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해외봉사와 종교, 그 미묘한 관계
2012.2.14
지난 1월, 필자는 재직하고 있는 대학의 학생들 20여 명과 함께 케냐로 보름간 단기해외봉사를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인솔자라는 다소 모호한 위치였는데, 실무는 팀장 교직원과 협력 NGO 단체 간사가 맡고 있었기에, 필자는 각종 활동에 때로 똑같이 참여하기도 하고 때로 물러나 관찰하기도 할 수 있었다. 음악, 미술, 체육 교육봉사, 놀이터 짓기와 도서관 꾸미기 노력봉사, 합창, 마임댄스, 전통무용, 태권도시범 문화교류 등의 봉사활동은 여느 해외봉사단의 모습과 마찬가지이겠기에 달리 적을 말이 별로 없고, 대신 인솔자이자 종교학자로서 봉사활동 기간과 이후에 들었던 생각을 몇 가지 적어보려 한다.
나이로비에 도착하여 여정을 풀고 봉사지역으로 떠날 채비를 하던 초반 며칠 사이, 인솔자에게는 별도의 한 가지 역할이 주어져 있었다. 봉사지역으로 떠나기 전 학생들의 몸과 마음을 준비시키는 강연을 하는 일. 단기해외봉사는 필자도 처음이었기에 출국 전에 자료를 좀 살펴 강연 원고를 준비해갔다. 원고는 해외봉사의 의의와 자세에 관한 통상적인 말들에 더하여 ‘선교와 봉사를 혼동하지 말 것’과 ‘현지인들의 종교문화를 존중할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 강연에서 필자는 급히 한 가지 항목을 추가했다. 내용인즉, 비기독교인 학생들에게 ‘혹시 종교, 특히 기독교가 연루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현지 상황의 특성이겠거니 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것’을 당부하는 말이었다.
선교와 봉사를 혼동하지 말고 현지 종교문화를 존중하라는 것은 종교학자라면 봉사활동과 관련하여 으레 할 수 있을 법한 말이다. 그런데 케냐 인구의 8할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필자가 애초에 생각했던 강연내용은 좀 상투적이었다. 이를테면 무슬림이나 힌두 문화권에서의 봉사활동에서 특히 기독교인 봉사자가 유념했으면 하는 그런 내용 말이다. 그러나 케냐에 도착해서 필자는 이번 해외봉사가 기독교라는 종교와 무관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필자가 있는 대학이 미션스쿨이긴 하지만, 기존 다른 나라들에서의 해외봉사는 선교와 무관한 봉사 자체에 주력해 왔다. 꼭 봉사를 선교의 미끼로 삼지 않는다는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 정신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일반 해외봉사와 마찬가지로 선교가 개입될 여지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는 상황이 좀 달랐다. 현지 사정상 협력자는 한국인 현지 선교사들이었고, 무엇보다도 봉사지역 아이들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필자는 미리 준비한 강연 내용으로는 기독교인 봉사자들을 향해 ‘거리두기’를 강조했고, 급히 추가한 강연 내용으로는 비기독교인 봉사자들을 향해 ‘공감하기’를 강조했다.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보름 동안 종교적 성격의 활동이라고는 일정 초기의 숙소인 선교 센터에서 첫 일요일에 협력 선교사의 설교 겸 강연을 곁들인 짧은 예배를 가진 것, 쉬운 스와힐리어 복음성가를 급히 배워 현지 아이들과 함께 몇 번 부른 것, 봉사지역의 마을어른 장로님이 한국 청년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해준 것이 전부였다 (지역어로 하셔서 우리가 아는 말이라곤 마지막 ‘아멘’뿐이었다). 협력 선교사들은 봉사단의 성격을 명확히 알고 있었고, 봉사에 선교를 무리하게 개입시키거나 하지 않은 채 봉사단에 맞는 적절한 도움을 제공해주었다. 기독교적 세팅 한복판에서 벌인 봉사활동이었지만, 선교가 봉사에 끼어들거나 방해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장기든 단기든, 해외봉사와 선교의 관계는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한국해외원조단체협의회(http://ngokcoc.or.kr/) 자료에 따르면, 80여 회원 단체의 절반 이상이 종교계이지만 대부분 선교를 노골적으로 앞세우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이들이 선교와 봉사를 뒤섞는 방식은 매우 은근하고 조심스럽다. 선교가 봉사에 앞설 때 둘 다 실패하기 십상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묘한 상황이 발생하는데, 일반단체인 중 알았는데 사실상 선교단체였다며 푸념하는 경우도 생기고, 선교단체인 줄 알았는데 정작 선교는 전혀 안 하더라며 푸념하는 경우도 생기고는 한다. 현지 선교사들의 경우도 상황이 묘하긴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선교와 봉사의 두 역할 사이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한다.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오랜 현지생활에서 부득불 그렇게 되어가는 것이다. 불타는 종교적 사명감에 선교사가 되었지만, 자기가 선교사인지 그냥 자원봉사자인지 헷갈리는 순간이 수시로 찾아온다. 선교사라는 자의식이 앞서면 현지 활동이 어려워지고, 선교 활동이 부실하면 한국 교단과 교회의 지원이 줄거나 중단된다. 현지 선교사들에게 선교와 봉사의 결합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이와 달리, 선교와 봉사의 편리한 결합을 상상하는 이들은 정작 따로 있다. 현지상황은 전혀 모른 채 선교에 대한 막연한 환상 속에서 선교자금을 보낼지 말지를 따지는 국내 교단과 교회들, 진지한 준비와 고민 없이 우후죽순 떠나는 단기해외선교단, 일반적인 장단기 해외봉사단원이면서도 개인적인 선교 활동을 돌출시키는 종교인이 그들이다. 금지된 나라에서 무리하게 선교활동을 벌이다가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나, 코이카(KOICA, 한국국제협력단) 같은 국가출연 원조기관의 봉사단원임에도 봉사와 선교를 뒤섞다가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코이카의 경우, 정확한 통계는 못 찾았지만, 지원자와 최종 선발단원 중에서 기독교인의 비중이 상당히 높고, 그들 중 상당수가 평신도 선교사로서 자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현실은 해외봉사와 선교의 관계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미묘하고 복잡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교육봉사, 노력봉사, 문화교류…, 그리고 부수적인 약간의 현지탐방(관광). 의료나 구호 등의 특화된 봉사가 아닌 일반적 봉사를 주로 하는 여느 해외봉사단이 모두 비슷하게 하는 활동이다. 심지어 일반단체나 종교단체의 봉사단도 대동소이하다. 특히 앞의 두 가지는 유난히 친숙한데, 사실상 과거 국내 대학이나 교회들이 했던 농촌봉사의 무대를 해외로 옮겨놓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대학생 단기해외봉사는 90년대 후반에 처음 시작되었고, 지금은 해마다 수천 명의 대학생이 방학을 맞아 세계 각국으로 봉사를 다녀온다. 간혹 비용 전액을 지원받는 경우도 있지만 (MBC나 아산나눔재단이 그 예이다), 대개는 전액이나 일부 자비로 봉사에 참여한다 (대학생사회봉사협의회, 각 대학들, 일반이나 종교 원조단체들이 그렇다). 많은 대학생 참가자들이 보람과 긍지를 느끼며 감동과 포부를 안고 돌아올 것이다. 짧은 봉사 기간 동안 현지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을 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아이들의 미래에도 작은 자취는 남을 것이다. 그 경험과 자취의 가치는 그 자체로 인정하면 되겠지만, 봉사활동이 획일화된 매너리즘에 빠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염려는 든다. 주관 기관들의 노하우가 공유되고 전수된다는 점과 단기라는 특성상의 한계가 있다는 점 때문에 일말의 매너리즘화는 불가피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쪼록 청년들의 해외봉사가 단지 스펙 쌓기나 경험 쌓기의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고, 또 매너리즘을 넘어선 창의성을 발휘하면서 값진 활동으로 정착하고 발전하기를 기대해본다. 그리고 선교와 봉사의 미묘한 얽힘이 봉사의 순수성을 훼손하지 않기를 기대해본다. 이러저러한 복잡한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솔직히, 필자에게는 해맑게 웃던 케냐 아이들의 그 커다란 눈망울이 지금도 아련히 눈에 밟힌다.
김윤성_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jssance@paran.com
공저로 <<종교전쟁>>, 공역으로 <<신화 이론화하기>>(브루스 링컨) 등이 있고, 논문으로 <인지적 종교연구, 그 한계
와 전망> 등이 있다.
'뉴스 레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9호-선교와 식민정책(안교성) (0) | 2012.03.28 |
---|---|
198호-사회적 영성과 정치세력화(김진호) (0) | 2012.03.28 |
196호-2011년도 신종교 연구 동향을 일별하다(김항제) (0) | 2012.02.09 |
195호-종교학 사건에 대한 작은 기록 : 2011년 한국 종교학의 동향(2)(이창익) (0) | 2012.02.09 |
194호-종교학,거짓말,그리고 비디오테이프 : 2011년 한국 종교학의 동향(1)(이창익) (0) | 2012.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