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학에 대한 기대에 부응할 준비는 되어 있는가
news letter No.474 2017/6/13
1. “인문학은 표류하고 있다.”
미국 프린스턴대 철학교수 월터 카우프만(Walter Kaufmann, 1921-1980)은 《인문학의 미래(The Future of the Humanities: Teaching Art, Religion, Philosophy, Literature and History)》(1977) 서문에서 이렇게 ‘인문학의 위기’를 강조했다. 40년 전 카우프만의 이 진단은 과거의 인문학에 대한 평가일 뿐, 이제 무용한 말일까?
필자는 지난해 ‘촛불’을 보면서 ‘인문학의 위기’를 떠올렸다. 마치 ‘촛불’은 바로 이 ‘인문학의 표류’를 바로잡고자 일어난 운동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특히 ‘이게 나라냐!’라는 짧은 표말과 구호는 인문학의 절규로 느껴졌다. ‘이게 나라냐!’는 질문을 던질 때 우리는 ‘나라다움’의 이상(理想)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이상에 비해 그 ‘~다움’의 부재를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다. 촛불은 나라와 그것을 운영하는 권력자들의 ‘다움’에 대한 인식의 부재에 절망하고 있었고, 어떤 형식으로든 그 ‘다움’의 복원을 꿈꾸는 물결이었다.
‘촛불’을 보며 ‘인문학의 표류’를 떠올렸던 것은 그 ‘다움’의 철학적 논리가 어떠하든 간에 궁극적으로는 지식인과 지식인들이 공유, 생산하고 있는 인문학에도 ‘다움’의 부재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촛불이 타오를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은 비단 정치사회나 시민사회만의 책임이 아니었다. 왜 인문학은 그 동안 ‘다움’의 부재를 방치해왔고, ‘다움’이 부재한 현실에 개입하려 하기보다 외면해왔던가. 왜 인문학은 ‘순수성’이라는 학문의 얼굴을 내세워 인문학다운 역할을 방기해 왔던가. 설령 촛불이 정치적·사회적 변화를 이끌어 낸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국가와 정치, 사회와 시민, 사람과 인격에 대한 ‘나라다움’, ‘사람다움’을 성찰하지 않고서는 이 상황이 또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역사적 경험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이 ‘다움’은 다른 말로 ‘무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학이 ‘자연의 무늬’를 연구한다면, 인문학(人文學)은 ‘사람의 무늬’에 대해 탐구한다. 인문학은 정치, 경제 등 사회과학의 전제와도 같은 역할을 하며, 사회과학의 출발점이자 결론이기도 하다. 어떤 사회정치적 변화도 궁극에는 사람 ‘다움’, 사람의 ‘무늬’와 ‘색깔’에 대한 성찰 없이 ‘의미와 가치’있는 변화의 지점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2. ‘촛불’의 공간이었던 광화문 광장이 단순한 정치적 광장이 아니라 인문학적 상징의 공간이라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광장은 서울의 핵심인 경복궁과 숭례문 사이에 만들어졌다. ‘촛불’이 바라보고 있던 ‘경복궁’은 유교적 이상국가를 꿈꾸던 정도전이 《시경》과《서경》에서 따온 ‘나라다움’을 가르치는 인문학적 개념으로 가득차 있다. 정전인 ‘근정전(勤政殿: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된다)’, 편전인 ‘사정전(思政殿: 생각하면 슬기롭고 슬기로우면 성인이 된다)의 이름은 엄숙하게 이 시대를 꾸짖고 있지 않은가. 또 조선 시대 한양의 사대문은 단지 기능적 역할만이 아니라 유교적 가치의 인문정신을 구현한 건축물이었다. 흥인지문(興仁之門), 돈의문(敦義門), 숭례문(崇禮門), 숙정문(肅靖門)은 ‘인의예지’라는 ‘인간다움’, 인간의 ‘무늬’를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오늘날 과거 우리의 인문정신이 삶 속에서 가치로 자리잡지 못하고 한낱 쓸쓸한 유적으로 굳어져 왔음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있지 않은가?
3. ‘촛불’이 막 시작되기 직전 2016년 10월 27~29일, 아주대학교에서 제 4회 세계인문학포럼(World Humanities Forum)이 열렸다. 이 포럼 마지막 날 조동일 교수는 〈인문학교육의 사명(The Mission of Humanities Education)〉을 발표하였다. 학문방법론에 대해 오랜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그 분의 강연은 많은 영감과 통찰을 제공했다. 그런데 정작 필자가 그 강연에서 ‘충격’을 받은 것은 종교학의 역할에 관한 그 분의 논지였다. 내용의 핵심은 이렇다. (《2016 세계인문학대회 자료집》, pp.135-136; http://worldhumanitiesforum.com/pdf/1.pdf)
“계급모순 대신에 민족모순, 또는 민족모순의 성격을 지닌 문명권모순 때문에 세계 도처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이런 사태에 대처하는 방안을 자연학문이나 사회학문은 내놓지 못하므로, 인문학문이 분발해야 한다. 물질적 조건이나 계급관계로 설명되지 않는 그 무엇이 민족모순을 빚어내는 지 밝혀내고 해결방안을 찾는 것이 인문학문의 사명이다. (중략) 이제 각 종교의 포교용 교리학과 결별하고 모든 종교의 본질에 관한 포괄적 해명을 하는 종교학(religious studies)이 확고한 모습을 드러내 근대를 넘어서서 다음 시대로 나아가는 학문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때가 되었다. 경제학에서 계급모순을 다루던 과업을 넘겨받아, 다음 시대를 위한 종교학은 민족모순을 다루는 데 앞장서야 한다. (중략) 근대 다음 시대로 나아가 학문을 선도하는 종교학은 중세의 유산인 통찰을 이어 받아 근대학문의 이성을 넘어서야 한다.”
국문학계의 원로가 새 시대의 선도적 학문으로서 다른 무엇보다도 ‘종교학’의 중요성을 선명하게 주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때 종교학은 어떤 종교학이어야 할까 하는 질문이 등장할 것이다.
“새로운 종교학은 종교를 중심에다 두고 모든 문화현상을 함께 다루는 통합학문이어야 한다. 문·사·철을 포괄하는 종교문화사여야 한다. 그러나 사실 열거를 능사로 삼지 않고, (중략) 기존 학문을 넓게 포괄하고 넘어서는 통찰을 갖추어야 한다. 모든 종교는 하나이다. 어떤 종교를 믿어도 구원에 이른다. 특정 종교를 믿어 편견에 사로잡히는 것보다 아무 종교도 믿지 않아 너그러운 것이 더 훌륭한 믿음이다. 너그러움이 최상의 구원이다. 이런 가르침을 베푸는 통합종교학이 오늘날의 경제학처럼 전 세계 모든 곳 어느 학교에서든지 기본교과목이 될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필자는 종교학 이외의 전공자가 이 처럼 종교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예를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종교학을 전공하고 있는 우리 자신은 종교학에 그러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가?
‘인문학이 표류하고 있다’고 강조한 카우프만도 종교학에서 ‘인문학의 구원’을 모색했다. 카우프만은 니체 전공자이면서도 《종교와 철학 비판》(1958), 《4차원의 종교(Religions in Four Dimensions)》(1976) 등 종교에 관한 책들을 많이 출판했다. 그는《4차원의 종교》에서 “종교보다 더 중요한 과목은 없다. 종교는 가장 운명적인 질문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했으며, 《인문학의 미래》에서는 “비교종교학보다 더 중요한 과목은 거의 있기 어렵다”고 했다. 종교적 경전들이 소크라테스적인 정밀한 조사와 변증법적 읽기를 위한 완벽한 소재이며, 학생들에게 문화적 충격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문학을 연구하는 목적이 인류의 걸작들을 보존하고, 다른 대안들을 숙고해 보며, 사람들을 덜 맹목적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비교종교학이야 말로 인문학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해야 할 것이다. 《성경》, 《법구경》, 《도덕경》과 비견될 수 있는 문학작품은 없기 때문이며, 가장 뛰어난 회화, 조각, 건축, 음악작품들은 종교적 맥락을 떠나서는 충분히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조동일 교수의 깊은 통찰과 카우프만의 오래된 직관을 떠올리면서 종교학 연구자로서 사명감 같은 것을 추스릴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마냥 낙관적일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 시대의 ‘촛불’ 속에 담겨진 인문학의 요구에 과연 종교학은 충분히 부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송현주_
순천향대학교 교수
논문으로 <서구 근대불교학의 출현과‘부디즘(Buddhism)’의 창안>,<한용운의 불교·종교담론에 나타난 근대사상의 수용과 재구성>, <근대 한국불교의 종교정체성 인식: 1910-1930년대 불교잡지를 중심으로>등이 있다