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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르네 지라르, 세상의 비밀을 알려고 했던 지성의 영혼이여
2015.11.10
프랑스 출신의 사상가 르네 지라르가 지난 4일 캘리포니아 주의 스탠포드에서 타계했다. 1923년 프랑스 아비뇽에서 태어난 지라르는 파리고문서학교에서 중세사를 공부했고 <15세기 후반 아비뇽의 사생활>이라는 논문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50년 인디아나대학에서 <1940-43년 미국의 프랑스에 관한 여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53년까지 인디아나대학에서 프랑스문학을 가르친 후에, 듀크대학과 브린모대학을 거쳐 1961년 존스홉킨스대학에서 정교수가 되었다. 그 후 수년간 버팔로 뉴욕주립대학과 존스홉킨스대학을 오가며 가르치다가 1974년부터 스탠포드대학에서 프랑스사상을 가르쳤다.
존스홉킨스대학의 교수시절에 발표된 그의 첫 저서인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지라르는 욕망의 구조를 제시한다. 세르반테스, 스탕달,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 프루스트 등의 문학작품을 분석하면서,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을 매개로한 가짜 욕망임을 밝힌다. 지라르에 따르면, 인간은 그 가짜 욕망을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며, 소설은 그러한 태도가 ‘낭만적 거짓’임을 밝히는 데 그 가치가 있다, 욕망에 대한 그의 관점은 폭력의 구조를 밝힌 《폭력과 성스러움》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모방자와 모방대상 간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모방 욕망의 강도는 높아지고 양자 간의 동질화로 공동체의 위기를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이를 막기 위해서는 차별성을 드러내는 폭력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제의적 살해, 곧 희생양을 세우고 그에게 죄를 씌워 죽임으로써 공동체 내부로 향하는 폭력을 밖으로 분출시켜 사회를 안정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지라르는 이것을 ‘초석적 폭력(礎石的 暴力)’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눈에 띄지 않은 채 사회에 내재되어 사회를 지탱하는 폭력이다.
문화는 차이의 체계이며, 이 체계가 위기에 직면할 때 사회 내부에서는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한다는 그의 관점은 지극히 보수적이다. 더욱이 희생양에게 실제로 죄가 없다는 진실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기술된 그리스도교의 <성서>에서만 밝혀진다는 그의 주장에서는 서구 그리스도교 중심주의를 읽어낼 수 있다. 인간은 욕망과 폭력의 쌍두마차를 탄 존재이고 그러한 연유를 알려준 그의 분석력은 높이 살 일이지만, 그의 사유에서는 욕망과 폭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가 성스러움과 폭력을 연계하면서, 결과적으로 폭력을 통한 구원을 말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지라르는 성스러움이란 인간을 지배하는 모든 종류의 힘이라고 보면서, “폭력은 성스러움의 심장이요 은밀한 영혼”이라고 강조한다. 공동체를 위협하는 혼란과 위기를 막기 위해서는 희생양 만들기와 살해라는 대체 폭력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욕망과 폭력에서 벗어나는 길을 종교에서는 찾을 수 있을까?
그리스도교 신학을 공부할 때였다. 소심한 탓에 질문을 거의 못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는데, 그 날은 용기를 내어 질문을 던졌다. “구원이란 무엇인지요?” 답이 돌아왔다. “모든 구속하는 것으로부터의 해방이지.” “해방!” 그 답을 준 스승은 1992년 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출교를 당한 변선환 교수였다. 그 이후로 ‘구원’이라는 단어는 모호한 신학적 수사들을 떨쳐내고 내 가슴 속에 오롯이 새겨져 있다. 해방으로서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종교는 욕망과 폭력으로부터의 벗어남을 가르쳐야 하고 그 길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최소한 내가 신앙의 자리로 삼는 개신교에 한해서 본다면, 사회가 그 길을 개신교에게 알려줘야 하는 상황에 이른 듯이 보인다. 교회는 성장과 복음 전파를 혼동하면서 신에 대한 학문(theo-logy)보다는 교회 경영학에 몰두하고 있다. 효율성과 이익의 잣대로 교회 성장을 추구하기 때문에 교회운영을 잘하는 ‘성스러운 전문가’들의 생산과 교환체계가 개신교에 형성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그 전문가들에게서 도덕성과 겸손을 찾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신학생과 목회자들은 명예, 권력, 부를 갖춘 그들이 되기를 소망하며 그들의 기술을 배우는 데, 곧 모방하는 데 온 힘을 다한다. 기독교 종립대학에서 총장직을 연임하던 어느 신학자는 학내 문제의 해결을 외면하고 돌연히 세간에 이름난 교회의 담임목사로 ‘영전’(?)한다고 하고, 한국 자유주의신학의 본산인 감리교신학대학에서는 학내 문제로 교수가 첨탑에 올라가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하니, 그 문제의 근원에는 욕망과 폭력이 자리하고 있음은 명약관화하다. 학문의 자유와 진리 탐구의 열정으로 맺은 민중신학과 토착화신학은 교회 영토의 변경에 머물거나 축출될 운명에 처해졌다. 이제 비로소 한국에서 개신교는 진정한 ‘한국적인’ 그리고 ‘세상적인’ 교회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지라르는 자신의 연구가 자신을 그리스도에 관한 신앙으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그는 희생양은 죄가 없으며 사회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죽임을 당한다는 진실이 예수의 구속 행위에서 그대로 드러난다고 보았다. 반면에 한국 개신교회는 교회 성장에 대한 지나친 열정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성장과 성공의 신화가 교회와 현실을 지배하면서 그 안에서 고통을 겪는 배제된 자와 차별받는 자는 가려진다. 교회 안에서도 그 밖에서도 그 높은 제왕적 지위를 향한 몸부림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신음하고 사라져간다. 이마무라 히토시는 《근대성의 구조》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회적 인간이 사회성의 폭력을 발동해 나가서 배제와 차별의 그물망을 펼친다면, 배제와 차별의 메커니즘을 거꾸로 해서 나가기로 하는 것이 좋다. 소수자를 배제하는 것이라면, 우리 자신이 배제되는 것이 어떤가. 희생자 만들기가 사회적 인간의 임무라면, 우리 자신이 희생자가 되는 것이 어떤가.” 그는 스스로 희생자의 자리에 서있으려는 각오를 다짐할 때만 집단 폭력에 가담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구원의 기획이 종교 내부에서가 아니라 종교 외부에서 이루질 수는 없을까? 만약 우리가 희생자의 자리에 설 각오를 한다면, 그 각오는 종교적 신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희생자의 자리를 타자에게 강요하고 배제와 차별의 현실을 외면하거나 그것을 조장하는 종교로부터 절연할 때, 그리고 희생자의 자리에 서려는 각오로 세상을 맞설 때 욕망과 폭력의 늪에 빠진 인간이 구조될 가능성은 조금 높아질 것이다.
르네 지라르는 인간은 욕망과 폭력을 딛고 서 있는 불온한 존재임을 알려준 예언자적 지식인이었다. 실존적인 물음을 자신의 연구에서 놓지 않았던 지성의 영혼, 지금 그는 하늘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을지 모른다. “지금 네가 서 있는 곳을 보라!”
박상언_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원
논문으로 <배아줄기세포연구의 생명윤리담론 분석: 한국 기독교와 불교를 중심으로>,<간디와 프랑켄슈타인,그리고 채식주의의 노스탤지어:19세기 영국 채식주의의 성격과 의미에 관한 고찰>,<신자유주의와 종교의 불안한 동거: IMF이후 개신교 자본주의화 현상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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