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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키치의 몇 가지 사례에 대한 단상
news letter No.875 2025/3/25
지난해 필자는 본 연구소의 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신화의 키치(mythological kitsch)와 그 사례들과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키치라는 말은 신화만큼이나 그 용례가 다양하고 부정, 긍정의 의미를 모두 내포하는 다의적 용어이다. 오늘날 키치 아닌 것은 없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로 이 말은 사전의 뜻과 정의와는 다른 접근이 필요한 개념이다. 키치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1870년대에 뮌헨에서 값싸고 시장성이 높은 그림이나 조각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견해가 다수이다. 그 당시 난해한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신흥 부르주아들은 구 귀족계급의 교양을 모방함으로써 자신들이 선망하는 엘리트의 위치를 획득하려는 취향을 충족시킨 것이 키치 예술이었다. 이 말의 개념은 변천을 거듭하며, 비단 예술과 미학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신화적인 용례가 있다. 정치, 사회적 키치는 단순히 취향을 넘어 인간 존재를 왜곡하는 위험한 태도나 이념적 도구라는 개념으로 사용되는데,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확인된다. 흥미로운 것은 웬디 도니거는 신화의 키치를 신화 보존의 관점에서 접근했는데, 우리 사회의 신화 소비 방식을 살펴보는 데 시사점이 있다.
도니거는 《다른 사람들의 신화: 메아리의 동굴 Others Peoples’ Myths: The Cave of Echoes》에서 신화와 고전의 공통점을 다루면서 서구인들이 고전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고전은 영원하고 고정된 기록 문헌이라고 여기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고전은 학식과 교양 있는 구성원들에게 공동의 문화적 기반을 제공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호머의 작품은 공연, 영화, 전시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과 생성을 거쳐 새로운 신화로 거듭나기도 했다. 또 오늘날 그의 작품을 그리스어 원전 혹은 그것을 번역한 책으로 읽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며, 고전이 재해석된 상업용 광고나 대중적인 영화 등으로 누구나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대중의 취향에 맞게 상업화된 신화는 키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로큰롤 음악이나 영화처럼 형식이 신화가 아닌데 내용은 신화적인 경우와 그 반대의 경우 모두 해당한다. 흥미로운 것은 신화적 키치는 오히려 신화가 보존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엘리아데가 지적했던 신화가 격하(degradation)되거나 그 힘을 상실했을 때조차도 고유한 가치를 유지한다는 주장과 통한다.
도니거가 제시한 키치의 사례를 살펴보면 고대 힌두 고전을 풍자한 만화 시리즈가 있다. 아마르 치트라 카타(Amar Chitra Katha)의 설립자 아난트 파이 (Anant Pai)는 인도 학생들이 《라마야나》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을 못 하면서도 그리스 신화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인도의 고대 신화와 역사, 문학을 어린이를 위한 만화로 제작하였다. 이 만화 시리즈는 외관상으로는 아동용이지만 고전 읽기를 부담스러워하는 성인들이 인도 고전을 재미있고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이 대중들이 재미있고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원전을 단순하게 변형시킨 사례는 우리 사회의 신화 소비 방식에서 확인된다. 19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비롯한 신화서 읽기가 대유행을 하였다. 그 중심에는 탁월한 미국의 신화 작가들의 신화서를 번역하거나 편역한 서적, 교양 학습 만화 시리즈가 있었다. 대표적 미국 작가의 한 사람인 세계의 위대한 고전 시리즈를 낸 토마스 불핀치(Thomas Bulfinch 1796~1867)는 불핀치의 신화(Bulfinch’s Mythology)를 저술하여 신화와 전설을 전 세계적으로 대중화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그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중심으로 북유럽신화와 동양신화 일부를 다룬 신화집(The Age of Fable)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신화의 세계는 방대하여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게다가 신학에 대한 기본 지식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지금 당장 《아이네이스》의 첫 페이지를 읽어보라 ‘헤라의 원한(the hatred of Juno)’, ‘파르카의 섭리’, ‘파리스의 심판(the judgement of Paris)’, ‘가니메데스의 영예(honours of Ganymede)’가 뜻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나는 신화에 옛날이야기 같은 재미를 곁들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수월하게 전해지기를 바란다. 이 책은 젊은이들에게는 즐거움의 원천이 되고.... 사교 모임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면 가끔 듣게 되는 고상한 비유를 해석하는 열쇠가 되어줄 것이라고 확신한다.”1)
그는 원전에서 미풍양속을 해치는 이야기는 되도록 피하고 유명한 문학작품, 회화, 조각 등 예술과 관계 깊은 신화를 중심을 품위 있는 교양을 원하는 독자를 생각했다는 친절한 설명이 대중을 위해 그의 신화 해석이 단순화된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가 해석한 신화를 다시 편역한 국내 신화서들은 국민 교양을 위한 신화라는 출판업계의 홍보에 따라 절찬리에 소비되어 왔다. 신화를 ‘재미있는 이야기’, ‘교양을 위한 이야기’, ‘영웅적 일대기의 구조를 갖춘 이야기’에 초점을 두는 것도 특정한 시기의 산물인데 그것을 본래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온 것은 아닌지 점검이 필요하다. 비단 그리스 신화에 국한된 문제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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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omas Bulfinch, The Age of Fable, New York:Grolier, 1968, p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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