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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사와 선거브로커, 변란과 친위쿠데타
news letter No.860 2024/12/10
전근대 종교사라는 영역은 연구자 입장에서는 대단히 재미있지만 현재적인 시의성을 따지자면 거의 제로에 수렴한다. 이것은 종종 초학자 시절의 필자를 의기소침하게 했다. 필자의 전문분야인 조선후기 변란에서 나타나는 도참신앙, 미륵신앙 등은 과거 ‘민중종교’라는 주제 속에서 다루어졌다. 1970년대 후반 이후 학술장 내에서 민중 담론이 유행하면서 전근대의 반란이나 혁명에서 드러나는 종교성은 사회 변혁을 일으키는 동력 가운데 하나로서 주목받았다. 민중신학자 서남동과 같은 일부 지식인들은 당시 활발하게 연구되던 동학농민전쟁이나 저항적 미륵신앙 등을 ‘민중전통’이라 부르며 이것이 성서 및 교회사 전통과 ‘합류’하여 실천적인 의미를 갖게 하겠다는 구상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그런 방식의 접근은 인기를 확실히 잃었다. 여기에는 정치사회적 환경의 변화와 함께, 변혁 주체로서의 ‘민중’이라는 단어가 가진 급진성과 낭만성보다는 일상을 영위하는 생활 주체로서의 측면이 학술적으로 주목받게 된 영향이 컸다. 이런 맥락에서의 민중종교란 1980년대 민중 담론보다는 서양사 전통에서 다루는 popular religion의 번역어에 가까운 감각으로 이해되는데, 이 경우 ‘민중’이란 ‘대중’의 전근대적 대응항 정도의 의미만을 가진다. 그래서 필자는 2010년대 이후로는 『정감록』에 나타나는 정씨 진인 출현과 신국가 건설에 대한 예언, 미륵의 출현이나 후천개벽이라는 언어로 표현되는 천년왕국론적 상상 등을 언급할 때 ‘민중종교’라는 용어를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이 연구 주제를 현실적, 실천적인 문제의식과 연결하고 있었던 거의 유일한 통로였던 진보적 민중 담론과 단절하는 일이기도 했다.
여기에는 조선시대 역모사건 추국(推鞫) 기록들을 통해서 실재했던 ‘반역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다루게 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고전적인 민중 개념으로 포괄하기에는 사회계층이나 정체성에 있어 너무나 다양했고, 그 정치적인 지향에 있어서도 낭만적인 민중론과는 공통점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17-19세기의 방대한 자료들에서 나타나는 역모사건 관련자들의 예언, 점복, 풍수, 주술 등에 대한 믿음에서는 정치적 저항만이 아니라 훨씬 다양한 동기-즉, 부의 획득, 영향력 확대, 적대자에 대한 공격, 이단적 지식의 추구, 현실세계에 대한 대안적 인식 등이 드러났다. 물론 많은 경우 그것은 전근대 저항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근대 이후의 유토피아적 정치 이데올로기들과는 거의 공통점이 없었다. 대신 다른 것들과 훨씬 닮아 있었다.
최근 몇 년 사이의 정치 뉴스에서 연구 주제와 관련하여 낯익은 키워드들이 종종 언급된 것은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대선 후보가 손에 ‘왕(王)’자를 쓰고 TV토론회에 나타난 일은 많은 이들을 당혹스럽게 했지만, 19세기 역모 사건에서 새로운 왕조를 세울 정씨 진인으로 내세워진 사람 가운데 적어도 두 명이 손바닥에 ‘왕’자 무늬가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또 대통령실 이전 당시에 풍수 관련 조언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은 중앙일간지에 정치인들의 관상을 다루는 평론을 연재하고 있었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악어상’을 지닌 인물은 강물을 정화시키고 세상을 정화시키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럼 국민들은 그 깨끗해진 물을 마음껏 마실 수 있고, 투명해진 세상에서 공정하게 경쟁하며 살아갈 수 있다. 안정되고 공정한 치세에는 ‘악어상’의 역할은 없다. 지금처럼 혼탁한 난세가 되면 ‘악어상’을 지닌 인물을 세상이 부르고, 국민들이 원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지도자가 될 관상이라는 주제는 전근대 상황에서도 숱하게 등장한다. 특히 여타의 술수에 비해 문자 전통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비교적 쉽게 습득하고, 직관적인 이해가 가능한 관상은 다양한 계층의 반정이나 역모 참여자들에게 호소하는 바가 컸다. 이런 종류의 술수들이 21세기의 정치 영역에서 언급되는 것은 분명 시대착오적으로 보이지만, 한국종교사 전체에서 보았을 때 그렇게까지 이례적인 일은 아니다. 전근대 국가들은 공적인 지위를 가진 일관(日官), 지관(地官) 등의 술관(術官)을 임명해 술수와 관련된 직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그들의 역할은 일상적인 택일이나 택지에서부터 궁궐 건축이나 왕도의 이전과 같은 정치행위에 정당성을 제공하는 데까지 다양했다. 또한, 역모 행위를 앞둔 세력은 자신들의 정치적 전복 시도에 가능성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민간 술사들의 조언을 듣거나, 점을 치게 하거나, 아예 그들을 가담시키기도 했다. 조선후기의 역모 가운데에는 그들의 이탈과 고발로 발각된 사건들도 적지 않다. 술사들을 움직이는 동기가 출세욕이나 권력욕이었다면, 반란에 참여하는 것은 현재의 권력자들에게 인정받는 것에 비하면 리스크는 크지만 접근은 훨씬 용이한 일이었다.
물론 오늘날 이런 이야기는 그저 가십거리 정도의 의미 이상을 가지기 어렵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면, 과거 영부인의 녹취록에서 ‘도사’라는 개념으로 총칭된, 술사(術士) 유형의 인물들 다수가 대통령 부부의 주변에서 어떤 형태로든 영향력을 미쳐온 것은 사실로 보인다. 영부인 자신도 “영적인 사람”을 자처하며 ‘운세 콘텐츠’의 상품화에 대한 논문들을 발표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박사’ 또는 ‘미륵보살’이라 불리는 선거브로커와 영부인이 나누었다고 하는 “영적인 대화”에서는 미래를 예측하는 ‘꿈’에 대한 해석, 인사 대상자들의 ‘관상’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의 상충, ‘조상의 공덕’ 등이 화제에 올랐다는 증언도 있다. 그들에게 있어 권력의 획득과 행사는 주권자의 위임이나 정치적 신념보다는 특정한 테크닉을 통해 예측, 조정 가능한 우주론적 운명과 관련되어 있다.
애초에 필자는 이 정도에서 글을 마무리지으며, 대의민주정 하에서는 국가도 반역자도 아닌 선출직 지원자들이 술수에 의지하기 쉬운 조건에 처하게 된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하려 했다. 그렇게 해서 스스로의 연구 주제와 현실 사이의 미약한 연속성이나마 발견해 보려고 한 것이 이 글의 의도였다. 설마 술수, 예언, 관상, 풍수, 미륵만이 아니라 ‘변란’이라는 키워드마저 이처럼 직접적인 현재성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민주공화국에서는 궁극적인 주권자와 행정적인 통치자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통치권자야말로 잠재적인, 그리고 가장 위험한 반역자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친위쿠데타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표준적인 반란의 양식이다. 모험주의적인 전근대 변란에서 세계의 붕괴와 파국에 대한 종교적 상상력이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번 친위쿠데타의 주모자들은 현재의 사회를 묘사하는 기괴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국회는 범죄자 집단의 소굴이 되었고”, “대한민국은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해” 있으며, “종북 반국가세력”이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다는 인식이다. 따라서 초법적인 폭력을 통해서라도 타락한 세계의 질서를 붕괴시키고 자신들에 의한 구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부류의 우주론이 종교사적으로 결코 낯설거나 드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근대 국가는 이런 세계관이 공적인 행위로 분출할 때의 위험성을 제어하기 위해, 이를 개인의 망상이나 폐쇄된 종교공동체 내부에 결박해 두기 위한 여러 장치를 마련해 놓았다. 세속주의, 정교분리, 폭력 수단의 국가 독점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장치들은 국가폭력 수단을 장악하고 있는 권력자가 특정한 제도종교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종말론적 환상을 품게 되는 순간 무력화된다. 극우 유튜버의 고성 속에 유통되던 이 세계관은 그런 방식으로 물질화되어서 우리의 일상을 파괴했다. 그렇게 이 내란은 종교학적인 비평의 대상이 된다.
한승훈_
한국학중앙연구원
올해 발표한 글로 〈무당이즘, 점복, 의례: 김효경 무속 연구의 주제들〉, 〈남만상인, 요술사, 반역자로서의 야소종문: 임수간의 「해외기문」에서의 일본 그리스도교 서술〉, 〈17세기 함경도의 술유 주비: 조선후기 유랑지식인의 일례〉, 《왕의 수명을줄여라: 반역 사건으로 보는 조선의 이면》(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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