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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레터

882호-어떻게 함께 갈 것인가

한국종교문화연구소 2025. 5. 13. 15:16

어떻게 함께 갈 것인가

 

 

 news letter No.882 2025/5/13

 

 

 

 

이 글은, 근래 필자가 목매고 있는 반성 가운데서도 희망의 실마리를 찾고자 쓰는 것이다. 나의 인지(認知) 회로가 뒤죽박죽 엉켜버린 느낌으로 몇 개월을 지내다 보니, PTSD 유병이 의심된다.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그 진단기준이 되는 증상으로서 무력감 · 감각 및 의욕 저하 · 집중력 저하 · 수면 장애 · 짜증 및 분노 증가 · 자주 놀람 등등이 상당기간 반복되는 경우이다. 지난 12월 이후 비슷한 증상을 토로하는 친구들이 여럿이다.

 

그간 나라 밖에서는 수시로 어떤 종교들이 전쟁의 불씨가 되었고, 종교계가 정치권력과 야합하는 세계사를 충분히 학습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서 근래 더욱 거칠어진 예배(?)와 아스팔트 위에 쓰레기처럼 던져지는 각종 아멘을 보면서, 기묘한 자괴감이 느껴진다. 우리끼리는 평생 학업에 종사하고 종교분야에서 나름의 지식인이고자 했을 테지만, 거룩한 종교와 그에 대한 지식이라는 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구처럼 느껴지는 요즘이다. 복잡다기(複雜多岐)한 우리 종교계의 실제와 그 이면(裏面)에 대해서 무지한 채로, 그저 말하기에 좋고 듣기에 편한 법담이나 되풀이 해온 것 같아서, 내 자신이 부끄럽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우울한 레퍼토리를 자주 옮기면 서로 미안한 노릇이므로, 나는 하릴없이 AI(ChatGPT)에게 물어보았다. 지금 대한민국은 공격성 · 적의(敵意) · 불신 · 파당(派黨) 등으로 희대의 곤란에 처해 있는데, 바른 종교인의 역할은 무엇일까. AI의 답은 아래와 같다.

 

1)정치권력과의 거리두기: 종교인은 권력에 기생하거나 편승해서는 안 됩니다. 정치와 지나치게 결합된 종교는 정당성을 잃고, ‘영적 권위’는 ‘정치적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종교인은 누구의 편이 되기보다 시대정신과 진리의 편에 서야 합니다. 2)윤리적 기준과 사회적 양심 제시: 혼란한 정치 속에서 종교인의 역할은 도덕적 기준과 공공선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예컨대 부정부패, 인권 침해, 혐오 조장, 거짓 선동 등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야 합니다. 3)화해와 중재자로서의 자세 : 지금 한국 정치판은 진영논리, 적대감, 혐오담론이 극단적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종교인은 이 틈에서 다리를 놓는 사람(bridge-maker)이어야 합니다. 공동체 내에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갈등을 줄이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누가 옳은가”보다 “어떻게 함께 갈 것인가”를 묻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4)청렴성과 자기성찰의 모범 : 정치인들이 부패하고 타락할 때, 종교인마저 위선적이라면 사회는 절망합니다. 따라서 종교인은 더욱 투명하고 청렴하고 자기희생적인 태도로 삶의 진실을 보여줘야 합니다. 5)현실 회피도, 정치 도구화도 아닌 깨어 있는 제3되기: 현실을 직시하고 정의를 말하되, 권력을 탐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밑줄은 필자가 그은 것).

 

똑똑한 AI가 거듭 내게 답하기를, ‘한국인에게는 난국을 극복한 경험과 역량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마주하려는 용기,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태도, 공동체를 위한 책임감, 이 세 가지가 사회 전반에서 실천되지 않는다면, 역량은 잠재력으로만 남게 될 것입니다. 역량을 실현하는 건, 지금 우리의 선택과 행동입니다.’ 라고 했다. 충분히 합리적인 답변이라 여겨지므로 나는 기꺼이 수긍하였다.

 

종교계 일부가 평소 정치판과 모종의 뒷거래를 한다는 것은 다들 짐작해 왔겠지만, 최근처럼 노골적으로 정치판에 끼어들게 된 것은 우선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치인들 탓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국의 정치를 비평한 글에 의하면, 독재의 평범성(banality of authoritarianism)을 가진 정치인들은 민주주의 존폐보다 개인의 정치 경력을 더 중요시한다.1) 무엇보다도 자신의 권력을 놓칠까 봐 두려워하고, 표면적으로만 충직한 척하는 정치인들이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지켜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이는 일반사회 정치활동에서만 나타나는 문제가 아니다. 크고 작은 종교조직 안에서도 권력을 쥐고 있는 소수의 교직자[경영자]들은, 마치 정치인들처럼, 자신의 위세와 권한에 폭삭 빠져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예컨대, 광화문 아스팔트 교회의 목회자들과 거기에 추종하는 신도들을 보면, 그 안에서 권력의 악취가 하늘을 찌르는 듯하다. 그 신도들 사이에서는 정말로 아무런 의심도 일어나지 않는가.

 

그러므로 바로 지금 평범하고 건전한 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궁리를 하게 된다. 아주 어리석은 고백이지만,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내 주위에 그토록 많다는 점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늘까지 살아왔다. 학문이라는 직업적 특성을 포함해서, 나의 자기중심적인 판단력과 습관적인 거리두기가 그 원인일 것이다. 신앙하는 바가 서로 다른 사람들과도 별문제가 없다고 여겼지만, 실은, 나의 태도는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매너에 지나지 않았다. 나와 다른 누군가를 진정으로 이해하려고 애쓴 적이 별로 없고, 내 생각을 상대방에게 더 잘 이해시키려고 애쓴 적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심지어는 내 견해에 이의(異意)가 있는 사람을 원망하거나, 다시는 안 볼 셈으로 돌아서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과정에서 내가 놓친 것이 많았으리라는 후회가 이제야 떠오른다. 그래서 나의 혁신과업의 제 1호는, 언제든지 광화문에 가서 아스팔트 신도와 이야기를 나누고 피차 이해심을 가져보기로 예정한다.

 

흔히 자기본위로 사는 사람들이, 상대방의 나와 다른 점을 당연히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 지점에서 불교적 존재론이 유용하다. 만사만물은 인연조건(因緣條件)에 따라서 생멸하므로, 본래부터 모든 것이 서로 다르다는 대()전제를 잊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그리하여 상대방의 견해도 고유한 맥락 아래 조건문으로 읽는 연기적 사유가 훈련된다면, 상대방 견해의 나와 다름을 자연히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2) 이것은 원효가 일깨운 화쟁(和諍)의 일상생활 버전(version)이라 하겠다. 또한, 언제 어디서나 상대방의 옳음[一理]에 대한 숙고를 하고, 자기 자신의 무지(無知)에 대한 자각이 깨어 있어서, “있는 그대로 · 복수의 옳음으로 확장하는 생활양식으로서의 화쟁3)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과연 우리는, 모든 상대방이 나와 다름을 자연의 이치처럼 전제하고, 상대방들에게서 예외 없이 일리(一理)들을 발견하고, 번번이 나의 무지(無知)를 자각할 수 있을까. 누구라도 실험적인 착수가 필요한 때이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정치사회의 갈라진 틈에 다리가 되어주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함께 갈 수 있도록, 평범한 종교인 다수의 각성과 실천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당장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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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세연 역, Steven Levitsky & Daniel Ziblatt,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Tyranny of the Minority』 2024, 어크로스. pp.73;182.

2) 박태원, 「원효의 화쟁논법과 쟁론치유」 『불교학연구』 제35호, 2013. pp.124-125.

3) 조성택, 「화쟁의 해석학적 함의와 현대적 의미」 『한국불교학』 93집, 2020. pp.225-227.

 

 

 

 

 

 

 

 

이혜숙_
계간 불교평론 편집위원장, 국제참여불교네트웤(INEB) 집행위원
논문으로 <종교사회복지의 권력화에 대한 고찰>, <한국 종교계의 정치적 이념성향 연구를 위한 제언>, <시민사회 공론장 확립을 위한 불교계 역할>, <구조적 폭력과 분노, 그 불교적 대응>등이 있고, 저서로 《아시아의 종교분쟁과 평화》(공저), 《임상사회복지이론》(공저),《종교사회복지》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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