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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역사’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되돌아본다


                                                                                                                                   2013.3.26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다루는 학자들의 태도를 비교하면 확연한 차이점이 발견된다. 삼국사기에서는 ‘사실(fact)’을 찾아내려 하지만, 삼국유사에서는 상징성을 발굴하고자 한다. 삼국사기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기록한 텍스트로 취급한다면, 삼국유사는 숨겨진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텍스트로 여긴다. 오늘날 삼국의 실제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삼국유사보다는 삼국사기가 더 신빙성 있는 자료로 인정된다. 반면 삼국유사의 기록은 ‘허구(fiction)’라서 실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다만 허구라 하더라도 그 안에는 우리가 모르는 의미가 담겨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이를 해독하고자 진력한다.


 

두 텍스트를 다루는 태도가 이와 같은 차이점을 보이게 된 것은 사실과 허구의 이분법적 관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만 가지고는 삼국유사가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던 배경을 설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허구는 허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같은 허구의 텍스트가 조명을 받을 수 있으려면 허구가 지닌 가치가 새롭게 부각되어야만 했다. 허구는 허구를 통하지 않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식의 허구에 대한 새로운 인식론이 전개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삼국유사가 삼국사기 못지않은 자료로 소중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이 허구를 바라보는 시선이 우호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허구는 사실과 어깨를 견줄 수 있을 만큼 독립적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일연 자신도 이와 같은 관점에 동의할지는 미지수이다. 나는 그가 자신이 쓴 글을 허구로 보는 사람들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일연이 살던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사실과 허구의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왜 일연은 불어괴력난신을 강조하는 유교에 반하는 입장을 보였을까. 만약 불어괴력난신의 태도를 허구에 대한 사실의 우위를 강조하는 관점으로 읽을 경우 일연의 그와 같은 태도는 정상적인 의식 상태를 가진 사람이라면 결코 보여줄 수 없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불어괴력난신을 반대하는 것은 결국 사실과 허구도 분간하지 못하는 태도에서나 나올 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연처럼 학식이 높은 사람이 그런 분별력을 결여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불어괴력난신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이 문구가 과연 유교가 지닌 합리주의적 성격을 드러내주는 것인가. 아니면 전통사회에서 형성되었던 실재의 지형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암시하고 있는 것인가.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괴력난신에 해당하는 것을 신이(神異)라고 지칭한 바 있지만, 유교는 어디까지나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종교였다. 그 점을 고려하면 유교는 일연의 신이(神異)를 적어도 허구로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연의 신이를 허구로 본다면 유교의 신들을 ‘사실’로 인정할 근거도 희박해지기 때문이다.

 

불어괴력난신이란 전통시기 실재에 대한 유교의 입장을 드러내주는 담론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보편적이었던 시대에 이러한 신들을 전유하려는 세력들 간의 경쟁이 낳은 담론들 가운데 하나로 보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연의 삼국유사는 불어괴력난신과 경쟁 관계에 놓여 있었던 담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몇 몇 논의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 어떤 것은 ‘사실’ 혹은 ‘역사’로 보고, 또 어떤 것은 ‘허구’ 또는 ‘신화’로 보는 태도가 과연 타당한지에 대하여 심사숙고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 같다.

 

 


임현수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temps82@hanafos.com
최근의 논문으로 <중국 고대 절지천통(絶地天通) 신화 재고: 장광직(張光直)의 논의를 중심으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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