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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와 종교: 우연과 고통의 드라마 너머

2009.3.10



지난 이십 여 년 동안 과학과 종교 논의를 이끌어온 미국 버클리 소재 신학과 자연과학 센터(CTNS)의 테드 피터스(Ted Peters) 교수가 한국고등신학연구원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는데, 여러 일정 중에 우리 연구소에서의 발표(3.18.수요일)도 잡혀 있다. 일단 발표 제목이 “다윈주의 세계에서 신의 은총”이라는데, 아직 발표 내용을 받아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올해가 다윈 탄생 200주년인 만큼 이에 맞추어 설정한 주제인 듯하다. 피터스 교수가 그 동안 진화론 자체보다는 생명복제, 줄기세포, 트랜스휴머니즘 등과 같이 현대 과학기술, 특히 생명공학이 제기하는 윤리적, 신학적 문제를 주로 다루어왔음을 생각할 때 사뭇 기대되는 바가 크다. 이번 발표가 이런 모든 문제의 실질적 근간인 다윈 진화론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피터스 교수의 논의는 물론 기독교 신학에 초점을 맞추게 되겠지만, 과학과 종교 논의에서는 추상적인 개념으로서 종교와 과학의 관계보다는 기독교나 불교 같은 구체적 종교와 진화론이나 우주론 같은 과학의 구체적인 관계가 더 큰 부분을 차지하므로, 이번 발표를 특정 종교의 문제만이 아니라, 특정 종교를 통해 과학과 종교 일반에 관한 성찰로 나아가는 출발점으로 삼아도 될 것이다. 그러니 이참에 진화론이 종교와 관련하여 제기하는 문제 몇 가지를 생각해보려 한다.

자연선택은 다윈의 진화론이 제시한 가장 뛰어난 설명체계다. 이에 따르면 진화란 그 자체로 아무런 필연성도 목적성도 없는 지극히 우연적이고 무작위적인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우연은 다윈 진화론이 막강한 경쟁 이론이었던 라마르크 진화론과 크게 차이나는 부분인데, 라마르크 식으로 보자면 진화는 생명체가 환경에 적응한 필연적 결과다. 그러나 라마르크주의는 다윈주의에게 이미 오래 전에 패배했다. 획득형질의 유전으로는 진화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윈주의의 자연 택 이론에 따르면 종의 변이에서 새로운 종의 출현과 소멸에 이르는 진화의 전 과정에서 작동하는 것은 단지 우연뿐이다. 환경 변화에 적응한 생명체들이 필연적으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무작위적으로 생겨난 변이들 중에서 달라진 환경에 적합한 생명체들이 그저 우연히 살아남게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이런 견해는 중대한 종교적 문제를 제기한다. 종교들은 세상의 그 무엇도 우연한 것은 없다고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와 사건은 업보와 인연의 결과이거나 신의 의지와 계획에 따른 결과로 여겨진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의 궁극적 바탕에는 다르마나 신 같은 궁극적 실재가 있다는 것이다. 우연과 무작위성 이외의 다른 어떤 원인도 상정하지 않는 진화론과 모든 것의 근본 원인으로서 궁극적 실재를 말하는 종교는 과연 조화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은 아니며, 실제로 종교들은 이 물음에 나름대로 해답을 제시해왔다. 그 한 가지는 우연이란 단지 눈에 보이는 피상적 현상일 뿐이고 그 너머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궁극적 원인으로서 다르마나 신 같은 궁극적 실재가 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를 말하는 종교들다운 해답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히 않다. 이런 해답을 받아들이기에는 진화의 자연선택 과정을 지배하는 우연과 무작위성의 힘이 너무도 현저하고 강력하기 때문이다. 종교들이 인연이나 신의 섭리의 필연성에 관한 교의에 우연성에 대한 통찰을 접목하려고 시도하기도 해온 것은 이 때문이다. 인연은 단지 필연의 연속이 아니라 필연과 우연의 교차이며, 창조를 향한 신의 뜻은 우연의 여지를 허용할 만큼 넉넉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듯 우연에 대한 생각은 인연이나 창조의 교의를 좀 더 정교하고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그런데 선택과 우연으로 점철된 진화 이야기는 행복의 드라마가 아니다. 생명의 역사는 생존과 성공에 관한 이야기이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고통과 소멸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든 생명체는 생존하기 위해 힘겹게 투쟁해야 하며, 살아남는 데 성공한 극소수의 개체와 종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생명체는 고통을 겪다가 결국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어떤 생명체가 성공적으로 살아남았다고 해도, 이는 엄청난 고통과 소멸의 상처투성이의 과정을 거친 결과일 뿐이며, 또 현재의 지속이 영원히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바뀌면 지금과는 다른 형태의 생명체들이 대신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

물론 인류도 예외는 아니다. 인류는 고통과 소멸로 가득한 생명의 역사에서 어쩌다 주어진 지속의 행운 잠시 누리고 있는 것일 뿐이며, 우리는 역시 고통과 소멸로 가득한 인류의 역사에서 어쩌다 주어진 행복의 순간을 잠시 누리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서 지속과 행복을 누리고 있는 우리는 인류의 역사와 생명의 역사 속에서 고통과 소멸을 겪어왔고, 겪고 있으며, 앞으로 겪게 될 다른 사람들과 뭇 생명체들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경의를 표해야 한다. 우리의 지속과 행복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저들의 소멸과 고통을 대가로 주어진, 분에 넘치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진화의 과정을 가득채운 소멸과 고통에 대한 이런 생각은 종교들이 오래전부터 가르쳐온 자비와 사랑의 정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


다윈의 진화론이 생명과 인간에 대한 확고한 설명틀로 이미 자리 잡은 한 진화하는 세계를 지배하는 우연과 고통이라는 문제는 종교인들이 어떤 식으로든 풀어내야 할 숙제다. 그리고 그들이 이 숙제를 풀어가는 모습은 종교학도들에게 과학과 종교에 관한 메타적 성찰이라는 또 다른 숙제를 제기한다. 진화와 신의 은총이라는 문제를 다룰 피터스 교수의 발표는 문제의 해답이 아니라 문제풀이 과정에서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되는, 우리에게 계속 풀어야 할 커다란 숙제를 던져주는 자리가 될 것이다.


김윤성(한신대 종교문화학과 조교수, jssance@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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