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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저마다 ‘비와 당신의 이야기’를 지으며 산다
news letter No.849 2024/9/24
<비와 당신의 이야기>는 1986년 음악 밴드 부활의 첫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비 오는 날이면 라디오 음악방송에서는 종종 <비와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버스 안에서든 좁은 기숙사 방에서든 라디오의 썩 좋지 않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이 음악을 들으며 창밖의 비 오는 거리를 바라본 적이 많았다. 지금도 비 오는 날에 잘 어울리는 노래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어떻게 보면 <비와 당신의 이야기>가 지닌 독특함은 ‘비’라는 자연현상 혹은 물이라는 사물에 기대어 삶의 한 부분을 들춰내는 데 있는 것도 같다. 비라는 현상 혹은 빗물이라는 물질은 오래 묵은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현재의 감정에 미묘한 파동을 일으키는 힘을 지는 듯하다. 그 힘에 대한 인식이 <비와 당신의 이야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2.
내가 사는 지역에는 이틀 동안 폭우가 내렸다. 비의 위력을 겪으면서, 나는 부활의 <비와 당신의 이야기>에서 드러난 “비-당신-이야기”의 서사가 나의 경우에는 어떻게 구성될 수 있을지를 잠시 생각해보았다. 굳이 건조한 틀을 갖춰 말하자면, 인간-비인간[사물]의 관계가 어떤 계기에서 엮어내는 서사의 성격에 관한 생각이겠지만, 풀어쓰면 비와 함께 만든 내 삶의 흔적을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이다.
비와 관련해서 세 가지 정도가 내 기억에 깊게 자리하고 있다. 첫 번째는 중학생 시절에 온 몸에 퍼붓는 소낙비를 맞으며 정말 신이 나서 가쁜 숨을 들이쉬며 학교 운동장을 뛰었던 일이다. 온몸에서 수증기가 피어오를 정도로 정말 ‘열나게’ 뛰었던 것은 굵은 빗줄기가 내 안의 답답함을 깨끗이 씻겨내는 청량감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암벽등반을 하던 중에 만났던 우박을 동반한 소낙비다. 우연한 계기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한동안 암벽과 빙벽 등정을 즐기는 전문산악회에서 산을 타게 되었다. 어느 가을날에 서울 우이동에 있는 인수봉을 5명이 팀을 이뤄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맑았던 하늘에 서서히 먹구름이 끼더니 갑자기 굵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모두가 당황했다. 더욱이 빗줄기에 우박이 섞여 있어 고개를 들기 어려웠고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좀 지나자 인수봉 절벽의 여러 측면에서 물길이 생기더니 마치 폭포처럼 물이 쏟아져 내렸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생긴 물길을 보면서 빗물이 지닌 그 힘에 사로잡혀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세 번째는 대학생 시절에 한여름에 내린 폭우로 내가 살던 반지하의 방에 발등이 잠길 정도로 물이 찼던 일이다. 더군다나 반지하의 부엌은 건넛방의 세든 사람과 공유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가옥구조였던 셈이다), 그는 직장인이라 저녁 늦게 들어왔기에, 수업이 없어 집에 있던 내가 온전히 바닥 전체를 걸레로 훔쳐내는 고된 일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 일은 뒤에 벌어진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더위와 높은 습도로 물에 젖은 반지하의 공간은 서서히 곰팡이의 세상으로 변했으니, 로샤 검사(Rorschach Inkblot Test)에서 볼 수 있는 문양의 검은 곰팡이의 궤적과 쾌쾌한 냄새를 지닌 옷을 입고서 집밖에 나서는 마음은 그 옷이 머금은 습기의 무게만큼 결코 가벼울 수가 없었다.
최근 이틀 동안 내가 사는 곳에 내린 폭우는 내게 새로운 이야기를 안겨주었다. 이틀 간 내린 비의 양이 평균 200mm라는 수치는 들어도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집 한쪽을 감싸 흐르는 하천의 물이 점점 불어나면서 제방 위로 물이 넘쳐흐르고 마당에서 하천 쪽으로 연결된 배수관을 통해 물이 역류하면서 순식간에 마당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잠깐 생각할 틈도 없이 불어나는 수위에 좀처럼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마당에는 네 마리의 개가 있고, 그 중 한 마리는 이미 걱정 어린 눈빛을 하고 나를 쳐다본다. 비록 낡고 허름한 집이지만 그동안에는 태풍이나 폭우가 와도 안전하다 느꼈는데, 당시의 상황은 매우 위태로운 순간이었다. 간신히 굳은 뇌가 풀어지면서 집에 있던 조그만 양수기를 가동시켜 하천 쪽으로 작은 양의 물이라도 길어내는 일을 하고 근심에 찬 개를 위로 하는 일 외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제발 비가 멈추면 좋겠다!”는 염원을 하면서, 이 일은 하늘의 일이라는 생각만이 들었다.
3.
흔히 종교현상을 일상을 넘어선 비일상의 것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무엇이 그러한 비일상의 영역으로 인간의 의식을 이끌어 가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해 인간은 과학적 인식의 논리 위에서 사물을 경험하면서도 그러한 인과 논리의 범주 밖에 자연을 두고 그것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경험하기도 한다(정진홍, 『종교문화의 이해』, 청년사, 2004[1995], 86-88쪽)고 할 때 자연에서 초자연으로,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전환되는 계기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것이다. 이번에 내린 폭우는 내게 그러한 변용 혹은 전환의 계기에는 일찍이 루돌프 오토가 누멘을 규정하는 요소들 중 하나로 언급했던 ‘두려운 위압성(tremenda majestas)’이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오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절대적 압도성 혹은 위압성이라는 요소와의 관계 속에서, 그것의 그림자 혹은 주관적인 반응으로서 전에 언급한 ‘피조물적 감정’이 생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객체적으로 의식된 압도적인 것에 대한 대조로서의 자신의 함몰성 내지 무화, 그리고 먼지와 잿더미같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분명하게 느끼는 감정이며, 이것이 말하자면 종교적 ‘겸손’의 감정을 이루고 있는 누멘적 원료인 것이다.(루돌프 오토, 『성스러움의 의미』, 길희성 옮김, 분도출판사, 1987, 57쪽)”
비록 낡고 허름한 집이지만 평소에 안전하다고 여겼던 이 공간이 하천의 불어나는 물에 잠길 수 있다는 두려움은 이전의 비와 연관된 경험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티에리 파코는 이집트의 빈민층을 위한 주택건설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건축가 하싼 화티의 일화를 전해준다. 하싼 화티는 흙벽돌을 이용해 건축의 편리성과 미학적 구조를 지닌 전통가옥의 건축기법을 빈민의 주택건설에 적용하고자 했던 이집트의 저명한 건축가이다. 화티의 생각에 “아랍 가옥은 여성의 영역이다. 내부로 향한 집은 고요한 하늘을 향해 열려 있고, 여성성을 대표하는 물이 존재하기에 더없이 아름답다. 평화롭고 내성적인 물은 노동, 상업, 전쟁과 같은 가혹한 세계와는 확연히 대립되는 물질이다. 아랍어로 집을 뜻하는 ‘사칸(sakan)’은 사키나(sakina, 평화로운)‘와 유사하고, 여성을 뜻하는 ‘하림(harim)’은 ‘하람(haram, 성스러운)’과 비슷하다. 하람이란 가옥에서 가족이 차지하는 공간을 가리킨다.” 그러나 화타의 프로젝트는 실패로 끝났다. 이집트 빈민들의 정신과 물질적 기대에 부응할 것이라는 화타의 기대와는 달리, 빈민이 처한 사회의 열악한 환경과 실용성과 경제성을 앞세운 건축 기술의 유행이 집의 상징체계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티에리 파코, 『지붕: 우주의 문턱』, 전혜정 옮김, 눌와. 83-96쪽).
철학자이자 도시공학자인 티에리 파코는 세계 여러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지붕에는 특정한 우주론에 뿌리를 둔 상징체계가 담겨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오늘날에 기술문화의 패권주의가 건축에 담긴 신화와 믿음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그 힘을 무효화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미와 상징을 창조하고 생산하는 인간의 존재론적 특징이 집을 짓는 행위에 깃들게 마련이라고 생각한다(티에리 파코, 같은 책, 21-22쪽).
그런데 오늘날에 ‘위대한 압도감’을 일으키는 예측불허의 기후변화 앞에서 우리가 집을 짓는 방식과 거주 방식은 분명히 달라질 텐데, 그때에 집짓기와 거주방식에 담길 상징체계와 의미의 세계가 어떤 형태와 내용을 담게 될 것인지, 내 생각은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다. 다만 오늘날에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변화의 위기를 과학기술로 극복할 수 있다는 기후공학의 시각에서는 앞서 오토가 말했던 압도적인 위력 앞에서 지니게 되는 ‘종교적 겸손’의 누멘적 요소는 성립되기 어렵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때 지구행성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수준을 넘어서 지구행성 자체를 효율적으로 처분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테크노관료주의와 시장 자본주의의 시각은 더 심각한 불확실성과 위험을 우리에게 안겨줄 것이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토양에 뿌리를 내린 기성종교에서 현재 직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인 사유와 감정을 기대하기도 어렵다. 오히려 인간을 무화시키는 자연의 힘을 감각하면서 인간중심주의의 태도를 버리고 인간과 비인간(생명/사물)과의 공생을 추구하는 ‘평민’의 생태적 실천에 합류하게 될 때, 조금이라도 우리의 오만은 사그라지고 그 자리에서 비로소 겸손의 종교성이 자리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박상언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소록도 한센인의 사회적 공간 구성과 종교적 헤게모니>, <소록도 한센인의 고통서사와 종교의 자리>, <다른 몸들과의 불안한 연결: 종교의 장애인식과 한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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