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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회의 아들이 도회지 교회를 이끌다

2009.2.24


2009년 2월 20일 낮 12시 10분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추기경의 유해를 실은 운구차가 회사 앞길을 지나가고 있다. 덮개 없는 경찰차가 선두에서 길을 인도하고, 그 뒤를 이어 검은 색 리무진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아주 천천히, 1960년대 이후 한국천주교회를 이끌었던 큰 인물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하듯이 말이다.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길가에는 방금 장례미사에 참석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거나 손을 흔들며 떠나는 분을 배웅하고 있다.

지난 닷새 동안 있었던 일은 내 생각의 폭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출퇴근하면서 마주친 조문행렬은 성당에서 나와서 가톨릭회관을 끼고 돌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앞길로 뻗었으며, 심지어 세종호텔을 지나서 신세계 백화점 방향까지 장사진을 이루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신문과 TV는 온통 추기경의 생애와 장례에 관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어떤 기사건 가릴 것 없이 추기경의 인간적인 면모에 관한 것 아니면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이야기들만 넘쳐났다. 이 글에서까지 그런 이야기를 되풀이할 필요는 없겠다. 그래서 오로지 현대 한국천주교사 내지 현대 한국종교사의 흐름이라는 각도에서 그분에 관한 간단한 회고를 담아볼 작정이다.

짧은 지면에 그것마저 길게 펼칠 여유는 없다. 간단히 요점만 짚어보자. 먼저 추기경은 공의회의 아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공의회란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렸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말한다. 다 아는 이야기이겠지만 우리가 현재 눈으로 보는 한국천주교회의 모습은 전적으로 공의회의 산물이다. 세계 천주교회가 다 그렇겠지만, 특별히 전교지역 교회로서의 한국천주교회는 공의회 정신과 가르침에 따라서 완전히 재편되었다고 말해도 크게 틀렸다는 말을 듣지는 않는다.

아지오르나멘토, 사람마다 달리 번역하기는 하지만, 말 그대로 하자면 ‘지오르노’(날 혹은 당대)에 맞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오늘날의 시대적 추세에 적응하자는 것은 모토로 내세운 것이다. 공의회는 교회 내부적으로는 전례 생활을 혁신하고, 평신도들의 참여를 증대시켰다. 그리고 교회 바깥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서 헌신하고, 다른 종교들과의 대화나 교류에 좀 더 과감하게 뛰어들도록 이끌었다.

공의회가 시작되던 무렵에 추기경은 독일 유학 중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956년 10월에서 1963년 11월까지 독일의 뮌스터 대학교에서 요셉 회프너 교수에게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웠다. 원래 공의회가 소집될 당시만 해도 바티칸의 고위 관료들은 그냥 신학적, 교의적 성찰에 국한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공의회가 그렇게 광범위한 영역에서 혁신적인 제안들을 담게 된 데에는 독일계의 페리투스, 즉 전문위원들이 큰 역할을 하였다. 라너, 큉, 라칭거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므로 추기경 역시 유학 당시 독일 신학계의 개혁적인 분위기에 영향을 듬뿍 받으면서 자신의 교회론, 사회론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추기경은 유학에서 돌아와 1964년 6월부터 1966년 4월까 가톨릭 시보사(지금의 가톨릭 신문사) 사장을 지냈다. 이 기간 동안 매스컴을 통하여 천주교회의 새로운 방침들을 널리 홍보하고, 한국교회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데 전력을 다하게 된다. 그리고 초대 마산교구장이 된 뒤, 1967년 9월부터 10월까지 열린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 참석하면서 추기경은 아마 세계 천주교회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여기에 보조를 맞추려면 한국천주교회가 어떻게 변모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을 얻었으리라 짐작된다. 그 뒤 한국천주교회가 걸어온 길에 대해서는 재론할 필요가 없겠다.

한 가지 더 첨가하자면 추기경이 1968년 4월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되고, 또 이듬해에 추기경이 된 이후로 한국천주교회의 교세는 크게 늘어났다. 1980년대 이후에는 가히 폭발적인 성장세를 이루었다. 그냥 신자수가 늘어나고, 재정이 튼튼해졌다는 사실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중심이 시골 본당에서 도회지 본당으로 이동하였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한 마디로 점점 더 한국천주교회가 농민층에서 도시민으로, 하층민에서 중산층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글의 제목을 ‘공의회의 아들이 도회지 교회를 이끌다’라고 달았던 것이다.

한국천주교회가 중산층 종교로 바뀌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논문이 아니니 길게 분석할 일은 없겠다. 다만 중산층의 취향에 맞는 신앙 형태가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음에 주목하자. 사적 계시에 관한 천주교회 내부 논란은 시금석의 역할을 한다. 언젠가 다른 글에서 다룬 적이 있지만, 상주 황테레사, 나주 윤율리아 문제는 기층 신앙대중 사이에서 자생적으로 분출된 신앙들이었다. 하지만 한국천주교회가 중산층 종교로 바뀌면서 이런 현상들을 꺼리게 되고, 단죄하는 분위기가 증대한다. 아마 공의회의 손자들이 앞으로 당면할 문제는 바로 이런 것들이리라. 사회적 공신력을 바탕으로 급성장을 이룬 한국천주교회의 세련된 ‘당디즘’과 기층 신앙대중의 끓어오르는 종교적 욕구가 부딪치면 어떻게 될까?

조현범(한국교회사연구소, hbthomas@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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