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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텔 문서>의 전설적인 운명, 환갑의 나이에 돌아옴
news letter No.908 2025/11/11
천주교 선교사 귀스타브 뮈텔(Gustave Mutel, 1854~1933) 신부는 1880년부터 1885년까지 5년 동안 조선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프랑스로 귀국하여 6년 동안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자로 근무한 뒤에, 조선 대목구의 주교로 임명되어 1891년부터 1933년 사망할 때까지 42년 동안 조선에서 활동하였다. 뮈텔 주교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재임하던 기간은 개항기와 대한제국기를 거쳐서 일제강점기 중반에 이르는 시기였다. 그래서 뮈텔 주교는 격동의 근대사 속에서 다양한 정치적, 외교적, 사회적 변화를 경험하였다.
뮈텔 주교는 재직하는 동안에 매년 자신이 받은 공적 서한과 보고서들, 사적인 친분으로 주고받은 서한과 명함, 연회 초대장,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오려둔 신문 기사나 각종 서류 등을 빠짐없이 엮어서 문서철을 만들어 두었다. 일차적으로는 ‘교회 행정 관련 문서’와 ‘교회 행정과 무관한 문서’로 구분하였다. 그런 다음에 해당 문서들을 각각 한지로 포장하고 천으로 된 튼튼한 끈을 둘러 묶은 다음에 그 겉에다 연도를 표시하였다. 이것을 다시 마분지로 된 종이 상자에 연도별로 넣어서 보관하였다. 뮈텔 주교가 사망할 때 남겨진 종이 상자의 수효는 100여 개였다.
뮈텔 주교가 남긴 문서철은 그의 사후에 명동 주교좌성당의 지하실에 보관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후반과 태평양전쟁, 해방과 한국전쟁의 혼란기에도 유실되지 않았다. 이 문서들을 다시 발견한 사람은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최석우 신부였다. 그는 1964년에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에 취임하자 천주교 서울교구의 모든 기관이 소장하고 있던 사료들을 한국교회사연구소로 이관하는 과정에서 명동 주교좌성당의 지하실에서 뮈텔 주교가 남긴 자료들을 발견하였다. 그러자 최석우 신부는 이 자료의 사료적 가치를 알아보고 1966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이원순 교수에게 문서 정리를 의뢰하였다.
최석우 신부와 이원순 교수는 협의 끝에 이 문서들의 명칭을 <뮈텔 문서>로 정하고, 1967년부터 문서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1969년에 이원순 교수는 <뮈텔 문서>의 존재를 정식으로 학계에 보고하였다. 『한국사연구』 제3호에 실린 이원순 교수의 「未公開史料 Mutel 文書」에 따르면 <뮈텔 문서>의 총량은 동양어 문서 1,287건, 서양어 문서 12,164건을 합쳐서 13,451건에 이른다. 좀 더 세부적으로 보면, 동양어 문서 1,287건에는 한글 문서 390건, 국한문 혼용 문서 126건, 한문 문서 716건, 일본어 문서 55건이 들어 있다. 그리고 서양어 문서 12,164건에는 프랑스어 문서 9,518건, 라틴어 문서 2,068건, 영어 문서 571건, 독일어 문서 4건, 이탈리아어 문서 2건, 스페인어 문서 1건이 포함되어 있다.
<뮈텔 문서>에는 뮈텔 주교가 조선의 여러 지방에 파견한 프랑스인 사제와 조선인 사제들이 보낸 사목 보고서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조선 천주교 역사 연구와 관련해서 그 사료적 가치를 따져보자면, <뮈텔 문서>에는 프랑스 선교사들과 조선인 사제들의 지방 파견과 본당의 증설, 사제들의 사목 방문과 교세 보고, 각 지역 공소들의 상황과 변화, 그리고 독일 베네딕도회 선교사와 미국 메리놀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의 조선 진출 과정 등에 관한 상세한 정보들이 담겨 있다. 또한 신학교의 조선인 사제 양성 교육과 사제 서품, 서울의 약현 성당과 명동 성당, 전주의 전동 성당 등을 비롯하여 성당 건축물의 건립 과정, 수녀회의 조선 진출과 본당 활동, 계성학교, 남대문 상업학교, 가명학교 등 천주교 교육기관의 설립, 양로원, 고아원, 시약소 등 사회 복지 기관의 설립, 나아가서 『경향신문』과 『경향잡지』 외 각종 천주교 서적의 출판 활동 등에 관한 자료도 <뮈텔 문서>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뮈텔 문서>의 각종 보고서를 분석함으로써 1880년대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조선 천주교의 내부적인 변화상을 연구할 수 있다.
또한 <뮈텔 문서>에는 조선의 정치, 사회와 관련된 정보들도 상당수 담겨 있다. 청일전쟁, 을사늑약, 갑오개혁, 동학농민전쟁, 명성 황후 시해 사건, 의병 운동, 러일전쟁, 통감부 설치, 한일 강제 병합, 3.1운동 등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정치적 사회적 동향에 관한 기록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게다가 구한말에 천주교가 지방 사회에서 지방관, 일반 백성, 동학교도, 개신교인 등과 충돌하는 사건이 프랑스와 조선 사이의 외교 분쟁으로 비화한 사례를 가리키는 교안(敎案)과 관련한 보고서들이 많아서 해당 사건에 관한 구체적인 실상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자료들이 <뮈텔 문서>에 많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뮈텔 문서>는 조선의 근대 정치사 및 외교사 연구와 관련해서도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뮈텔 문서>에는 서한과 보고서 이외의 자료들도 들어 있다. 가령 구한말의 조선인 고관,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총독부 고위직 관료들이 뮈텔 주교에게 보낸 연회 초대장,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명함 등도 수집되어 있다. 이 연회 초대장 뒷면에는 연회에서 베풀어진 요리 목록도 적혀 있다. 그리고 뮈텔 주교가 조선 국내외에서 발행되던 신문에서 중요한 기사를 오려내어 스크랩한 자료들, 조선 천주교 순교자 관련 역사를 조사하면서 수집한 자료들도 상당수 보존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료들은 당시 조선 천주교 안팎에서 벌어지던 역사적 사건이나 일반인들의 생활에 관한 연구에도 중요한 사료로 활용될 수 있다.
<뮈텔 문서>가 발견된 지 60년가량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한국교회사연구소는 한국 천주교 교회사, 한국 종교사, 한국 근대사 등의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연구자들에게 제한적으로 <뮈텔 문서> 열람을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뮈텔 문서>의 전모가 다 공개된 것은 아니었다. 과연 <뮈텔 문서>에 어떤 자료들이 들어 있는지, 현재 정리되어 공개하는 자료들은 어떤 기준에 따라서 어떻게 분류된 것인지 등 학문적으로 규명해야 할 점들이 아직 남아 있다.
<뮈텔 문서>를 학문적으로 활용하는 데에는 중요한 걸림돌이 몇 가지 존재한다. 먼저 <뮈텔 문서>는 대부분 필기체로 된 일차 사료여서 판독하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 특히 <뮈텔 문서>의 총량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프랑스어 문서(9,518건)와 라틴어 문서(2,068건)은 대단히 난삽한 필체로 되어 있어서 쉽게 접근할 수 없다. 그런데 프랑스와 벨기에 출신의 천주교 신부들이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의뢰로 프랑스어 문서와 라틴어 문서를 판독 정서하였다. 그래서 자료 판독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뮈텔 문서>의 전체 목록이 완성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연구자가 <뮈텔 문서>를 열람하여 연구에 활용하려고 해도 어떤 문서들이 어디에 들어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뮈텔 문서> 전체 목록이 완성되어 관련 연구자들이 <뮈텔 문서>를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게 된다면, 한국 근대사 연구와 근대종교사 연구에서 <뮈텔 문서>를 사료로 활용한 연구들이 비약적으로 증대할 것이다.
조현범_
한국학중앙연구원
올해 학술지에 게재한 논문으로는 「현대 한국 사회의 종교 간 평화와 공존을 위한 모색들: 불교와 천주교를 중심으로」, 「달레 著 『한국천주교회사』 「서설」에 대한 분석적 접근」, 「황선명과 조선시대 종교사회사」, 「천주교 묵상 서적 『신명초행』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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