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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881호-옛한글 목판본 종교 문헌 읽기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5. 5. 6. 15:31

옛한글 목판본 종교 문헌 읽기

 

news letter No.881 2025/5/6

 

 

요즘 젊은 벗들과 공부하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3월부터 한 학기 동안 종교 문헌 강독 수업을 하고 있다. 지난 겨울 방학 때 강독 자료를 정했는데, 선정 조건은 네 가지였다. 시기는 대략 19세기에 나온 것으로 잡았다. 아래아가 잔뜩 들어가고 초성에 합용병서를 남발하며, 띄어쓰기가 없을뿐더러 구개음화가 전혀 안 되어 있어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옛한글로 적힌 문헌을 택했다. 목판에 새겨서 찍은 것을 골랐다. 여러 종교의 문헌을 골고루 뽑는 것이 마지막 조건이었다. 그렇게 해서 19세기에 만들어진 옛한글 목판본 불교, 천주교, 동학 문헌 읽기가 이번 학기 수업의 주제이다.

 

3월에는 1795년 양주 불암사에서 만든 경판으로 찍은 불서 금강 영험전을 읽었다. 그 속에는 지경 영험전이라는 제명으로 열아홉 편의 영험담, 관세음보살 지송 영험전이라는 제명으로 스물다섯 편의 영험담이 들어 있고, 마지막에는 수선곡이라는 불교 가사가 실려 있었다. 불교 영험담을 분석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수업의 목표는 아니었다. 오로지 목판본 옛한글 문헌을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가는 훈련만 하였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내용이 눈에 들어오고 그 의미를 분석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지금은 어느 지점에서 끊어 읽어야 할지,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를 익히는 것이 급했다. 처음에는 어려워하다가 몇 주 지나니 다들 줄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영험담 자체는 난해한 이야기가 아니다. 금강경이나 관음경을 지성으로 외우거나 관세음보살의 명호만이라도 부르면 이 세상에서 만나는 온갖 재앙을 피할 수 있으며, 죽어서 명부에 가더라도 큰 벌을 면한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수록된 영험담은 전부 수나라, 당나라, 원나라, 명나라 등 중국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이다. 그러니까 중국 불교 문헌을 번역한 것이라 하겠다. 18세기 말 조선에서 판각한 문헌이라면 신라나, 고려, 조선을 배경으로 한 영험담도 들어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건 또 왜 그럴까?

 

영험전, 즉 불교의 기묘한 이야기 모음집에 관하여 기존에 나온 연구를 찾아보니 대부분 법화경 영험전 연구였다. 그런데 금강경 관련 영험전을 다룬 연구는 없을까 하며 뒤지다가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이 1974년에 간행한 학술지 불교학보11호에서 한국의 금강경 신앙과 영험전이라는 논문을 발견했다. 1974년 논문이니 한국의 학계에서 영험전에 관한 연구로는 거의 최초에 해당하지 않을까?

 

저자가 누구인가 보고는 깜짝 놀랐다. 바로 이민용 선생님의 논문이었다. 이민용 선생님은 1964년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1966년에 이기영 선생님의 지도 아래에 미륵사상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으셨다. 1974년이면 아마 동국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나서 강사로 활동하시던 무렵이 아닐까 싶다. 이때 불교를 연구하면서 영험전 문헌에도 주목하셨던 것 같다.

 

경전이 지닌 종교적 내용들인 교학 체계, 사상들과는 관계없이 또는 그 내용에 근거하여 시대적, 지역적 여건에 따라 혹은 민속적 성격에 따라 신앙은 변형되어 민간에 수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형 혹은 정착 과정에서 특정한 경에 대한 신비한 사건들, 영험적인 전설, 설화가 발생되고 그것들은 민간의 애호를 받으며 일정한 형태의 영험전, 지험기 등으로 수집, 편찬되었다.”

 

이민용 선생님의 논문에서 가져온 구절이다. 역시 불교를 연구하더라도 종교학도의 관점과 접근은 달랐다. 심오한 사상을 탐구하는 것이 불교 연구의 본령일 수 있겠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민간에 전승되고 민간의 신앙으로 뿌리를 내린 불교 이야기, 불보살에 의지하고 극락왕생의 희망을 안고 살았던 사람들이 체험으로 간직한 이야기인 영험담을 연구하는 것도 학자의 조명을 받을 만하다.

 

4주 동안 강독한 뒤에는 실물을 견학하기로 하였다. 양주 불암사에 경판이 보존되어 있었다. 하지만 알아보니 300개가 넘는 경판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는데, 1킬로그램이 넘는 경판들을 일일이 꺼내어 확인하고 우리가 강독한 금강 영험전경판을 찾아서 보여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암사를 찾아가는 것은 포기하였다. 대신 장서각에 연락하여 19세기와 20세기에 간행된 목판본 불서 실물을 견학하였다.

 

장서각 소장 불서 견학도 좋았다. 라텍스 장갑을 끼고 문헌을 들추면서 표제, 권수제, 판심제를 확인하고, 목판본의 실물을 직접 만져보는 경험은 종교 문헌을 생생한 현실로 만나는 순간을 제공해 주었다. 특히 1936년에 목판본으로 간행된 묘법연화경 언해는 실물 견학이 왜 필요한지를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책의 마지막 면에 딱지가 붙어 있었다. 경성부 연지정 28번지에 사는 김종화라는 사람이 불경 인출 시주를 한 것인데, 목각판은 000에 보관하고 있으니, 누구든지 인출하고자 하면 주지에게 직접 상의하라는 글이 인쇄되어 있었다. 아마 불경을 널리 보급하는 법보시의 공덕을 쌓고자 하여, 목판을 제작하고 원하는 사람들에게 찍어서 보내준 것 같다. 이 딱지의 글에서 목각판 보관 장소는 붉은색으로 인쇄되어 온라인 원문 보기로는 보이지 않는다. 직접 실물을 보아야 확인할 수 있다.

 

4월에는 천주교 문헌 신명초행을 읽었다. 금강 영험전의 판각 상황은 그야말로 양반이었다. 글자를 한자씩 또박또박 정성 들여 판각해서 글자를 판독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천주교 문헌은 완전 흘림체였다. 거의 필사본에 가까웠다. ‘ᄅᆞᆯ인지 ᄅᆞ인지 분간할 수 없었고, ‘ᄀᆞ는 아예 감으로 때려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옛한글 목판본 문헌은 큰 소리로 리듬을 타면서 읽어야 그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고 하나보다.

 

4주 강독을 끝냈으니 곧 천주교 문헌 실물을 견학하러 갈 것이다. 아마 이 글이 독자들을 찾아갈 때쯤이면 우리는 명동에서 신명초행목판본을 직접 보고 나와서 맛있게 저녁을 먹고 있을 것이다. 명동에 맛집이 많다던데 어디 가지? 원래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 먼저 눈이 가야 정상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5월에 계미판 용담유사를 강독하고 나서 실물을 보려면 어디에 알아보아야 할까?

 

 

 

 

 

조현범_

한국학중앙연구원

올해로 5년째 초대 조선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평전 쓰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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