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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사건에 대한 작은 기록 :
2011년 한국 종교학의 동향 (2)
2012.1.31
2011년 한국 종교학의 동향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왜냐하면 나는 종교학 동향이란 그저 ‘동향 없음의 동향’이었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몇 말들의 꾸러미만을 가지고 종교학의 동향을 확정하는 것은 그 안에서 고뇌하는 얼굴 표정을 전혀 담을 수 없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나는 그저 내가 목격했던 몇몇 사건을 통해서만 간신히 몇 가지 종교학의 흐름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먼저 한국종교문화연구소(종교문화비평학회)에서는 《종교문화비평》 창간 10주념 기념으로 2011년 7월 2일에 “한국 사회 신화 담론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제목으로 상반기 심포지엄을 진행했다. 2001년에 ‘한국종교연구회’가 한국종교문화연구소(이하 한종연)로 조직을 개편하면서 가장 먼저 벌인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새로운 종교학 저널을 만드는 일이었다. 새로운 저널의 창간은 사실 당시 한종연의 안팎에서 들끓던 새로운 언어를 담을 매체에 대한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저널을 만드는 수작업에 잠시 참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10주년은 무척 감동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연구소 창립 10주년의 의미에 걸맞는 획기적인 심포지엄의 기획을 내심 바라기도 했다. 그것은 지나간 꿈을 반성하는 이상한 작업일 수도 있었고, 이제는 자기 내부의 꿈을 모두 비워버린 자의 극심한 기갈의 담론화 작업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신화 연구라는 어쩌면 진부한 주제로 심포지엄이 진행된 것에는 연구소의 경제적, 학문적 여건이라는 또 다른 변수가 자리잡고 있었다. 원래 한국연구재단에 연구과제를 신청하기 위해서 기획된 ‘동아시아 신화 연구’라는 주제가 자연스레 상반기 심포지엄으로 연계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포지엄 준비 과정에서 일본신화와 현대신화와 관련된 발표가 빠지고 원래 계획에 없던 신화이론 관련 글이 들어오면서 심포지엄의 전체 틀이 무너지게 되었다.
실제로 발표된 글들이 의미있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아쉬운 것은 여전히 신화 연구가 근대성 연구의 자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신화학 자체가 근대성의 지형 안에서 ‘신의 이야기적 현존’을 정당화하는 일정한 장치로서 기능했다는 점에서, 이것은 피할 수 없는 학문적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신화라는 범주 자체가 더 이상 학문적 흥미와 비판적 자극을 줄 수 없는 시점에 이르게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우리가 이미 신화와 신화학의 끝에 이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근래에 종교학 연구에서 보이는 의례 연구의 뚜렷한 쇠퇴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신화와 의례로 이분되었던 10년 전의 종교학의 연구 경향이 이제는 그 생명력을 다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신화는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실행되는 ‘현재 지우기’의 담론이었고, 의례는 ‘역사’에 대한 주목이 낳은 ‘현재 만들기’의 담론이었던 것 같다. 신화와 의례 연구의 전반적인 붕괴는 신화와 의례에 대한 이론화의 한계 때문인가, 아니면 종교학의 필연적인 내적 붕괴 때문인가?
다음으로 한종연에서는 2011년 11월 19일에 “종교와 동물”이라는 주제로 하반기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애초에 하반기 심포지엄은 ‘생태학과 종교’라는 좀 더 거시적인 주제를 위한 것으로 기획되었다. 그러나 역시 여러 가지 변수로 인하여 ‘종교와 동물’로 주제가 좁혀지게 되었고, 이론적인 동물 담론과 전통 종교의 동물 담론을 다루는 글이 절반씩 뒤섞여 발표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가장 아쉬웠던 것은 타학문 분야의 동물 담론과의 유기적 연결성의 부족이었다. 종교학이 종교나 종교학 내부를 향하여 다소 쉬운 젠체함의 태도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제 종교학이 다른 학문분과를 위하여/향하여 발언할 수 없다면, 거기에서 오는 좌절감 역시 큰 상처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종연의 심포지엄에서도 최근의 동물 담론에서 쟁점이 되는 것들이 전반적으로 다루어져야 했을 것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데리다와 아감벤이나 해러웨이의 동물에 대한 논의를, 그리고 포스트휴머니즘이나 인간-동물의 경계선 담론의 종교적 의미 등을 듣고자 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곁에서 죽어가는 먹히는 동물, 우리 곁에서 살아가는 만들어진 동물, 이제는 완전히 동물로부터 자신의 영혼을 분리해낸 인간이라는 비동물 등의 문제에 좀더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학 담론이 이제는 지나가버린 ‘학문적 유행’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지속적으로 시달릴 준비를 할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반기 심포지엄 역시 종교학의 이론적 자원이 이제 그다지 신선한 것일 수 없음을 보여준 듯하다. 또한 우리는 종교와 종교학의 경계선이라는 문제가 이제는 거의 의식되지 않고 있다는 비판에도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종교학은 존재하는가?
2011년 10월 8일부터 11월 5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지성적 공간 안에서의 종교: 종교 문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정진홍 교수님의 석학 인문강좌가 열렸다. 나는 이 강좌에서 종교를 ‘마감된 완성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는 정진홍 교수님의 주장에 많은 공감을 했다. 우리는 종교를 현실에 반응하며 살아 움직이는 실체로서 다루기보다는, 이미 죽은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는 고체 덩어리로서 취급하는 데 익숙한 것 같다. 근래의 종교학은 죽은 종교의 해부학 교실과도 같다. 오늘날의 종교가 다원시대 속에서 단원적인 언어를 발언하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역으로 다원주의 안에서 단원주의를 주장하고, 불순의 잡스러움 안에서 순수의 상상력을 주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대종교의 숙명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종교는 근대적인 상상력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작품처럼 여겨진다. 근대성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항상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감추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우리는 그렇게 표층 너머의 심층, 현재 너머의 과거, 기표 너머의 기의를 쫓도록 프로그램된다. 종교학도 그러한 근대적인 해석학 프로그램의 일환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종교학의 숙명 너머를 보고 있는 연구가 어딘가에서 진행되고 있기는 한가?
한국종교학회는 2011년 11월 26일에 “종교와 마음, 그리고 자살”이라는 제목으로 후반기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그중에서 특히 “종교와 마음” 특별 분과의 발표가 가장 주목을 받은 듯하다. 일차적으로 이 특별분과는 신종교, 무속, 유교, 도교, 기독교라는 다섯 가지 종교 영역에서 이야기되는 마음 담론을 해당 분야에서 오랜 기간 연구해온 연구자들이 어떻게 발언하는가를 듣기 위한 자리였다. 또한 ‘마음’이라는 일반명사를 통해서 종교전통 간 마음담론의 소통을 도모하고, 마음담론의 지형 안에서 얼마나 다양한 논의가 펼쳐질 수 있을 것인가를 지켜보기 위한 실험실의 역할을 기대하기도 했다. 종교학은 그 동안 새로운 개념에 대해 지극히 인색한 태도를 취해왔다. 따라서 특별분과 구성작업에 참여하면서 나는 마음이라는 개념이 종교학의 가용한 개념으로 정착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내에는 종교전통의 마음담론을 다루면서 인지과학이나 인지종교학의 개념과 술어를 사용할 수 있는 연구자가 많지 않다.
여전히 우리는 종교적인 어휘를 빌어 종교를 서술하고 해석하는 토톨로지의 논리에 갇혀 있다. 그러나 나는 근대의 일정한 역사적 시점에서 ‘마음’이나 ‘영혼’이나 ‘정신’ 같은 개념이 종교를 정의하는 핵심적인 술어로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근대성의 체계 속에서 이루어진 ‘종교의 심리학화’ 작업이 우리의 종교 개념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다르게 인지종교학은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마음을 ‘만들어진 마음’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종교연구의 영역에서 구성되는 마음 담론은 여전히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마음을 복원시키려는 논의를 향한 일정한 편향성을 보이는 듯하다. 종교와 종교학은 실상 별로 차이가 없다!
한신대학교 종교와문화연구소에서는 2011년 12월 1일에 “종교, 구체성의 문화”라는 제목으로 연구소 창립 기념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기억, 웃음, 미디어 테크놀로지, 몸이라는 주제가 다루어졌으며, 종교를 구체적인 물질 문화에 근거하여 논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물질에 대한 경험이 어떻게 우리의 종교적 사유를 제약하고 있는가의 문제를 여러 가지 차원에서 다룰 수가 있었다. 사실 나는 아주 단순한 착상 때문에 미디어 테크놀로지에 대한 글을 쓰게 되었다. 예수가 살던 당시에 카메라와 녹음기가 있어서 예수의 목소리와 이미지를 저장했더라면 기독교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오늘날 문학의 종언이, 그리고 책의 영화로의 번역이 종교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여전히 우리 주변의 종교는 독서 중심적인 ‘문자의 종교’이다. 그러나 ‘이미지의 종교’라는 것이 도대체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이미지의 시대에서 종교는 오로지 문자에 더욱 집착함으로써 생존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종교학은 여전히 종교적이지 않은 영역에서 종교를 이야기하는 데 서툴고 어색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것은 종교학 내부의 담론이 여전히 외부를 의식하지 않고 진행되고 있으며, 외부와의 소통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된다. 종교학은 타학문에 대해서 여전히 “우리는 너희와 달라.”라는 식의 자기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다만 다른 것’으로서의 정체성은 대화를 거부하는 정체성이자, 대화의 구도를 미리 선점하는 정체성이다.
일 년 전에 정진홍 교수님을 도와 《정직한 인식과 열린 상상력: 종교담론의 지성적 공간을 위하여》라는 책을 만들면서 들었던 ‘만감’이 있었다. 여전히 종교학에는 책이라는 사건이 드물고 귀한 것 같다. 한종연의 학술상이 수상자를 찾지 못하는 것도 그렇고, 많은 연구자들이 상재(上梓)를 추진할 만한 여력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렇다. 다음 기회에 종교학의 동향에 대한 목격담을 쓴다면, 이제 ‘책들의 전쟁’에 관한 기록을 담을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간절할 뿐이다. 직접 느끼고 경험하지 않은 종교학의 미세한 동향을 말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이상의 것들이 내가 일 년 동안 참여한 종교학의 영역 안에서 벌어진 몇 가지 사건들에 대한 기록이다.*
이창익_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changyick@gmail.com
주요논문으로 〈신화로 그리는 마음의 지도〉,〈종교와 미디어 테크놀로지: 마음의 물질적 조건에 관한 시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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