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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만, 마이크 윌리스, <티베트: 삶,신화, 그리고 예술>, 들녘, 2002, 144쪽(역)

티베트:삶 신화 그리고 예술

저자

마이크 윌리스

영국 박물관 고대 오리엔트 분과의 북인도와 히말라야 컬렉션 큐레이터다. 아시아 종교건축과 조각에 관한 수많은 논문을 발표했고, 1996년 맥밀런사에서 나온 {예술사전(Dictionary of Art)}(전 35권)의 남아시아 부문 편집자로 활동했다. 최근에는 {Temples of Gopaksetra}(1997), {Buddhist Reliquaries From Ancient India}(2000) 등 인도 종교건축과 예술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

역자

장석만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서울대에 출강하고 있다. 주된 관심분야는 한국 근대성의 형성과 종교의 상호관계이며 현재 동학사상, 크로노스, 종교분쟁에 관한 책을 구상중이다. 박사논문은 「개항기 한국사회의 '종교'개념 형성에 관한 연구」이며, 그외 주요논문으로 「한중일 삼국의 정교분리 담론」,「단발령의 정치학 : 근대성과 의병운동의 상징」,「미셀 푸코의 담화분석과 종교학 연구」등이 있다. 역서로는 <상징과 해석> 등이 있다.

출판사서평

히말라야 산맥으로 둘러싸인 '세계의 지붕' 티베트는 전 세계인들의 깊은 존경을 받고 있다. 중국의 식민 지배와 달라이 라마의 망명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는 티베트의 정신과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티베트는 수많은 불교사원에서 향이 피어오르고 만트라가 음송되는 불교국가다. 종교적 심성이 가득한 티베트인들은 자비와 지혜야말로 인간이 평생 동안 얻을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이라고 믿는다. 자신의 안위 때문이 아니라 모든 존재가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고자 정진한다. 그런데 티베트 불교는 마하야나(대승大乘) 불교에 속한다. 6세기의 현인 아상가는 남방 불교학파(테라바다 불교)가 윤회로부터 개인이 해탈하는 점에만 치중한다고 지적했다. 이 점은 테라바다 불교(스리랑카·미얀마·타이)와 마하야나 불교(북인도·티베트·동아시아)의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두 전통 모두 해탈 혹은 깨달음이 인간의 궁극적 목표라는 건 인정하지만, 마하야나 불교는 개인의 해탈 추구와 다른 모든 생명체에 대한 깊은 유대감이 서로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차이 때문에 테라바다 불교에서 이상적 존재는 아라한阿羅漢(Arhat)인 반면, 마하야나 불교에서 이상적 존재는 보살菩薩(Bodhisattva)이다. 아라한은 이미 깨달아 최상의 지혜를 얻은 수행 성자로서 완전히 초연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보살은 완벽한 신적 구세주로서 끊임없이 이 세상의 존재에 대해 자비로운 마음을 품고 있다. 마하야나 불교에 따르면 보살은 아라한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위치에 있다. 왜냐하면 보살은 깨달음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지만, 고통받는 중생들에 대한 자비심으로 그들을 돕기 위해 자신의 최종적 깨달음을 미뤄둔 존재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티베트인들은 마하야나 불교 전통을 믿었으므로 보살이 널리 숭상됐다. 자비심의 상징인 관세음보살은 티베트를 보호해주는 존재가 됐다. 이 관세음보살이 인간의 몸으로 현현한 것이 티베트의 최고 사제이자 왕인 달라이 라마라 믿는다(티베트 불교의 놀랄 만한 특징은 학파와 수도원의 계승을 확고하게 이어가기 위해서 라마 자신이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삶에 대한 티베트인의 생각은 실용주의적이다. 인간사에서 질병, 불행, 위험을 완전히 없애버릴 수 없는 것처럼 악마적 힘이나 사악한 신들을 송두리째 없앨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최선의 방책은 사악한 세력이 제멋대로 활동하지 못하게 묶어두거나 제자리에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기도를 하고, 덕 있는 행위를 하며, 올바르게 의례를 지킴으로써 그런 세력을 제자리에 묶어둘 수 있다.
선악의 불가피한 공존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건 불교사원마다 있는 '곤­캉'이라는 별실이다. 이는 예전에 이곳을 지배하던 사납고 무서운 신들을 위한 공간이다. 또한 불교 전래를 방해하던 토착 신들은 나중에 불법을 수호하는 '다르마 팔라'가 되었다. 만다라를 비롯한 티베트 예술에서도 항상 아름다움과 추함,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 특히 죽음의 강조는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죽음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긍정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을 반영하며, 모든 존재는 고정불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항상 음미해야 한다는 그들의 믿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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