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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학,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
2011년 한국 종교학의 동향 (1)
2012.1.24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자리에 앉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필립 그뢰닝의 다큐멘터리 영화인 《위대한 침묵》(Into Great Silence, 2005)이었다. 1984년에 필립 그뢰닝은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는 프랑스 알프스 산맥의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카르투지오 수도회)을 촬영하고 싶다는 의사를 수도회 측에 전달한다. 그리고 그뢰닝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던 수도회 측은 15년 이상이 지난 후에야 수도원 촬영을 허락한다. 수도원 내부의 시간과 외부의 시간이 각각 별개의 속도로 흘러가다가, 한쪽의 기억과 다른 한쪽의 망각이 어느날 문득 전화 벨소리를 울리며 재회한 것이다.
그뢰닝은 이 영화가 종교에 대한 영화라기보다는 시간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의 카메라는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 모든 잡다한 일상의 구성요소가 모조리 증발했을 때 그 빈 자리에 무엇이 남는가에 대한 질문을 계속해서 던진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을 하며 살아간다. 끊임없이 우리는 무언가를 쓰고 말해야 하거나, 아니면 읽고 들어야 한다. 말의 감옥은 시간의 감옥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뢰닝의 카메라는 일상을 걸러내는 필터처럼 작용하면서 모든 인공적인 것들에 저항한다. 그렇게 그의 필름은 인간의 몸에서 호모 로쿠엔스를 떼어낸다. 사람 빼기 언어는 무엇이 될까? 질서정연하게 구획된 어두운 공간 속을 누비는 수도사의 몸은 의미를 거부하는 듯한 원초적인 언어 덩어리처럼 느껴진다.
수도원에서는 기도라는 집단적 언어만이 울려퍼질 뿐, 어떠한 개인적 언어도 발설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어두운 굴과도 같은 수도원 내부를 질서정연하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시간의 유령처럼 보인다. 이 유령은 영화를 보는 내가 잃어 버리고자 잊어 버리고자 했던 나의 모습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이 영화는 순간순간 공포영화처럼 편치 않게 나를 압도해 온다. 시간을 지우는 기계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들처럼 수도사들은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되어 서로를 닮아 간다. 수도사들의 얼굴을 차례로 클로즈업하는 장면이 반복되는데, 우리는 거기에서 시간이 박힌 얼굴이 점점 시간이 빠진 얼굴로 변화하는 과정을 관찰하게 된다. 삶으로 가득 찬 어린 얼굴, 젊은 얼굴, 늙은 얼굴, 그리고 이미 너무 많은 죽음이 들어와 버린 얼굴이 공존하는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서로의 시간을 학습한다. 그리고 그들은 타인의 얼굴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의 몸으로부터 시간의 껍질을 벗겨낸다. 그러므로 수도원은 시간의 시신이 매장되는 곳이며 시간의 장례식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곳은 더 이상 신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얼굴에 대한 이러한 관심에서 최근에 나는 “종교와 얼굴”이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야 말겠다는 쓸데없는 망상을 진행하고 있다. 몇 개의 인터뷰를 따면서 느꼈던 저항의 강도는 “쉽지 않겠구나!”를 연발하게 만들었다. 프로이트가 왜 녹음기와 영화라는 매체를 사용하지 않았겠는가! 녹음기는 우리의 몸 속에서 소리를 꺼내 가고 카메라는 우리의 시간 이미지를 약탈해 간다. 우리의 죽은 시간은 그렇게 기계 속에 저장된다. 그래서 모든 인터뷰는 죽음의 기록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종교학’을 떠올릴 때 사람들이 드러내는 각양각색의 얼굴 표정을 담고 싶었다. 종교학의 얼굴은 어떤 얼굴일까? 사실 이러한 생각은 스티븐 소더버그의 오래 전 영화인 《섹스, 거짓말, 비디오테이프》(Sex, Lies, and Videotapes, 1989) 때문인 것 같다. 이 영화는 항상 나에게 다시 보아야 할 영화로 남아 있었는데,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이 영화의 DVD 타이틀을 주문했다. 당신에게 종교학이 주는 오르가즘의 표정은 무엇입니까?
나는 종교학 연구자들이 얼마나 학문적인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를, 그들의 내밀한 학문적 욕망이 과연 스스로 말하고 있는 만큼 순수한 욕망인지를, 그들은 종교학의 절정에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종이의 말은 관심 밖이었다. 육성, 말 그대로 몸의 소리를 듣고 싶었고, 몸이 찌그러지면서 만들어내는 얼굴 표정을 담고 싶었다. 내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학을 이야기할 때 짓는 저마다의 독특한 얼굴 표정을 갖고 있다. 이런 얼굴 표정들이 예전에는 학문적인 담론 안에 들어와 종교학의 언어로 인쇄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 읽는 글들은 얼굴 없는 언어, 목소리 없는 글자뿐인 것만 같다.
종교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무언가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고 그곳에 초대를 받는다. 그러나 나는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하는 이곳, 서로 다른 문법의 언어들이 서로를 애써 외면하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이곳, 서로의 연구에 대한 형식적인 관심만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이곳, 더 이상 희열도 쾌락도 오르가즘도 없는 학문의 장인 이곳, 더 이상 서로가 얼굴을 기억하지도 서로의 얼굴을 학습하지도 않는 이곳, 모든 시간을 혼자 감내해야 할 뿐 누구도 나의 얼굴에서 시간을 지워주지도 않고 누구도 나의 얼굴에 시간을 선물해주지도 않는 이곳, 아니 서로의 얼굴에 대한 무관심이 범람하는 이곳, 이곳이 어떻게 종교학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일 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학문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설정하자마자 ‘정체성의 주석’으로 전락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종교가 최초의 상상적 경험을 캐논화하여 ‘캐논에 대한 주석’으로서만 생존하게 되는 현상과도 비슷하다. 이때 우리는 종교가 아니라 ‘종교의 주석’만을 보게 된다. 그러고 보니 종교는 항상 없었다. 모든 기독교는 기독교의 주석으로, 모든 불교는 불교의 주석으로 생존한다. 종교는 부재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다. 마치 신이 부재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의 힘을 증식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이건 엘리아데의 말이다. 인간도 그렇다. 라캉의 거울 앞에 선 인간은 윤곽선 안에 둘러싸인 인간 덩어리를 보게 되고 이때부터 ‘나’라는 완전체의 환영에 사로잡힌다. 이후로 인간은 ‘환영의 각주’로서만 살아가게 된다. 진정한 나로부터 일탈해 있다고 내가 나를 야단치게 되고, 본래의 나로 돌아가야만 한다고 하면서 나를 찾아 헤매게 된다. 그러나 완전체로서의 나는 원래 없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종교학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상상적인 환영일 뿐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학문 자체가 이미 환영의 놀이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러한 환영을 위해서 서로 싸우고 서로 무시하고 서로를 외면한다. 우리는 종교/종교학이라는 환상소설을 쓰기 위해서 끊임없이 종교사/종교학사에 대한 집필에 목말라 한다. 그러나 역사는 정체성을 만드는 기술이지만, 누가 뭐래도 환영의 구조물일 뿐이다. ‘종교사’는 종교의 끝에서 서술될 것이고, ‘종교학사’는 종교학의 끝에서 책이 될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바이오그라피를 쓰는 것이 죽음 이후의 산물인 것과도 같다.
종교도 종교학도 완제품이 아니다. 그러나 종교사/종교학사는 종교와 종교학을 완제품으로 재구성한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다른 종교학을 가지고서, 서로 다른 종교 개념을 가지고서, 종교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공동의 일을 도모한다. 같이 토론을 하기도 하고, 심포지엄의 패널로 참여하기도 한다. 지난 한 해 동안 내가 목도한 것은 그렇게 서로 다른 ‘종교들’과 ‘종교학들’의 결코 일어나지 않은 갈등과 충돌이었다. 이러한 현상이 그 자체로 의미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더 이상 거의 대화하지 않는다는 것, 이따금 하는 대화조차도 자기를 강제하기 위한 연출일 뿐이라는 것이다. 차이는 차이의 서술 속에서만 의미있는 것이다. 무관심이 차이의 해석학일 수 없다.
종교학과가 설치된 대부분의 대학에서 종교학 커리큘럼은 이미 상당히 기본적인 골격이 붕괴되어 버렸다. 한국종교학회는 이미 ‘방법’으로서의 종교학보다는 ‘영역’으로서의 종교학이 지배하고 있다.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보다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종교학 강의는 종교의 신비와 환상을 먹잇감처럼 던져주어야 하는 서커스가 되어 버렸다. 종교학 연구자는 더 이상 서로가 연구하는 것을 진지하게 토론하지도 않고 서로의 연구 상황에 대한 관심도 거의 없다. 우리는 이미 ‘종교학 이후’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말하는 종교학은 이제는 없는, 과거에는 있을 뻔했던 그런 것이다. 나는 지난 일 년 동안 진지하게 진행된 종교학 사건들을 돌이켜 보면서, 니체가 말하듯이 다시 동일한 일을 되풀이 해도 후회 없이 즐겁게 할 수 있을 만큼의 무게감을 지니고서 기획된 종교학 사건이 얼마나 될 것인가를 묻고 싶었다. 과연 있을까?
이제 우리가 종교라는 이름으로, 종교학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시절은 지나간 듯하다. 문제는 무척 심각하고 현재의 상황은 ‘절망의 끝’을 이야기한다. 2011년 종교학 연구 동향을 서술하는 이 글에서 이렇게 쓸데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는 것은 그만큼 현재로서는 종교학 연구자들의 일반적인 움직임을 포착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생각 때문이다. 언젠가 종교학의 세계가 스스로에 대해서 무척 말을 많이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자기고백은 무척 위험해 보인다. 왜냐하면 근래의 학문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기고백은 철저하게 천대받는 장르이기도 하거니와, 고백과 선언으로 유지되는 학문적 정체성에 대한 관성적인 조롱이 도를 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기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고 학문을 진행해야 하는 ‘포커페이스의 학문’이 이제 가장 아름다운 학문의 방식인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이제 고백은 연구자에게 낙인이 되어 회귀할 뿐이다.
그래서 종교학이 거짓말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고백을 담아줄 비디오테이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이제 종교학 기계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 다음 호에 계속-
이창익_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changyick@gmail.com
주요논문으로 〈신화로 그리는 마음의 지도〉,〈종교와 미디어 테크놀로지: 마음의 물질적 조건에 관한 시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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