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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大衆)의 시선으로 보는 수행(修行)
news letter No.857 2024/11/19
우리나라에 단일한 ‘종교법’은 여전히 만들어지지 않고 있지만, 가톨릭의 「교회법」, 개신교의 「총회헌법」 그리고 조계종의 「조계종법」은 있다. 이들 종교계의 법률들은 종교계 내부의 조직, 제도, 규범 및 행위들을 규율하고 통치‧감시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면서 오늘날 국가의 법제 형식을 반영하면서 확대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개별 종교의 자율성은 보장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 봐야 할 점은 우리 주변의 교인(敎人)들이나 신도(信徒)들까지 종교법의 관할 아래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매스컴에 오르내리는 목회자, 성직자, 승려의 여러 비위(非違) 행위들이 소위 세간(世間)의 재판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러하다. 즉 이제는 출세간의 법만으로는 종교인들 또한 통제되지 않는 시대를 맞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종교인들의 법적 경계뿐만이 아니다. 지금은 종교인들이 재가(在家) 대중들과 함께하는 활동이 빈번해지면서 대중들의 시선 속에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를 예로 들어보자. 불교계에서는 아무래도 비구니 스님들이 대중과의 만남에 있어 더 자연스러운 측면이 있다. 사찰음식을 가르치고 배우려는 사람들도 그러하고, 차(茶)를 마시는 대중들의 기호에 맞추어 산사의 여러 한방차도 개발하여 소개해주는 것도 그러하다. 이때 비구니 스님들은 자신들이 세속에서 대중과 더불어 수행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분위기다. 그런데 같은 상황을 두고 대중들도 스님들과 같이 인식하고 있을까.
가톨릭 성당에 가서 구역회 모임으로 교우들과 대화를 해보면 의외로 불교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자신의 시어머니가 혹은 친정어머니가 절에 수십년을 열심히 다녔는데, 돌아가실 즈음 혹은 돌아가셨을 때 스님들이 한 분도 오시지 않아 서운하고 섭섭했다고 하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례를 들려준다. 이런 사례들은 다양하고 많았다. 그러면서 교우들은 스님들이 본인의 ‘수행’에만 관심이 있어서인가보다 하고 이해하고 만다. 비단 가톨릭 교우뿐만도 아니다. 어떤 불교신도는 “우리 스님이 ‘돈’을 너무 밝히신다”고 한다. 스님께서 아파트도 사고, 노후 준비를 하시려나 보다하고 생각했단다. 어떤 신도는 자신의 절의 주지스님께서 새로 나온 좋은 차[車]로 바꾸고 싶다고 해서 결국 그렇게 해드렸고 한다. 재가 불교연구자들도 조심스럽게 스님들에 대해 품평 아닌 품평을 할 때가 있다. 어떤 스님께서 박사를 받았는데, “그냥 좀 가만히 계시지, 본인이 박사인데 하시면서 그렇게 불교에 대해 아는 체를 하신다”는 식이다. 또 유튜브(Youtube)를 하시는 어떤 스님은 분명히 ‘거짓말’을 자신의 신도들에게 버젓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혀를 내두른 적이 있다고 한다.
스님들에 대한 이러한 재가자들의 쉬쉬하는 뒷담화는 과연 몇몇 ‘잘못된’ 재가자들의 편견일까. 아니면 대중들의 시선에 비친 스님들에 대한 세속적인 이야기일뿐일까. 무언가 맥락적 설명은 필요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의 여러 사찰의 승려들은 재가 대중들이 볼 때, 불필요할 정도로 세속화되어있는 것 같다. 그렇게 만드는 한국의 ‘맹목적 보살’들도 문제가 많기는 하다. 그러니 스님들의 수행은 이제 대중들과 함께 자자(自恣)와 포살[uposadha]을 통해 지계(持戒)의 정신을 바로 세워나가야 할 때가 된 것인지 모른다. 대중의 시대 혼자만 깨달았다고 하는 독각(獨覺)은 무의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구가 지켜야 할 250가지의 계율과 비구니가 지켜야 할 348계의 계율의 출처와 율장에 대해 대중들은 잘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사분율(四分律)》에 나오는 계율이든 《범망경(梵網經)》에 나오는 계율이든 혹은 일반인들도 애독하는 『능엄경』에 나오는 4바라이죄든, 대중들은 상식에 준하는 지계의 정신을 지키는 스님을 존중할 것이다.
승려들은 목회자 혹은 성직자와 다르다고 본다. 우리는 목회자나 성직자가 수행자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들은 우리 곁에서 설교(說敎)를 잘하고, 미사를 잘 드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된 얼굴을 뵈올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는 종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승려들은 재가 보살들보다 더 높은 청정수행(淸淨修行)을 목표로 출가를 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부처님의 깨달음과 참회(懺悔)를 몸소 모범적으로 대중들에게 보임으로써 대중들의 귀감이 되기 때문에 대중들이 존중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음(淫), 살(殺), 도(盜), 망(妄) 등을 일반인과 같이 한다면 어찌 대중들보다 앞서 걸어가는 수행자라고 하겠는가.
심일종_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논문으로 <영등신을 위한 음식>(2024), <조선 초기 법화사상과 불교의례>(2023)가 있고, 두 번째 박사논문으로 <조선시대 유‧불의례의 상관성 연구>(202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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