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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을 흘리다가 땅강아지
news letter No.893 2025/7/29
너무 덥다. 체온보다 바깥 기온이 더 높다. 그래서 숨을 토해내며 체온을 낮추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열기를 뿜어대는 선풍기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지금은 6월 윤달에 속하므로, 이 무더위가 자리 잡고 거듭하는 느낌이다. 두 개의 고기압이 한반도에 겹쳐있어서, 두꺼운 이불 두 채가 덮고 있는 모양이라는 기상발표를 들으니, 더욱 숨이 막힌다. 그렇다고 ‘공기조절’이라는 핑계를 대며 갑질을 일삼는 자에게 동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쪽 더위를 저쪽으로 전가하며 결국 더위의 총량만 더 하는 자의 횡포를 보면서 어찌 그와 함께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남은 것은 수백만 년 전부터 이어져 온 방법뿐이다. 그저 땀이 흘러나와 마르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우리 조상이 땀샘을 장착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이점이 있던 유인원의 털을 포기하였다는 점에서, 땀을 증발시키는 방법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혹시 혹서(酷暑)기의 한 가지 대책으로 땀-증발의 선택지를 고려하는 분이 있다면 다음의 한 가지 방식을 추천하고 싶다. 그것은 정좌(靜坐)와 결합한 방식이다. 즉 가만히 앉아서 저절로 땀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이른바 땀 알아차림 혹은 땀 명상이라고 할 만하다. 움직이면서 하는 방식도 가능하지만, 아무래도 땀 명상의 경우에는 가만히 앉아서 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명상 수행에는 언제나 따라오는 것이 있다. 표리일체라거나 내재화된 조건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으로 잠과 잡념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는 제거하려고 하면 할수록 달라붙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명상을 행하는 이들에게 불면증이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잠의 폭격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자행되는 것인지!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잠이 쏟아져 고통당하는 명상 수련자의 하소연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수마(睡魔)라고 일컬어지는 ‘허들’을 넘으면 반드시 잡념의 막강함이 기다리고 있다. 잊고 있던 옛날 기억이나, 자기 머릿속에서 나왔다고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온갖 기괴하고 잡동사니 기억 파편이 줄줄이 솟구쳐 나온다. 제지하려고 했다가는 오히려 기름을 붓는 격이 된다. 이때 필요한 것은 잠자코 지켜보며 사그라들기를 기다리는 일이다. 잡념은 극지방의 오로라처럼 제멋대로 움직이다가 어느덧 사라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잡념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에 따라 명상의 고수(高手)와 하수(下手)를 구분할 수 있다. 하수는 잡념을 박멸하고자 하면서 잡념에 스토킹 당하는 자이다. 안달복달하면서 명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고수는 잡념에 대해 “오는 자, 막지 않고, 가는 자, 붙잡지 않는” 자세를 취한다. 자신의 몸에서 땀이 흐르고, 증발해 사라지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하지만 고수와 하수 어느 쪽도 아닌 자가 있다. 고수의 격조에 이르지 못한 것은 분명하지만, 하수의 편집증적 태도와도 거리를 두는 자이다. 예컨대 땀 명상 중에 풀려나온 예전의 기억 더미에 파묻혀서 멍한 상태로 홀린 듯 있는 자가 거기에 속할 것이다. 그는 수마에 빠지는 대신 옛날의 기억 속으로 깊숙이 머물게 된다. 명상이 추구하는 현재 상태의 알아차림 대신, 그는 저절로 펼쳐지는 옛 기억의 풍경으로 풍덩 뛰어드는 것이다.
깊어가는 여름밤, 백열전구나 형광등이 방 한쪽 구석을 비추고 있다. 곧 꺼질 빛을 향해 낮 동안 나무와 풀 틈에 숨어있던 온갖 벌레가 날아든다. 파리와 모기는 말할 것도 없고, 각종 풍뎅이, 잠자리, 매미, 사마귀, 나방 등의 벌레가 총출동한다. 몸 전체를 던져 불빛으로 돌진하는 얘들도 적지 않아 부딪힐 때 ‘타다닥’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촛불이나 남포불에 뛰어들어 스스로 몸을 불태우기도 한다. 곧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던 우리들은 대부분 그들의 무모한 행태에 신경을 쓰지 않지만, 불현듯 모든 것을 바쳐 기구하는 정열로서 그들의 몸짓을 다시 해석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악을 쓰며 “불나비”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녔을 것인가! 껍질이 무지개 색깔로 아른거리던 풍뎅이도 기억난다. 풍뎅이 다리를 자르고 등껍질을 떼어내 날개로 마당 쓸기를 하게 만들며 놀던 장면(풍뎅이에게 속죄한다)이 생생하다. 그와 함께 풍뎅이를 손에 잡고 있을 때, 풍뎅이 몸에서 풍기는 특유의 짙은 냄새가 곁에 감돈다.
하지만 최근 두꺼운 이불 두 채를 겹두르며 퍼올린 잡념 중에서 계속 머리에 빙빙 머무는 것은 땅강아지다. 땅강아지는 누가 보더라도 싫어할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손에 잡고 있으면, 넓적한 앞발로 꼬물꼬물 나가려는 힘을 느낄 수 있다. 물속에서 헤엄을 할 수 있고 짧은 날개로 날아다닐 수도 있으며 땅속을 뚫고 다닐 수도 있다. 그러면서 땅강아지 몸은 늘 깨끗하다. 솜털 덕분에 물에 젖지 않고, 흙도 묻지 않는다. 무엇보다 땅강아지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그에게 무관심할 수가 없다. 두더지 같은 앞발과 토실토실한 몸뚱이를 거의 퇴화해버린 듯한 날개로 들어 올려 나는 땅강아지의 신기(神技)를 목격하면 더는 그를 무심하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짧은 날개의 뒤영벌을 내가 좋아하게 된 것도 모두 땅강아지 때문이다. 메뚜기나 잠자리를 만질 때와는 다르게 땅강아지의 몸은 보들보들한 부피감이 있다. 이런 것이 다 합해져서 땅강아지는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런 땅강아지가 낮 동안에 땅속에 숨어있다가 그 여리여리한 날갯짓으로 수없이 전등 빛을 향해 날아와 부딪힌다. 그러다가 하룻밤에도 여러 마리가 바닥에 떨어져 밟혀 죽기도 하고 병신이 되기도 한다. 벌레나 짐승에 관한 어릴 적 기억은 늘 그들의 죽음과 함께 한다.
증발하는 땀 가운데 땅강아지의 기억이 떠오른 것은 내 주변에서 더는 땅강아지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많던 땅강아지는 어디로 갔는가? 짧은 날개로 힘겹게 날아와 여름밤 전등에 부딪혀 죽던 땅강아지는 왜 살던 곳을 떠난 것일까? 소설가 박완서(1931~2011)에게 사라진 것이 어릴 적 지천으로 있던 싱아였다면, 나에게는 할미꽃, 제비, 그리고 땅강아지가 그에 해당한다. 물론 세 가지 모두 멸종된 것은 아니기에, 영영 사라진 도도새처럼 애도의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내 생활권에서 이미 멀리 벗어나 있어서, 이젠 땀 명상의 한 가지 잡념으로서만 등장하게 되었다.
동남풍이 운반해온 무더운 공기를 두꺼운 이불 두 채가 꽁꽁 싸매어 한반도에 폭염을 선사한 덕분에 필자는 ‘땀 명상’의 외로운 길을 개척하게 되었다. 안팎의 온도 차이가 없거나 바깥 기온이 더 높아서 부채나 선풍기는 도통 소용이 없었으며, 갑질 횡포를 일삼는 에어컨도 윤리적으로 고려할 만한 대안이 되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수백만 년 동안 인류가 검증한 땀-증발의 방식뿐이며, 여기에 정좌를 더해 땀 명상이라고 명명하였다. 문제는 그러다가 명상에서 벗어나 초등학교 수준의 옛 기억 속으로 빠져 버렸다는 점이다. 그것이 느닷없이 땅강아지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이런저런 탈출구를 봉쇄하고 폭염으로 숨통을 조이듯이 하니, 열 살 전후의 기억대(記憶帶)에 회귀하게 된 셈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기후 위기가 더욱 심각하게 전개되어 무자비한 폭염이 이 땅을 지배하게 되고, 그것을 완화할 수 있는 방도를 찾을 수 없는 처지에서 ‘땀 명상’을 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초등학교 시간 때를 벗어나 태어나기 전의 시간대에 접선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혹시 구스타브 융의 집단무의식이거나 자크 라캉의 실재계와 연결되는 끈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더워서 미칠 것 같은 날에는 모든 헛것에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리.
장석만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한국근대종교란 무엇인가?》, 《한국 종교학 - 성찰과 전망》(공저)의 책과 <두 가지 몸의 늙음: 한국 근대 노년 관점의 변화>, <식민지 조선에서 여자가 운다>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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