉천에 빠진 경임을 구해준 최대위는 그 우연한 사건뿐만 아니라 인민의 용군에 끌려가게 된 경수를 군악대 요원으로 빼내어준 일을 계기로 점차 경임의 마음을 얻게 된다. 그는 부대 이동에 즈음하여 경임에게 금십자가를 선물로 주고 떠나갔다.
고려인 출신인 최대위의 러시아식 이름은 푸가신 디미트로비치 초가이, 일명 푸가치이다. 그는 1943년 늦여름 소련 우랄지구 스베들로프스크역에서 그를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시키고자 동행했던 어머니와의 이별을 강제당한 후, 제7 돈 코사크 경보병사단 기병연대 나팔수로 배치되었다가 키에프 탈환을 위한 드네프르강 도하작전의 돌격대원(전차파괴 돌격조)에 선발되어 혁혁한 공을 세운다. 같은 돌격조의 상관인 연상녀 그루코바(본명 갈랴)는 푸가치의 활약 덕택에 대위로 승진하여 스메르쉬(붉은 군대의 방첩정보부대)에 배치되었고, 푸가치를 정보요원으로 발탁하는 한편 그에게 애인이 되어줄 것을 강요한다. 어느 날 푸가치는 스메르쉬에서 고문받다 졸도한 한 아름다운 여성을 사단 의무중대로 이송하라는 명을 받는다. 그녀는 서우크라이나 자치정부 부수상 내정자의 딸 소니아로, 유명한 의과대학 상급반 학생이었다. 푸가치와 소니아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후 포탄 파편에 심한 부상을 입고 서우크라이나 지역 붉은 군대 통합병원으로 후송된 푸가치는 그곳에서 간호사가 된 소니아와 재회한다. 소니아에게 반한 푸가치는 그녀를 강제로 자기 여자로 삼고 그녀 집안의 가보인 금십자가를 빼앗았다. 하지만 둘의 정사가 발각되면서 푸가치는 소니아를 직접 처형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그 처형장이 바로 보름달이 뜬 카르파티아 계곡이었다. 카르파티아는 폴란드, 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 서부, 루마니아에 반달 형상으로 걸쳐있는 아름다운 산맥이다. 여기서 작자는 다시 한 번 저주의 달을 언급한다.
“오, 너 잔인한 달이여! 오늘 이 밤에 너는 이 카르파티아 계곡에 죽음의 미소를 흘리고 있다. 너의 잔혹한 사신(死神)의 미소를...달밤이란, 아니 달이란 흔히 말하듯이 황폐한 심혼을 어루만져 주는 여인의 부드러운 손길이 아니다. 그것은 상처받은 폐부를 저미는 날카로운 단검이다. 그것은 저주의 달이다.”
카르파티아의 달이 푸가치의 악몽이 되어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가운데, 그는 장교로 승진하여 소련해방군의 일원으로 1945년 8월 17일 평양에 이른다. 그 후 푸가치는 삼팔선 인민경비대 옹진 파견대장으로 근무하게 된다. 그 무렵 1946년 음력 5월 누군가 보름달이 뜬 밤에 월남하다 총살당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해 푸가치는 “세상에 지도에 쳐져있는 금을 넘었다고 사람 쏴 죽이는 민족은 처음 봤소. 그 금이라는 게 자기들끼리 의논해서 약정한 게 아니지 않소. 소비에트하고 미국이 그런 게 아니요? 그런데 그 금을 조금 넘었다고 사람 죽이고서 그걸 가지고 반동이니 어쩌니 하는 카레이스키 당신네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요?” 라고 강하게 반문한다.
제3부(낙동강의 달)는 다시 6.25전쟁기로 돌아간다. 경임이는 강제로 의료지원단에 배속되어 간호사로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는데, 거기서 위문단과 함께 온 최대위와 재회하여 밤마다 밀회하기에 이른다. 어느 날 달밤 최대위는 경임에게 “달이 그렇게 차듯이 조선사람은 그렇게 서로가 차게 대하지 않소? 죽이고 자신도 죽고 말이오...달빛은 죽음을 뜻하오.”라고 말한다. 소비에트 군사고문단 소속의 최대위는 미군전차 파괴 작전(일명 섬돌개 작전)에 참여하게 된다. 이때 그는 무전 암호로 섬돌개 작전 정보를 미군 쪽에 넘기고 투항할 뜻을 전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에 앞서 최대위는 경임을 낙동강 건너 안전지대로 보내고자 노력했으며, 헤어지기 전에 그는 소니아와 닮았다고 여긴 그녀에게 금십자가를 건네주었다.
작가는 소설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소설은 우리 가족이 겪은 6.25의 참상을 기록한 전쟁의 체험기는 아니다. 단지 한 젊은 인텔리 여성이 당하는 수난의 영상을 배경에 깔면서 어쩌면 그것이 민족 심성의 그늘진 구석인지도 모를 잔혹성과 가학적인 본성을 파헤쳐 보고 싶었을 뿐이다. 더불어 야만적인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회기성에 그치는 게 아니라 민족사에 두고두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고 보기 때문에 본문에서 ‘저주의 달’을 되뇌였다...인간 본성에 잠재하는 그 악마적 소성이 왜 하필이면 1950년에 접어든 신생공화국을 덮쳤는가에 대한 의문이 항상 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느라 이십여 년간 이 소설 쓰는 데 매달려 왔었던 것을 이 자리에서 고백하고자 한다.”
종교학자로서 작가는 달 상징의 양면성을 잘 알고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작가는 달의 양면성 가운데 전적으로 파괴와 죽음으로서의 달에 조명을 집중시켰다. 위 후기는 왜 그래야만 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그렇다고 해서 달의 적극적인 의미가 사상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오히려 보이지 않는 달의 이면, 그 어둠 속에서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을 읽고 싶어 한 듯 싶다.
신화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저서 《달의 이면》에서 신화의 보편성에 대한 신뢰에 입각하여 일본 신화와 아메리카 원주민 신화를 한통속으로 묶으면서 일본 문명의 세계사적 의의를 천명하고 있다. 하지만 거기서 레비스트로스는 가해자로서의 제국주의 전력을 가진 일본과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철저히 문화와 역사를 말살당한 피해자로서의 아메리카 원주민을 동일한 잣대로 바라보는 범주적 오류를 범했다. 혹자는 가족주의적 욕망에 토대를 둔 반공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달과 전쟁》에서도 6.25전쟁에 관한 서술에서 이와 유사한 범주적 오류를 읽어낼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달의 이면을 매개로 죽음과 욕망과 진리의 소설적 공모관계를 그려내고자 한 작가에게서 종교학자의 문학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박규태_
전 한양대학교
저서로 《한과 모노노아와레: 한일 미의식 산책》,《현대일본의 순례문화》,《일본재발견》,《일본정신분석》,《일본 신사의 역사와 신앙》,《포스트-옴시대 일본사회의 향방과 '스피리추얼리티'》,《일본정신의 풍경》 등이 있고, 역서로 《일본문화사》,《국화와 칼》,《황금가지》,《세계종교사상사 3》 등이 있다.
'뉴스 레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850호-우리의 이상한 말 습관 넷 (5) | 2024.10.01 |
---|---|
849호-우리는 저마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를 지으며 산다 (6) | 2024.09.24 |
847호-요가는 종교인가? (3) | 2024.09.11 |
846호-의롭고 충성스러운 노비 (8) | 2024.09.03 |
845호-도교는 언제 시작되었나? (0) | 2024.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