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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850호-우리의 이상한 말 습관 넷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4. 10. 1. 18:46

우리의 이상한 말 습관 넷

 

 

news letter No.850 2024/10/1

 

 

 

요즘 우리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투 때문에 나는 때로 괴이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거북한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그런 말 습관을 살펴본다. 첫째는 경우에 도무지 맞지 않게 높임말을 남발하는 것이다. 이런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어떤 이가 길을 가고 있는데, 느닷없이 괴한이 나타나 뒤통수를 후려치고 사라진다. 그러자 그는 뒷머리를 어루만지며 누가 갑자기 내 머리를 때리고 가셨어요.”라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다. 욕은 못 한다고 하더라도, 왜 그는 평어체가 아니라 높임말을 쓴 것일까? 그런 그가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런 이가 드물지 않고, 여기저기 많이 보이는 것이 심상치 않다. 한글의 높임법에서 중요하며, 존경의 뜻을 지닌 가 마구잡이로 사용되고 있다. 접미사 도 마찬가지다. 욕설과 애칭의 역설이 섞인 새끼라는 말은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고 놈 자()”에 비하하는 뜻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라든지 그 남자, 그 여자라고 평어체로 말하면 적절한 경우에도 접미사 이 남발된다. 어떤 이가 파렴치한 짓을 저질러서 그의 인간성에 분노하고 있을 때, 옆 사람이 그분이 어찌 이런 일을 하셨을까요?”라고 거드는 말을 들으면 나는 그까지도 무염치한 부류에 집어넣고 싶어진다. 평소 소중한 이에게만 을 아껴 사용하던 내가 모욕을 받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둘째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기습하듯이 나를 자기 가족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휴대폰 매장에 들렀더니, 거기 직원이 나를 부르는 호칭이 다짜고짜 아버님이다. 얼떨떨하다. 한때 남발되던 사장님이라는 호칭 대신, 요즘 이게 대세다. “아저씨, 아주머니라고 불리면 싫어한다더니, 그런 세태여서 그런가 보다 한다. 그래도 그런 호칭으로 부르는 그가 낯설어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된다. “언제 이런 자와 가족으로 묶이게 되었지?” 하며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또 이런 일도 있다. 음식점에 가서 주문받는 이를 기다리고 있는데, 주위에서 이모, 고모라고 하면서 부르는 소리가 화기애애하다. “아가씨나 아줌마로 부르거나, “여보세요라고 부르는 일이 거의 없다. 이렇게 가족적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연출되는 것을 보면서, 거기서 뭐라도 잘 얻어먹으려면 나도 그 일원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옆구리로 푹 찔러오는 느낌이 든다.

유사 가족 만들기는 이뿐만이 아니다. 반려견의 이름을 선이라고 알려주었더니 오늘 처음 본 이웃 사람이 나의 정체성을 선이 아빠라고 명명한다. 이제까지 나는 선이를 내 자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선이의 생애적 리듬을 고려한다면, 그는 나와 함께, 그리고 나보다 빨리 죽음으로 달려가는 동료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초면인 이웃 사람이 선이가 쌓아 올린 세월의 나이를 무시하고 느닷없이 어린애로 만들어버린다. 모두 인간종()의 가족으로 모든 것을 치환하려는 환원주의의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셋째는 소속한 조직의 직책 명칭을 끔찍이도 각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마치 관직이나 사기업의 직장의 실장, 부장, 과장, 팀장, 대리 등의 위계제 명칭이야말로 소속원은 물론, 그 조직과 관계없는 이들도 언제나 존중해야만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한 번 그 직책에 있었으면 직책을 떠나더라도 계속 그 명칭으로 불러주는 것이 공경함의 표시라고 간주한다. 특히 ()” () 붙은 직종의 경우, 그 종사자들은 자나 깨나 자신들의 자격증을 확인하는 명칭으로 서로를 부른다. 예컨대 최근에 인기가 있다는 연속극에서 이런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들은 같은 법률회사에 근무하는 변호사인데, 서로를 변호사님이라고 부르고 확인하는 추임새 없이는 그들의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궁금하다. “너도나도 변호사라는 건 다 아는 사실인데, 왜 서로 끊임없이 그걸 확인해야 하는 거지?” 그들이 연출하는 일상의 과시 의례? 그렇다면 그건 자신들의 고귀한 직업을 과시하는 일종의 전례(典禮)일 터이다. 그것을 부자연스럽다고 보는 것은 그 집단 밖에 있는 자의 신 포도관점에 불과하다. ‘인사이더는 자신의 특권을 수호하기 위해 상호방위의 신사협정 효과를 만들어내야 하고, 외부자와 구별되는 의례 분위기가 필요한 것이다.

최근에 국회 청문회장에서 어떤 의원이 고래고래 고함지르며 삿대질하는 장면의 동영상을 보았다. 그가 흥분한 이유는 상대방이 자신의 직업을 드러내는 의원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한때 몸담았거나 현재 소속된 조직의 직책으로 부르는 것이 그를 존중해주는 방식인가? 그렇다면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가? 흥미로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누가 나에게 이런 식으로 대한다면 나는 거북하게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그럴 맥락에서 벗어났음에도, 꼬박꼬박 직책을 붙여서 나를 얽어맨다면, 나는 거리를 두고 그를 대할 수밖에 없고, 쉽게 가까워질 수 없을 것이다. 나에게 가장 높은 존경어는 선생혹은 선생님이다. 내가 남을 부를 때도 그렇고 남이 나를 불러줄 때도 그것이 최상의 명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예컨대 자신을 교수님실장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흔쾌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런 분위기가 있어서인지 전() 교수님이나 전() 부장님과 같은 명칭이 사용된다. 그런 이들은 자기 무덤 앞 비석에 자신의 왕년 직책을 빽빽이 새겨 놓고 싶을 것이다. 이런 강박적 습관은 하루 이틀에 생긴 것이 아니지만, 요즘에 더 심해진 것 같다. 점점 더 자신을 묶은 위계제의 족쇄가 풀리는 것이 두려운 모양이다. 그래서 그들은 피곤하고 번거로운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넷째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영어의 지존무상(至尊無上)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의 시대를 규정할 때, 영어의 지존 등극은 빼놓을 수 없는 점이다. 삼국시대에 한자(漢字)가 들어와 토박이말을 밀어낸 이래, 그에 비견될 수 있는 가장 큰 언어적 변화가 지금 일어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표의문자인 한자와 표음문자인 영어가 우리에게 주는 충격은 다를 수밖에 없다. 외래 언어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계층과 파급 속도 또한 한자와 영어는 매우 다르다. 한 마디로 지금의 영어는 특정 계층에 머무르지 않고, 국민 전체에 유례가 없는 속도로 빠르고 강력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우리의 말과 행동, 그리고 정서 구조에 스며들고 있다. 한자가 지배 세력을 중심으로 서서히 그리고 제한적으로 세력을 확장해 갔다면, 영어는 사람들이 정신 차릴 새도 없이, 빠르고 강력하게 몰아붙이며 단번에 자신에게 포섭될 것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영어는 소통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위세 그 자체로 작용한다. 한글로 옮겨적은 영어 발음의 영화제목을 누가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영화제목뿐인가! 이제는 같은 방식의 책 제목도 깔리고 있다. 이렇게 이름 붙여 놓으면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은 이걸 입에 올려야 하기 때문에 더욱 고약하다. “영어의 우월함에 자진해서 복종하기는 도처에서 우리를 부드럽고 우아하게 압박하고 있다. 나는 우리에게 문화적인 저력이 있다면 일시적으로 휘말리는 듯하다가도 영어에 대한 탄력적인 대응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 “영어로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라고 하면 멋있는데 국립추모공원이라고 하면 멋이 없다.”이 왕노릇하며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네 가지 말 습관을 살펴보면서 드는 생각은 일상의 편만한 두려움에 우리가 포위되어 있으며, 상하층을 막론하고 모두가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발겨 벗긴 채로 도처에서 출몰하는 위협에 맞서야 하며, 국가권력은 이 상태의 우리를 도와주는 대신,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살아갈 방편을 만들기에 노심초사한다. 상대방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극존칭의 말투를 내려놓지 않고, 틈날 때마다 유사 가족의 유대감을 조성하며, 조직의 위세와 문화자본의 우월성을 과시함으로써 보호막을 둘러치고자 하는 것이다. 갑질을 당하는 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갑질을 하는 자도 두려움에 떨며 살고 있다는 점을 우리의 말 습관은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장석만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한국근대종교란 무엇인가?》, 《한국 종교학 - 성찰과 전망》(공저)의 책과 <두 가지 몸의 늙음: 한국 근대 노년 관점의 변화>, <식민지 조선에서 여자가 운다>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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