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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장과 종교체계
news letter No.892 2025/7/22
1.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1930~2002)는 프랑스 남서부의 댕갱(베아른 지역)에서 태어나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알제리 현지 조사를 계기로 사회학·인류학 연구로 방향을 틀었다. 이후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과 국립과학연구원(CNRS)을 거치며 ‘장-자본-하비투스’ 이론틀을 정립했고, 『구별짓기(La Distinction)』(1979)와 『국가귀족(La Noblesse d’État)』(1989) 등을 통해 문화소비·교육·국가권력을 분석했다. 그의 연구는 행위자(agent)가 처한 사회적 위치와 체화된 성향이 어떻게 실천으로 재생산되는지를 밝히는 데 집중돼 있다.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1927~1998)은 독일 뤼네부르크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후 행정 공무원을 지내다 하버드대 방문 연구에서 탈코트 파슨스의 기능주의를 접한 뒤 사회학으로 진로를 바꿨다. 뮌스터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빌레펠트대 교수로 재직하며 『사회적 체계(Soziale Systeme)』(1984)를 비롯한 7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그는 사회를 의사소통이 자기생산(self-reference)되는 다수의 기능 체계들—법, 정치, 경제, 종교 등—로 파악했고, 각 체계가 고유의 이원적 코드(예: 초월/내재)로 의미를 처리한다고 설명했다.
두 학자의 이론은 종교를 사회학적으로 바라보게 해 주는 두 개의 렌즈, 곧 ‘종교장’과 ‘종교체계’를 제공한다. 부르디외는 종교를 상징자본을 둘러싼 경쟁의 장으로, 루만은 초월/내재라는 이원적 코드로 의미를 처리하는 자율적 체계로 설명한다. 두 틀 모두 종교가 독자적인 규칙과 자원을 지닌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지만, 전자는 행위자 간 권력·위치 역학에, 후자는 의사소통 구조와 의미 구획 방식에 초점을 둔다. 이러한 유사성과 차이를 함께 검토하면 종교라는 복합적 현상을 종교사회학적으로 이해할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2.
우선 부르디외는 종교장(religious field)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종교적 재화의 생산·재생산·유통을 목적으로 특별히 발전한 ‘청구(권리)’가 성립되는 과정과, 이러한 청구들의 체계가 보다 분화되고 복잡한 구조—곧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종교장—로 진화하는 과정은, 종교적 실천과 표상을 체계화하고 도덕화하는 과정이 동반된다.”1)
이것을 풀어서 말해보자면, 종교적 구원과 같은 ‘종교 재화’를 만들고 퍼뜨리기 위해 사람들이 “이 권리는 우리 몫이다”라고 주장하는 과정이 일어나는데, 이러한 권리들이 서로 얽혀 점차 복잡해지면서, 다른 사회 영역과 구분되는 비교적 독립적인 장(場), 즉 종교장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변화는 동시에 종교 의례와 신념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정리하고, 거기에 도덕적 의미를 덧입히는 과정과 맞물려 진행된다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구원(salvation)의 재화(goods)를 관리‧분배하는 권한이 종교 전문인 집단에게 독점되면, 이들은 그 재화를 생산·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특별한 능력을 보유한 유일한 소유자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 그 능력은 의도적으로 조직된, 비밀스러우며 희소한 지식의 묶음(corpus)에 기반한다. 이렇게 형성된 독점과 함께 종교장이 탄생하며, 동시에 그 장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평신도’ 혹은 ‘속인(profane, 두 가지 의미에서)’으로 규정된다. 그들은 (축적된 상징적 노동으로서의) 종교 자본을 박탈당한 채, 바로 그 박탈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그 정당성을 승인한다.”2)
또한 부르디외는 “종교장이 구원의 재화를 거래하는 시장으로서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다”고 보면서, 시대마다 종교적 정당성을 두고 경쟁하는 집단들, 예를 들어 사제단, 예언자, 평신도 지도자 같은 ‘청구자(claimant)’들 사이의 관계 구조가 달리 나타나는데, 그는 이런 각각의 역사적 배치를 “변형 체계 속의 한 순간”으로 본다. 곧, 한 시점에 보이는 구도는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흐름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3)
결국 부르디외는 종교장을 구원의 재화를 전문적으로 생산·재생산·배분하려는 과정에서 형성된,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경쟁 공간으로 본다. 이 장은 상징자본의 주요 공급지로서 정치·경제·교육 등 다른 장에 초월적 정당성을 부여하거나, 반대로 세속 권력에 의해 제약을 받기도 한다. 교회와 예언자 집단처럼 내부 위계는 사회 전체의 계급 구조와 권력장에 서로 맞물려 유사한 형태로 반영되며, 역사·사회적 조건에 따라 전문가 집단의 조직화 수준, 평신도의 종교 수요, 외부 권력과의 관계가 달라지면 종교장의 경계와 규칙도 재조정된다. 요컨대 그는 종교장을 자본의 독점이 배제와 경쟁으로 이어지는 동학 속에서, 다른 장과 끊임없이 힘겨루기를 벌이는 상징 권력의 장으로 정의한다.
3.
다음으로, 루만은 종교체계(religious system)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전적인) 종교사회학은 이렇게 인간에 집중함으로 인해, 소통(communication)을 다루지 않는다(아니면 기껏해야 아주 부수적인 의미에서만 소통을 다룬다). 우리는 이 결함을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의 결함이라면) 사회학적 종교이론의 과제를 새롭게 기술하는 출발점으로 삼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인간 개념을 소통 개념으로 대체하고, 그로써 전통의 인간학적 종교이론을 사회이론으로 대체하고자 한다.”4) 간단히 말해, 종교는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의사소통 체계라는 것이다.
루만은 또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이가 종교가 무엇이며 종교적인 것을 비종교적인 것으로부터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지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자마자, 다음 순간 누군가 와서 이 기준(예를 들어 존재하는 신에 대한 관련)을 부정하며 그리고 바로 그 기준이 종교적인 자질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중략) 오히려 종교는 자기 자신을 지시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에게 형식을 부여할 수 있는 그런 사태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가 자기 자신을 정의하고 그 정의와 양립 불가능한 모든 것을 배제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중략) 체계는 체계가 아닌 것을 함께 통제할 때만 자율적이다. 종교는 그런 사태와 관련하여 외적으로 2차 질서 관찰의 양상에서만, 고유한 자기관찰의 관찰로서만 정의될 수 있다—외부로부터 본질을 투입하여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5)
이것을 풀어서 말해보자면, 우선 종교를 한 줄로 딱 잘라 정의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인데, 예컨대 누군가 “이것이 종교다”라고 기준을 세우면, 금세 다른 사람이 “그 기준으로 보면 어떤 사례는 빠지는데?” 하고 반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종교는 스스로를 정의하고 경계 짓는 방식으로만 성립한다는 것이다. 종교 체계 안에서는 “우리(종교)”와 “우리 아닌 것(비종교)”을 가르는 규칙이 있는데, 이 규칙을 따라야만 종교적 소통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종교는 자기가 인정하는 방식으로만 자기 자신에게 ‘형식’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결국 외부에서 보는 ‘객관적 정의’는 한계가 있다는 것인데, 다른 학문이나 일상적 시각이 “종교란 ○○이다”라고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종교체계 내부가 스스로 내세우는 정의와는 다르기 때문에 외부 관점만으로는 종교의 본질을 다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체계 내부와 관련하여 루만은 이렇게 말한다: “종교에 특화된 코드의 두 값을 지시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것은 내재성(immanence)과 초월성(transcendence)의 구분이다. 그러면 내재적인 것을 초월성의 관점에서 고찰할 때는, 소통은 언제나 종교적인 것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내재성은 긍정 값, 즉 심리적 작동들과 소통적 작동들을 위한 연결 능력을 마련하는 값을 대변하며, 초월성은 발생하는 것이 우연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입지가 되는 부정적인 값을 대변한다. 귄터의 용어로는 내재성은 코드의 지시 값이고 초월성은 코드의 성찰 값이다.”6)
이것 역시 풀어서 말해보자면, 루만에게 종교체계는 ‘내재성/초월성’이라는 이원 코드를 통해 작동하는데, 내재성은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고 상호작용하는 세계를 가리키며, 긍정값으로서 심리적 · 소통적 행위를 서로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반면 초월성은 그 세계를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게 하는 ‘바깥의 시선’을 제공하는 부정값으로, 현실을 낯설게 비추어 “왜 이런 의미가 생겼는가?”를 성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재성은 현실을 직접 가리키는 지시 값이고, 초월성은 그 지시 행위를 되돌아보게 하는 성찰 값이다. 두 값이 한 세트로 맞물릴 때, “현실을 초월적 관점에서 재해석한다”는 특유의 종교적 소통이 발생한다. 이 코드는 다른 기능체계의 코드, 예컨대 경제의 지불/미지불, 법의 합법/불법처럼 경험적으로 판별 가능한 값과 달리, 한쪽을 경험으로 검증 불가능한 ‘초월’에 고정해 두기 때문에 무한한 의미 확장성을 지니며 다른 체계와의 상호의존성이 상대적으로 낮다. 바로 이 점이 종교체계를 궁극적 의미의 최종 보루로 만들고, 사회의 불확실성을 완충하면서도 독자적 자율성을 유지하게 하는 핵심적 독특성이다.7) 결국 루만에게 종교란 초월/내재라는 배타적 이원 코드를 통해 의미를 생산·재생산하며, 그로써 사회의 불확실성을 완충하는 자율적 의사소통 체계라 할 수 있다.
4.
부르디외의 종교장과 루만의 종교체계는 모두 “자율적 규칙에 따라 작동하며, 다른 사회 영역과 구별된 의미 구조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두 이론은 사회가 기능적으로 분화한 결과 특정 영역이 독자 규칙을 획득한다고 전제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초점과 설명 장치는 확연히 다르다. 부르디외는 장 내부에서 축적·독점된 종교 자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하비투스 간 갈등과 투쟁을 분석한다. 반면 루만은 종교를 초월/내재라는 이원 코드와 이를 매개하는 프로그램(교리·의례·조직 등)이 만들어 내는 의사소통 네트워크로 본다. 다시 말해 전자는 “누가 어떤 자본을 독점하느냐”를, 후자는 “어떤 이분법이 의미를 선별하느냐”를 핵심 변수로 삼는 셈이다.
이 차이는 두 학자의 상호 비판 지점에서도 드러난다. 루만은 부르디외가 상징적 폭력 개념을 통해 사회·경제 구조와의 연계를 강조하지만, 정작 그 개념 자체가 수행하는 자기생산적 역할, 즉 개념과 이론이 현실에서 또 다른 상징폭력으로 기능할 가능성을 성찰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8) 반대로 부르디외는 루만의 체계 개념이 “투쟁, 곧 역사성”을 등한시한다면서, 장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갈등 동학이 체계 이론에서는 흐릿해진다고 반박한다.9) 요컨대 루만은 부르디외의 분석이 코드화의 추상적 형식까지 도달하지 못했다고 보고, 부르디외는 루만의 분석이 구체적인 실천적 역학을 간과한다고 본 것이다.
종교장과 종교체계라는 두 렌즈를 겹쳐 보는 상상을 해 본다. 종교장은 행위자들의 체취가 묻어나는 살아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 매력적이고, 종교체계는 초월/내재라는 이원 코드로 의미를 날카롭게 잘라내는 추상적 분석력이 흥미롭다. 부르디외의 장 개념을 바탕으로 하되, 장 내부 하비투스 갈등을 루만의 코드 개념으로 세밀하게 조명해보는 방안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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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ierre Bourdieu, “Genesis and Structure of the Religious Field,” Comparative Social Research 13 (Greenwich, CT: JAI Press, 1991), 7–8.
2) Pierre Bourdieu, “Genesis and Structure of the Religious Field,” Comparative Social Research 13 (Greenwich, CT: JAI Press, 1991), 9.
3) Pierre Bourdieu, “Genesis and Structure of the Religious Field,” Comparative Social Research 13 (Greenwich, CT: JAI Press, 1991), 23.
4) 니클라스 루만, 『사회의 종교』, 이철 옮김, 이론출판사, 2024, 16-17.
5) 니클라스 루만, 『사회의 종교』, 이철 옮김, 이론출판사, 2024, 18.
6) 니클라스 루만, 『사회의 종교』, 이철 옮김, 이론출판사, 2024, 91.
7) 니클라스 루만, 『사회의 종교』, 이철 옮김, 이론출판사, 2024, 148.
8) 니클라스 루만, 『사회의 종교』, 이철 옮김, 이론출판사, 2024, 120-121.
9) 피에르 부르디외·로익 바캉,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 이상길 옮김, 그린비, 2015, 181-184.
_김재명
건양의대 의료인문학교실
최근 논문으로 “한국개신교 하비투스의 형성과 변형: 극우 개신교의 부상과 하비투스의 재구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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