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웰빙 시대 불사의 종교
2013.8.13
현대 사회에서 공공연하게 불사와 영생을 주장하는 종교현상은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으로 간주되곤 한다. 삶을 연장할 수 있는 무수한 장치와 방법들이 인류를 오랜 불사의 꿈에 근접시키고 있기 때문일까? 과학이야말로 그 꿈을 다각적으로 현실화시키려 하기에 불사와 영생은 상대적으로 덜 절박한 종교적 관심사가 된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그 결과 삶의 과잉을 겪게 된 이들에게, 더 이상 죽음이 아니라, 삶의 피로와 공포가 더 커져버린 것인가?
여전히 우리 삶 속에서 죽음이 종교의 상투적 물음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만은 없는 무게로 다가온다 할지라도, 세속화 시대 이후 열린 수많은 ‘새로운 행복의 문들’은 죽음과 삶의 오래된 대비나 실존적 절박함을 희석시켜버린 것처럼 보인다. ‘죽음이라는 원수’를 맞닥뜨려야 하는 삶의 언어가 아니라, 이미 삶 속에 들어와 있는 죽음, 죽음 속에서의 삶을 어디서나 겪고 스펙터클하게 보는 생활환경 속에서 이제는 잘 살고, 잘 죽는 것이 더 절실하고 혹은 트렌디한 종교 언어로 부상했다.
웰빙과 웰다잉의 시대! 방점은 죽음과 삶보다는 ‘잘’에 찍힌다. 이제 종교도 그에 부합하는 실용적이고 공리주의적 사용가치에 따라 값이 매겨지고 존재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렇게 볼 때 이미 충족된 불사와 영생이 오히려 악몽이 될 수 있음을 엿본 현대인들에서 불사와 영생을 말하는 종교는 뒷북치는 이야기, 시류에 동떨어진 촌스런 메시지로 들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이 현대인의 모든 일상 뿐 아니라 종교 담론도 주도하고 있다. 죽는 것보다 재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것, 고통 속에 자신의 삶과 가족의 삶을 소진하는 것, 고통을 대물림해야 하는 것, 삶이 죽음보다 끔찍해지는 것이야말로 더 철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최고’라는 옛 속담의 공감대가 사뭇 약화된 이러한 현대 종교 문화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죽음과 삶에 대한 익숙한 종교적 물음과 해답을 되묻고 그 유효성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불사와 영생, 부활에 대한 직접적 종교적 주장이 희화화되거나 큰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주변화되는 경향은 현대 종교가 더 이상 삶과 죽음이라는 고전적 문제를 중심으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다. 그렇다면 불사의 종교적 꿈은 퇴화된 기관처럼 흔적만 남아 있는 것일까? 아니면 휴화산처럼 잠재되어 있는 것일까? 최근에도 신종교 운동에서 간간히 표출되는 불사와 영생이라는 종교적 욕망은 소위 현대인들에게 낯설며 매개되지 않은 원시적 종교성으로 터부시된다. 한편 현대 문명에 길들여진 제도 종교에게는 희미해진 정통 이단 시비의 경계선을 확인시키는 초점으로만 작동하는 것 같다.
그리스도교의 육체부활 신앙과 영생의 교리는 그 두드러진 사례라 할 만하다. 사도신경의 문구가 보여주듯이, 상당히 초기부터 그리스도교 구원에서 육체부활에 대한 믿음과 부패하는 몸과 물질 속으로 신적인 것이 편입되는 현상은 특징적이었다. 영혼의 불멸은 고대에 널리 퍼진 종교적 관념이었지만, 몸의 부활 신앙 및 그와 관련된 다채로운 종교적 실천들은 영혼불멸의 관념과 연관되면서도 차별화되는 그리스도교적 현상으로 존재해 왔던 것이다. 저명한 스위스의 신학자 오스카 쿨만은 이교적 (영혼)불멸의 교리와 그리스도교의 몸의 부활의 교리의 차이를 지적한 바 있다. 그러한 차이에 대한 강조는 이교와의 연속성보다는 구약성서의 부활신앙과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을 연결시키려는 신학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 특히 육체부활 신앙을 오래된 불사의 종교성 혹은 영혼불멸의 종교적 관념과 비교하고 형태적으로 분석할 수 지점을 포착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스도교의 육체부활 신앙은 세 가지 점에서 종교사적으로 눈길을 끈다. 첫째, 도교가 추구하는 바와 같은 삶의 연장과 지속이 아니라, 죽음을 전제하고 죽음과 통합한 새로운 삶이라는 점, 둘째, 영혼의 불멸과 영생이 아니라 이례적으로 몸의 부활과 영생을 주장한 점, 셋째, 죽음과 삶의 영원 회귀와 순환보다는 개체화된 한 죽음과 삶에 초점이 맞추어진 점이다. 물론 이 특징적인 그리스도교의 육체부활 신앙이 그와 병행될 만한 사례가 없는 독특한 현상은 아니다. 죽음 이후 몸의 부활을 추구한 병행적 종교적 사례들 뿐 아니라, 관련된 다양한 장례와 매장 관습들에 비추어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렇지만 현재 그리스도교 전통 속에서는 많이 퇴색된 이 신앙과 실천은 사실상 상당히 오랜 역사를 가지며 다양한 흔적들을 남기고 있다. 현대 문명 세계에 길들여진 그리스도교 문화가 오랜 그리스도교사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특수한 사례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의심 많은 제자 도마가 부활한 예수의 실제 살을 꼬집고 놀란 표정으로 확인하는 아주 익숙한 그림 속 장면처럼, 육체부활을 부정하거나 상징적 해석으로 환원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사에서 거듭 거부되어왔다. 그러나 한편으로 육체부활과 영생을 직접적으로 주장한 종파도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육체부활 신앙은 이단 정죄의 기준이 되는 교리형식으로 존재하지만, 그리스도교가 종교적 관념과 실천의 역사에서 갈라져 나온 분기점과 관련되기도 하는 것이다.
육체부활 신앙이 아예 부인해서도, 직접적으로 주장해서도 안 되는 식으로 존재하는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은 그리스도교사에서 그러한 신앙이 어떻게 존재했고 어떤 역할을 했으며, 현대 그리스도교에서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성찰을 촉구한다. 웰빙의 시대에, 불사, 부활, 영생의 종교들은 어떻게 존재하고 어떻게 변형되고 있는가?
안연희_
서울대학교 강사
chjang1204@hanmail.net
논문으로 <아우구스티누스 원죄론의 형성과 그 종교사적 의미>, <“섹스 앤 더 시티”: 섹슈얼리티, 몸, 쾌락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 다시 읽기> 등이 있고, 저서로 <<문명 밖으로>>(공저), <<문명의 교류와 충돌>>(공저)이 있다.
'뉴스 레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77호-세계 그리스도교와 한국 개신교회의 이면 보기(신재식) (0) | 2013.11.18 |
---|---|
276호-전제적(authoritarian) 종교와 인본적(humanistic) 종교(이혜숙) (0) | 2013.11.18 |
274호-종교의 미래와 불교계의 혁신방향(원영상) (0) | 2013.11.18 |
273호-제9차 안동 종교문화 탐방 후기(김후련) (0) | 2013.11.18 |
272호-한국 사회의 생태운동과 종교(유기쁨) (0) | 2013.11.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