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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의 춤: 예언과 질문의 사이공간

 

 news letter No.883 2025/5/20

 

 

고대 그리스 파르나소스 산 남쪽에 위치한 델포이(Delphoi)의 아폴로 신전에는 아폴로 신의 예언을 전하는 예언자 피티아(Pythia)가 있었다. 피티아의 예언은 모호성으로 특징지어다. 모호하지 않은 말로 예언했던 트로이아의 왕녀 카산드라의 말은 그러기에 누구에게도 예언으로 가닿지 않았다. 예언의 모호성은 단지 예언의 맞고 틀림을 비켜가기 위한 전략적 수단이 아니었다. 예언의 언어는 즉각적인 진실의 전달이 아니라, 청자의 해석 개입하는 일종의 시적 언어이자 그 안에는 여러 해석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의도된 공백이 존재한다. 이러한 모호성은 피티아의 예언이 닫혀진 것이 아니라 해석과 토론을 통해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 구조임을 보여준다.

 

 

 

일부 고전학자들은 피티아 예언의 이러한 모호성을 단지 말의 내용뿐만 아니라, 예언이 수행되던 의례의 장소성과 퍼포먼스의 성격과 연결시켜 논의하기도 한다. 고전학자 리사 마우리지오(Lisa Maurizio)는 피티아의 언어가 고정된 문장이 아닌 공연되고 해석되는 발화 행위였다는 것을 강조하며, 예언이 청중의 기대와 질문의 맥락 속에서 매번 새롭게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기에 예언은 말해지는 순간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둔 채 예언을 구한 자들에게 넘겨진다. 따라서 신탁은 신에게서 인간으로 향한 일방적인 전달이 아닌, 인간의 요청과 신의 응답이 교차하는 열린 대화다.

 

이러한 열린 대화의 구도에서는 해석뿐만 아니라 예언을 구하는 자의 맥락 역시 중요하다. 고전학자 마이클 플라워(Michael Flower)는 예언을 받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이들의 질문이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예언의 형식과 범위를 결정하는 구조라고 말한다. 예언의 말은 질문자의 맥락에 따라 변화한다. 예컨대 마이클 플라워가 인용한 크세노폰의 페르시아 원정기(아나바시스)』에서 크세노폰은 점술가 에우클레이데스를 만나, 자신의 궁핍함이 제우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은 탓이라는 말을 듣는다. 플라워는 이 장면이 점술가가 질문자의 과거 사회적 맥락을 바탕으로 문제의 원인을 구성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고 말한다. 에우클레이데스는 크세노폰이 과거에 어떤 제사를 드렸는지 알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크세노폰의 현재 및 미래와 관련된 신탁을 전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예언자가 단지 신의 뜻을 전달하는 통로가 아니라, 질문자의 개인적 경험과 기억을 읽어내고, 그것을 예언의 실마리로 삼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즉, 예언은 삶의 구체적 궤적 안에서 의미를 구성해 내는 해석적 실천이다.

 

 

지난 5월 9일과 10일 서울 GS아트센터에서 공연된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의 복합예술작품 『시빌을 기다리며(Waiting for Sibyl)』 피티아와 같은 고대의 여성 예언자 시빌을 소환하며, 예언의 장에서 일어나는 역동성을 춤 노래, 스크린 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미지들, 그리고 종잇조각 위에 쓰인 예언의 말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장면들로 형상화했다. 예언을 기다리는 것과 예언을 전하는 것 모두 여기서는 ‘움직임’ 속에 존재하며, 바람에 날리는 예언의 말들은 예언의 일회성, 혹은 사라짐이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 또 다른 에서의 무수한 새로운 연결의 가능성들을 만들어내는 것임을 암시한다.

 

이러한 고대의 예언 속 예언의 말과 질문의 역동성은 오늘날 생성형 인공지능(AI)과의 대화의 과정과 겹쳐진다. AI는 질문자의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학습된 내용들 속에서 찾아낸다. 이때 질문자의 질문의 맥락과 뉘앙스는 대답의 형식을 설계하고 의미의 폭을 결정짓는다. 따라서 AI의 대답은 단순히 AI만의 사고에서 만들어진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질문자와 AI 사이의 상호작용 속에서 생성된 의미다. 그렇게 생성된 대답들에는 질문자의 개입과 해석이 필요한 모호한 지점들이 존재한다. 피티아를 찾아간 이들이 던지는 질문이 예언의 대답을 형성하고, 그 대답 속 모호한 언어들과 공백들이 해석되고 의미화되는 과정을 통해 예언이 작동하듯이, 우리가 AI에게 질문하는 방식과 사용하는 언어들은 대답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하며, 그 대답 속 모호함과 틈들에 대한 우리의 해석과 질문에 따라 대화는 이를 바람에 날리는 예언의 종이처럼 또 다른 방향으로 데려간다.

 

최근 연구소의 한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된 학자, 킬라 와자나 톰킨스(Kyla Wazana Tompkins)의 좋은 질문하는 법에 관한 글은, 질문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해체하는 가장 기본적이며 본질적인 방법이며, 텍스트 속에서 아직 말해지지 않은 가능성의 틈들을 탐색하는 수행적 작업이라고 말한다. 좋은 질문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추측할 수 있는 것, 읽고 있는 텍스트에서 즉시 이해할 수 있는 것 또는 말할 수 있는 것의 경계에서 춤추는 것”이라 표현한 그녀의 말은 켄트리지의 무대 위 바람에 흩날리던 종이 속 시빌의 예언의 말들과 겹쳐지면서, AI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질문하며 그 속에서 어떻게 춤추며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을 만들어 가야 할지 생각해 보게 한다.

 

한편 이렇게 역동적인 예언의 춤의 반대편에는 예언의 말, 신탁의 말을 비문(inscription)에 새기는 작업이 있다. 이는 모호하고 유동적인 예언의 성격을 ‘고정’시키고 ‘권위화’하는 과정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발견되는 신탁 비문들은 예언의 말을 특정한 정치적 행동의 정당화로 사용하기 위해 새겨 놓은 예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비문은 단순히 예언 자체가 아닌, 이 비문을 받고 해석하고 새긴 권력을 드러내면서 예언을 특정한 정치적 질서와 기억의 방식으로 구조화하고 고정시킨다.

 

전통적인 예언의 변주들이 난무하는 오늘날, 우리는 예언 그 자체가 혹은 AI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과거 신탁 비문처럼 그것의 모호성과 역동성을 제거한 채, 이들을 특정한 권위와 권력의 이름으로 새겨 놓고 절대시하는 태도가 제가 아닐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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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rizio, Lisa, “Delphic Oracles as Oral Performances: Authenticity and Historical Evidence,” Classical Antiquity 16.2 (1997): 308-334.

 

-------------------, “The Voice at the Center of the World: The Pythia’s Ambiguity and Authority,” in Making Silence Speak: Women’s Vocies in Greek Literature and Society, ed. By André Lardinois and Laura McClur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1. 38-54.

 

Flower, Michale, The Seer in Ancient Greec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8. 

 

Kentridge, William, Waiting for the SibylDirected by William Kentridge, music by Nhlanhla Mahlangu and Kyle Shepherd https://www.kentridge.studio/william-kentridge-projects/waiting-for-the-sibyl/

 

Tompkins, Kyla Wazana, “We Aren’t Here to Learn What We Already Know,” https://avidly.org/2016/09/13/we-arent-here-to-learn-what-we-know-we-already-know/ 

 

그리고 ChatGPT 4o와의 수많은 대화들

 

 

 

 

최화선_
서울대학교
논문으로 <“씌어지지 않은 것을 읽기”: 점술의 사유와 이미지 사유>, <이미지와 응시:고대 그리스도교의 시각적 신심(visual piety)>,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 남장여자 수도자들과 젠더 지형>, <기억과 감각: 후기 고대 그리스도교의 순례와 전례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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